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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합일과 피타고라스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합일과 피타고라스

건방진방랑자 2022. 3. 14.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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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일과 피타고라스

 

 

우리는 여기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위대한 철학이 이미 인도에 성숙되어 있었다면 도대체 싯달타라는 청년이 새롭게 얘기할 건덕지가 무엇이 있겠는가? 윤회와 해탈과 업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이미 완성되어 있지 아니 한가? 과연 싯달타가 말하는 중도란 무엇이며, 새로운 인간이란 무엇인가?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말을 잘 살펴보면, 여기에는 깊은 함정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브라흐만(Brahman)아트만(ātman)이 하나라는 이 명제 자체로도 기독교와 같이 신에 대한 인간의 철저한 복속이나 복종, 그리고 일방적인 관계로만 설정된 의미맥락에서는 매우 이단적일 뿐 아니라, 이미 충분히 서구의 유일신관과는 다른 동방적 신비주의의 원융(圓融)한 냄새를 풍긴다.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초기 기독교 정통파들의 주장대로 성자인 예수가 성부인 신과 한몸(homoousion tō Patri)이라고 한다면, 사실 모든 인간도 똑같이 신성을 구유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에게 인성을 부여하는 한에 있어서, 그가 생멸의 대상인 한에 있어서, 그에게는 신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아리우스파들의 주장은 훨씬 더 명료하고 설득력이 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라는 인간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의 유니크한 절대성ㆍ불멸성ㆍ유일성ㆍ비창조성을 확보하기 위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3255월의 니케아 종교회의(The Council of Nicaea)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끝내 아리우스는 추방당하고 말았지만, 그를 저주한 콘스탄티누스대제-아타나시우스 계열의 삼위일체파들의 주장은 한없이 애매한 것이다. 예수라는 인간에게 완벽한 신성을 부여했다면, 범아일여론의 가능성을 모든 인간에게 부여했어야 하는 것이다삼위일체를 둘러싼 의논들은 매우 애매하다.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해설한 글로서 나는 암스트롱의 하기서를 들겠다. Karen Armstrong, “Trinity: The Christian God,” A History of God (New York : Ballantine Books, 1993), pp.107~131. 삼위일체 정통파들을 카파도시안즈(The Cappadocians)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주장은 신은 하나의 본질(ousia)일 뿐인데 그것은 우리의 언어나 감관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그 본질은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세 개의 표현태(hypostases)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성부, 성자, 성신이다. 성부, 성자, 성신 이 하나로써만은 항상 불완전한 파악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일체(一體)는 잠재태이며 삼위(三位)는 현실태인 것이다. 아리우스는 이러한 삼위일체설은 오히려 신을 인간화시키고 우상화시키는 오류를 범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철저히 피조물로서의 인간일 수밖에 없으며 신일 수 없다. 로고스도 인간일 수밖에 없다. 신은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그 무엇이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으로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신에 복종하였다. 그래서 신은 그에게 퀴리오스(kyrios, 주님)라는 신적인 타이틀을 주고 또 신적인 지위로 그를 승격시킨 것이다. 예수의 신성은 예수의 본질이 아니라 후천적인 보상이며 선물이다. 예수가 인간이 아니라면 우리는 희망이 없다. 우리 인간은 인간예수를 본받을 수 있기에 우리도 신격화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우스에게는 예수의 인성에 관한 철저한 인본주의와 인간의 신격화에 대한 낙관주의가 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를 철저하게 신성적 존재로 보고 그 인간적 모습은 구속자로서의 현현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예수가 인성의 허약함에 복속된다면 그는 인간을 구원할 자격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를 분리시키면 다신론의 위험성이 개재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범아일여론을 자세히 뜯어보면, ()과 아(), 그리고 일여(一如)라는 말 자체가 모두 심각한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범아일여의 도식 속에는 어디까지나 범과 아가 독립적인 실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범과 아가 하나라는 얘기는 매우 신비스럽게 들리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나이기 전에 그 둘이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부부끼리 당신과 나는 하나라고 아무리 외쳐본들, 결국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니다. 당신과 나는 하나라는 감언이설의 내면에는 당신과 나의 실체적 분열이 심각하게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라는 말, ‘일여라는 말, 보다 정확하게는 합일이라는 말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신비주의는 우주의 통일성ㆍ제일성ㆍ합법성의 원리로서 일자(一者, the One)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신비주의자들은 이 일자와 교섭이 되는 루트를 발견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러한 루트를 통해서 궁극에는 그 일자와 하나가 되는, 즉 합일이 되는 경지를 추구한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 그레코로망의 전통의 배면에도 깊게 깔려있는 흐름이다. 피타고라스(Pythagoras, c. 580~c. 500 BC)는 그러한 합일의 열쇠를 수학이라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자라기보다는 어떤 모종의 신비주의적 종단의 교주였으며, 그 자신 일차적으로 철저한 신비주의자였다. 수학의 특징은 경험적 사태에 의존하지 않고, 보리수 밑에서 사색하는 싯달타처럼, 인간의 사유의 능력만으로 어떤 우주의 신비를 풀어나가는 그러한 의식과정을 전개시킨다는 것이다. 골방에 쑤셔 박혀 복잡한 방정식을 푸느라고 골몰하고 있는 수학자야말로, 우주의 일자와 합일이 되기 위해서 산 속의 토굴 속에서 사색에 몰두하고 있는 신비주의자와 본질적으로 하등의 차이가 없다. 수학의 특징은 연역적 사유의 관계양상, 우리가 토톨로지(tautology)라 부르는 등식의 관계를 끊임없이 변주시켜 나가면서 최후의 어느 일순간에 그 전체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는 데 있다. 즉 수학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돈오의 최초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수학은 인간의 영혼에게 돈오의 취하는 기쁨’(the intoxicating delight of sudden understanding)을 제공하는 것이다. 수학의 이론, 우리가 소위 테오리아’(theoria)라고 부르는 이론은 과학의 이론이기 전에 일차적으로 엑스타시적인 계시’(ecstatic revelation)였다. 최소한 피타고라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계시야말로 수학이 그에게 주는 의미였다수학을 돈오와 연결시켜 설명한 것은 이미 수학자이며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 버트란드 럿셀경이 그 유명한 서양철학사속에서 한 말이다.

For Pythagoras, the ‘passionate sympathetic contemplation’ was intellectual, and issued in mathematical knowledge. In this way, through Pythagoreanism, ‘theory’ gradually acquired its modern meaning; but for all who were inspired by Pythagoras it retained an element of ecstatic revelation. To those who have reluctantly learnt a little mathematics in school this may seem strange; but to those who have experienced the intoxicating delight of sudden understanding that mathematics gives, from time to time, to those who love it, the Pythagorian view will seem completely natural even if untrue.

Bertrand Russell,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New York : A Touchstone Book, 1972), p.33..

 

 

 피타고라스 모습이 새겨진 5세기초 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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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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