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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대각은 앎이다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대각은 앎이다

건방진방랑자 2022. 3. 1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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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은 앎이다

 

 

그런데 원래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라는 것은 더 없는 최상의 바른 앎이라는 뜻이다. 붓다의 어원인 ‘buddhi’지능’(intellectual capacity)이며, ‘지성’(intelligence)이며 이성’(reason)이며, ‘식별’(discermment)이며, ‘이해’(understanding), ‘합리적 견해’(rational opinion)를 의미한다. 보리와 관련된 ‘bodha’이해한다,’ ‘안다는 뜻이다. 붓다가 말하는 깨달음의 원초적 의미는 일 뿐이다. 우주와 인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그릇된 앎이 아니라, 바른 앎이다. 그것이 곧 지혜요, 깨달음이다. 싯달타가 6년 동안의 선정주의고행주의를 떨쳐버리고 핍팔리 나무 밑으로 향했던 것은, 바로 선정도 고행도 아닌, 선정과 고행을 초월하는 새로운 지혜를 향한 발돋움이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지혜, 우주와 인간에 대한 바른 통찰, 이것이야말로 그가 생각했던 중도(madhyamā pratipad)였다.

 

우리나라 절깐에 가면 입구에 아름알이를 가진 자 이 문을 넘어내지 말라는 등의 문구를 붙여 놓거나 돌기둥에 새겨놓은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아름알이란 말 자체도 전혀 어법적으로 잘못 구성된 족보없는 말이려니와, 이런 문구를 걸어놓고 있는 스님들이야말로 한국불교를 상식적 대중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부끄러운 구업을 쌓고 계시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자라고 한다면 아름알이, 즉 지식에 대한 하등의 공포를 가질 이유가 없다. 모든 지혜는 지식에 대하여 개방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혜와 지식의 이원적 구분이야말로 우리나라 선종을 비불교적인 말폐로 끌어가고 있는 장본인인 것이다. 인간의 지혜는 지식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농사꾼이 농사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토양의 화학적 성분에 대한 분석적 앎만이 지식은 아니다. 농부가 땅과 하늘과 씨와 배양에 관한 모든 것을 아는 것, 그 모든 것이 지식이다. 직관적 앎도 지식이다. 지식의 체화가 곧 지혜일 뿐이다. 앎을 통하지 않고 얻어지는 지혜는 없다. 밀교에서 말하는 비전적인 지혜조차도 앎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앎을 습득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분별적 지식을 거부함으로써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 하는 것도 하나의 지식이다. 선방에서 외쳐대는 할()의 방망이도 하나의 지식이다. 불립문자도 하나의 지식이다. 성철스님이 말씀하시는 돈오돈수도 하나의 지식이요, 하나의 앎이다. 성철스님도 항상 타임지를 읽는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신 분이요, 한학에 능하여 유려한 게송을 읊는 것으로 존경을 받았던 분이다. 성철스님도 항상 이 세계에 대한 앎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으신 훌륭한 스님이었다. 싯달타는 정말 알려고 몸부림쳤던 것이다. 고행(苦行)을 통해서는 그에게 그 이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고행 그 자체에의 충실은, 쾌락 그 자체에의 충실과 하등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싯달타는 왜 이렇게 인생이 괴로운 것이며, 이 모든 중생의 고의 근원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 고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있는 것인지, 그 고의 궁극적 원인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엉터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알고 싶었던 것이다.

 

각자(覺者), 즉 붓다의 최종적 의미는 이러하다. 정말로 아는 사람(one who really knows)! 싯달타가 붓다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싯달타가 중도를 깨달았을 때를 회상하여 외친, 앞서 인용한 마하박가의 초전법륜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중도는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킨다.” 그의 중도가 지향했던 바는 뛰어난(殊勝, 수승) 앎이요, 바른 깨달음이었다.

 

 

 싯달타가 대각한 후에 처음으로 설법한 초전법륜지, 사르나트의 녹야원(鹿野苑) 전경. 당시에는 이 근방에 사슴이 많이 살고 있었다. 여기 보이는 탑(Dhamekh Stupa)은 아쇼카시대에 지어진 것을 굽타시대 때(AD 500년경) 새롭게 증축한 것이다. 내가 갔을 때 티벹 승려들이 법회를 열고 있었다.

 

 

인용

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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