선정지상주의
그러나 이 중도란 것은 매우 단순한 일상적 통찰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우리나라의 선정(禪定)에 빠져있는 불자들, 특히 좌선을 적통으로 삼는 선불교(Zen Buddhism) 전통 속에서는 중도를 깨달음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보리수 밑에서 대각ㆍ성도를 했다는 싯달타의 모습을 생각할 때, 항상 가부좌 틀고 눈을 지긋이 감고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는 요가수행자적인 선정의 성자의 모습만을 중도의 요체의 구현태로 생각하기 쉽다. 이것은 후기 대승 불교의 아이코노그라피(iconography, 圖像學)가 만들어놓은 매우 불행한 오류 중의 하나이다. 즉 대각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가부좌 틀고 앉아있으면서 한(寒)ㆍ서(暑)를 인종(忍從)하고 버티어 내기만 하면 어느 결엔가 후딱 찾아오는 어떤 황홀경이 아닌 것이다. 가부좌란 인도인들이 앉는 일상적 습관의 하나일 뿐이며, 그것은 실로 붓다의 대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대각이란 책상다리로도 가능한 것이요, 똥 눗는 자세로도 가능한 것이요, 드러누워서도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꼭 보리수나무 밑이어야만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싯달타라는 한 인도 청년의 삶의 역정에서 주어진 하나의 우연한 세팅이었을 뿐이다.
특히 선정주의나 고행주의는 당시 인도 출가수행자들에게 매우 유행하던 수행방법이었으며, 이미 고타마 싯달타는 그 방법을 6년이나 마스터한 터였다. 그런데 어찌 새삼 그러한 고행을 부정한 그에게 또 다시 보리수나무 밑에서의 선정(禪定)이 싯달타에게 대각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하는 망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뉴우 웨이로서의 중도를 다시 한번 심도 있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선정(禪定)이란 중국의 선종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원래 산스크리트어의 다나(dhyāna)라는 말의 음역인 선(禪)【현재 중국발음은 ‘츠안’인데, 그 옛 발음은 ‘댜나’와 상통하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 중고음은 ‘dziæn’으로 재구된다】과 그 선의 뜻을 중국말로 풀은 ‘정’(定)이라는 의역을 합친 말일 뿐이다. 즉 음역과 의역을 합쳐서(절) 한 단어로 만든 것이다. 장충동 동국대학교 앞에서 많이 파는 돼지족발의 ‘족발’(足+발)과 같은 용례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중국인이 이해한 선(禪)은 곧 정(定)인 것이다. 정신을 한군데로 정(定)하여 동요가 없게 하고 고요히 하여 잡념을 없애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위하여 인도인들은 요가수행의 자세들을 고안해낸 것이다. 그것은 인도의 오래된 문화적 관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싯달타는 오랫동안 이 선정주의에 몸을 의탁하여 보았다.
과연 선정의 삼매(三昧, 산스크리트어 samādhi의 음사, 三摩地라고도 쓴다)에 들어가게 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호흡에 집중하면 개념적 잡사들이 사라지며, 정신이 집중되면서 모든 화기(火氣)들이 수그러들고 무념무상의 명경지심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선정의 경지는 몸의 한 상태일 뿐이며, 입정의 상태로써만 유지된다는 것이다. 선정을 풀고 마음이 흩어진 상태에 있으면 또 다시 잡념이 일어나고 자유롭지 못한 사태들이 끊임없이 나를 속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선정을 하여 심신평정의 희열을 맛보았지만, 그러한 정신적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항상 입정(入定)의 상태로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런 말을 하면 참으로 죄송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항상 선정에 잘 들어간다는 고승들을 보면, 아편쟁이들이 아편으로 도달하는 경지나, 술꾼들이 술로써 도달하는 몽롱한 경지나, 음악가들이 음악으로써 도달하는 경지나, 장인들이 자기 공력속에서 무념의 집중으로 도달하는 경지나 도무지 별차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얼굴이 뇌리끼리해져서 선방만을 쑤시고 돌아다니는 선승이나 마리화나에 얼이 빠져 항상 써클실에 쑤셔 박혀있는 떨떨한 대학생들이나 별 차이가 없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선정은 약물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부작용이 없는 건강한 방법이라고 하겠지만, 사실 끊임없이 아편의 연기 속에서 완벽한 정신적 자유를 구가하면서 1년을 살다 죽은 사람이나, 선방만을 전전하면서 백년을 산 사람이나, 기나긴 윤회의 고리에서 본다면 가치판단의 우열을 가릴 길이 없을 수도 있다.
우리가 지금 혁명코자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다. 선정이라는 절묘하고 오묘하고 심묘한 몸의 상태가 아니다. 우리 삶의 고뇌를 벗어나고자 하는 총체적 노력은 결코 선정지상주의로써는 아뇩다라(anuttarā, 阿耨多羅)의 결실을 맺을 수 없었던 것이다.
▲ 티벹스님들은 온몸을 땅에 깔았다가 일어나는 고행을 계속한다. 이것을 오체투지(五體投地)라고 한다. 보드가야 대탑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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