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이 살린 목숨
“최영애 선생님께 중국어를 들었어요.”
어딜 가나 한국여행객들과 부딪치게 마련이다. 연대 인문학부 4학년의 여학생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렇게도 남루한 여행객 복장을 하고 있는 나를 어둠 속에서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참 신기하게 느껴진다.
“도올서원 10림입니다.”
남녀 커플로 온 젊은이들이 또 인사한다. 그 남학생이 도올서원에서 나에게 배웠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기억이 났다. 나는 그동안 도올서원에서 한 3천여 명의 제자들을 키워내었다. 요즈음 내 인생의 보람이란 이들에게 거는 기대밖에 없다. 학문을 하는 이들은 모름지기 젊은이들의 품성을 길러주고 지식을 전수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마하보디 스투파(stūpa)에서 돌아오는 길에 참혹한 풍경이 눈에 띄었다. 불교순례객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이곳에는 인도거지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사는 것이다. 그들이 길거리, 차거운 돌바닥 위에서 그냥 잔다. 거적을 뒤집어쓰고 앉은 채 누운 채 옹기종기 모여 웅크리고 기대있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영화 『벤허』에 나오는 문둥병자들의 모습 같았다. 실제로 나병환자들이 많았다.
수자타호텔을 들어서는데 또 일군의 한국 대학생들이 인사를 한다. 동국대 영문과 다닌다는 검은 얼굴에 키가 큰 여학생, 그리고 보디가드처럼 붙어 다니는 땅땅한 남자친구, 그리고 까무잡잡한 인도인처럼 생긴 남학생…… 그런데 그 인도인처럼 생긴 남학생은 한국말을 썩 잘하는데 알고 보니 진짜 인도사람이었다. 이름을 ‘반디’라 했는데 전북대학교 경영학과 1학년에 재학중이라고 했다. 바로 보드가야사람인데 보드베가스(‘라스베가스’에서 ‘라스’를 깨달음을 의미하는 ‘보드’로 바꾼 것이다)라는 한국음식점을 경영한다는 것이다. 군침이 돌았다. 그렇지 않아도 인도음식에 좀 질력이 나서 남군 보고 이 근처 한국절 좀 찾아보라고 했던 것이다. 남군이 한국절을 갔다와서는 하는 말이 스님도 안 계시고 관광객 몇 명만 유숙하고 있는데 한국음식이 다 떨어졌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보드베가스가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반디군에게 물어보니 경찰서 옆에 있는 싸인만 따라 들어오면 자기집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식당이라고 해봤자 자기집 옥상이라는 것이다. 한국음식이 있냐고 하니까 자기가 한국에서 살면서 식품재료를 여기 사는 동생들에게 부쳐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라면이 있냐고 물었더니, 야속하게도 어제 한국 대학생들이 몰려와서 다 먹어치웠다는 것이다. 하룻밤의 간발의 차이로 우리는 한국라면의 카랑카랑한 맛을 음미할 절호의 기회로부터 탈락하고 만 것이다.
나는 대학생 때 재미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철학과 친구가 지독하게 염세비관을 해서 자살을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숙방에 앉아 약을 사다놓고 죽으려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염라대왕한테 가면 라면을 못 먹게 될 것 같아서 너무 억울하더라는 것이다. 순간 군침이 돌았다. 그래서 라면이나 실컷 먹고나 죽자 하곤 라면을 끓여먹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죽어 라면 못 먹는 것보다, 라면이나 먹으면서 사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꾸며낸 우화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다. 한국인의 라면중독현상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나는 평소 라면을 먹지 않는다. 라면은 결코 권장할 만한 음식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때 어느 순간엔가 못 견디게 라면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인도에서의 나의 느낌이 그러했다. 반디는 김치국과 미역국은 끓여줄 수 있다고 했다.
사암 한기 속의 꿈
2002년 1월 8일이 드디어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기나긴 하루였다. 기나긴 사색의 하루였다. 주욱 사지를 뻗고 편안케 자려는데 예상했던 대로 한기가 엄습했다. 기분나쁜 사암의 한기가 살기(殺氣)로서 뼈 속까지 쑤시고 들어오는 것이다. 몸서리쳐지는 음산한 느낌이었다. 나는 악몽에 시달렸다.
갑자기 엄마하고 마포에 새우젖을 사러갔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런 풍경을 상상도 못할 것이다. 마포 어귀에 늘어선 새우젓 독… 뭔가 그런 몽롱한 느낌 속에 갑자기 달라이라마를 만났다. 달라이라마께서 내 손을 잡아주셨다. 나는 그의 발 밑에 두 번이나 엎드려 큰 절을 했다. 그랬더니 달라이라마께서 엎드린 나를 일으켜 세워주셨다. 난 얼굴을 치켜 들면서 달라이라마님께 여쭈었다.
“제 편지를 받아 보셨습니까?”
그랬더니 달라이라마께선 자툴 린포체 대사의 일도, 내 편지도 전혀 모르고 계셨다. 전혀 나에 관한 소식을 들은 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덜컹했다. 그랬더니 달라이라마께선 ‘직지인심,’ ‘이심전심’ 그냥 마음으로 만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편지가 뭔 필요가 있겠냐고 인자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꿈속에서지만 한국사회의 문제는 티벹인민들이 겪는 고초를 통하여 드러난다고 역설했다. 이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도 나는 몰랐지만 하여튼 꿈속에서 역설한 이 말을 정확하게 기억했고 노트에 적어놓았다. 그리곤 “가르바(garbha), 수뜨라(sūtra)” 나는 이런 말을 계속해서 주절거렸다. 가르바, 수뜨라, 가르바, 수뜨라… 뭔 암호처럼 이렇게 외치다가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새벽 6시였다. 새벽의 청자빛 여명 속에 정각대탑의 우뚝 솟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몸이 온통 한기에 쩔어 있었다. 목젖이 칼칼했다. 지독한 감기가 기습한 것 같았다.
나는 날이 밝자마자 남군ㆍ이군을 깨워서 빨리 보드베가스를 가자고 했다. 우선 보드베가스에 가서 한국식 국물을 주욱 들이키면 좀 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급호텔인데도 목욕탕의 더운물조차 센트랄 히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목욕탕에 부착된 온수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것도 심야전기 같은 것으로 데우는 것인데 용량이 눈꼽만 해서 조금 틀면 찬물이 되어버리곤 했다. 욕조에 받아서 하는 더운물 목욕은 하나의 꿈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허름한 싸구려 여관이래도 좋으니까, 목조건물에 양광이 드는 남향방을 하나 찾아보자고 했다.
▲ 대각탑 탑돌이를 하면서 담소하는 티벹 여인들. 한국인의 생김새와 너무도 흡사하다.
환전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이군은 이 호텔을 델리에서 예약했어야 했고 이미 대금은 선불해놓은 상태였다. 칼라차크라 행사 때문에 숙박시설이 모두 만원이었던 것이다. 인도인의 수중에 어떤 돈이든 한번 들어가면, 그것이 다시 나오리라는 생각은 해서는 아니된다. 바라나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중에 인도돈이 없으니까 너무 불편해서 미화 한 1500불 정도를 바꿀 요량으로 인도의 국립은행(State Bank of India)엘 들어갔다. 국립은행이니까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여행자수표를 카운터에 쓰고 있는데 갑자기 기관단총을 든 경찰들이 날 둘러싸고 어디로 가자는 것이다. 왜 그러냐니까 조사할 게 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난 흉악한 도둑놈으로 몰린 느낌이었다. 영문을 알아보니 나의 여행자수표에 문제가 있었다. 여행자 수표는 윗칸에 소지자의 싸인이 미리 되어 있는 것이 원칙이다.
▲ 인도에서는 어딜가나 막대기 하나 걸쳐 있으면 돈을 내야한다. 통행세를 받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해도 통행세를 내는데 보통 30분이상 걸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운전사와 통행인의 모든 인적사항을 세세하게 적고 구찮게 굴기 때문이다. 번문욕례의 간소화의 수준이야말로 문명의 수준의 척도다. 나의 어린시절의 우리사회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사회는 어느 측면에서는 확실히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해온 것이다.
그런데 보통 한국은행에서 티씨를 줄 때 본인 싸인란에 싸인하는 것을 확인 안 한 채 본인 재량에 맡겨버린다. 그 인도의 국립은행의 은행직원은 내 수중에 있었던 싸인이 없는 맹숭맹숭한 티씨 거금을 보고 날 도둑놈으로 간주해버린 것이다. 나는 지점장실에까지 끌려갔고 온갖 변명을 해서 가까스로 풀려났다. 그리고는 한번에 미화 500불 이상은 환전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장할 지경이었다. 나는 화를 버럭 내고 은행을 나와버렸다. 내 돈을 가지고, 그것도 미화를 가지고, 인도돈을 미화로 바꾸자는 것도 아니고, 미국돈을 인도돈으로 바꾸겠다는데, 자기나라 경제를 도와주겠다는데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화를 내고 은행을 나올 때는 이런 대도시라면 달러 바꿀 은행은 쌔고 쌨으려니 했던 것이다.
경천동지할 사건이 벌어졌다. 인도의 가장 성스러운 도시, 카시(Kāshī)! 전 세계에 가장 많은 순례객들로 붐비는 이 대도시 바라나시에 환전할 수 있는 은행이 두 개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줄이 길어 몇 시간이 걸리고 또 오후 2시면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사채업자를 찾아야 했다. 또 다시 놀랄만한 사실은 사채업자들의 환전율이 국립은행보다 더 짜다는 것이다. 국립은행이 그 모양이니까 사채업자들이 배짱 튀기면서 장사를 해먹는 것이다. 내가 어릴 때, 우리 형하고 누나하고 미국유학 갈 즈음에, 명동 뒷골목에 딸라장수들이 우글거렸다. 그런데 지금 북경에 가면 딸라장수들이 우글거린다. 그러나 물론 은행에서 환전하는 것보다 딸라 장수에게 바꾸는 것이 이익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국의 사정과 정반대의 나라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우리나라는 언젠가 이미 딸라장수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는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사채업자에게 1500불을 다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환율에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또 다시 기관단총에 둘러싸이는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 인도여행에서 가장 행복했던 추억은 어디서나 오염되지 않은 천연의 과일이나 생과일쥬스를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렌지는 물론, 석류나 포도를 즉석에서 과즙기를 빙빙돌려 짜주는 그 맛은 신들의 넥타보다 더 달고 혓바닥을 쏘는 짜릿함이 있었다. 싱싱과 순수라는 언어의 최고의 구현체였다. 한컵에 10루삐 정도. 쿠시나가르에서 파트나로 가는 도중, 고팔간즈(Gopalgani)에서.
찢겨진 돈뭉치
그런데 또 다시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인도에는 10루삐권이 있는가 하면, 20루삐권, 50루삐권, 100루삐권, 500루삐권이 있다. 인도인들은 ‘노’(No!)를 말하는 법이 없다. 무슨 부탁을 하든지 된다고만 하지 안된다고 말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냥 알아새겨야 한다. 안된 일에 대해 항의해봐야 소용이 없다. 즉 그들이 말하는 ‘옛스’의 ‘노’적인 측면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놈만 바보가 되는 것이다.
▲ 인도사람들은 비율적으로 다리가 엄청 긴 편이다. 그래서인지 변기의 위치가 우리나라보다는 매우 높게 달려있다. 좋은 변소에서는 손을 씻고 나면 종이를 주는 사람이 있다. 그럼 돈을 주어야 한다. 피곤할 땐 그 사람은 변소바닥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인도인의 직업분담은 지극히 세분화 되어있다. 테이블을 닦는 사람(수드라 계급)과 바닥을 치우는 사람(불가촉천민)이 다르다. 깨끗이 바닥을 치워 놓은 그 위에 곧 테이블 위의 더러운 것들을 내버리곤 한다.
그리고 인도인들에게는 예로부터 논리학이 발달해서 그런지 어떤 경우에도 현상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법이 없다. 반드시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변명을 한다. 자신의 오류를 인정한다는 것은 인도인들에게 기대할 수 없는 미덕이다. 예를 들면, 미화 1500불을 100루삐권으로 다 바꾼다는 것은 좀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500루삐권으로 바꿔줄 수 없냐고 사채업자에게 물었다. 500루삐권을 구할 수가 없으면, 미안하지만 1500불에 해당되는 500루삐권은 구할 수가 없다는 한마디면 아주 간단히 끝나는 대답이다. 그런데 그 사채업자는 장황하게 몇 십분을 설명하는 것이다. 500루삐권을 들고 다니면 오해를 받게 되고, 시골에 가면 쓸 수가 없으며, 또 일일이 번호를 적고 그러기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며, 또 100루삐가 쓰기에 간편하며, 거스름 돈을 받을 일이 적어져서 좋고… 그래서 나를 위해서 100루삐권으로 일부러 준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소위 말하는 ‘인도의 논리학’인 것이다. 러시아 성 페테르스부르크 학파의 거장 스체르바츠키(F. Th. Stcherbatsky)가 『불교논리학』(Buddhist Logic)이라는 책에서【불교철학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탐독해 볼 만한 20세기 불교논리학의 최고의 명저이다. 이 책은 대승불교 후기 논서(śāstra)들에 나타나는 논리와 인식의 제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으며 서양철학사의 명료한 인식 속에서 그 논의의 보편적 가치를 가늠질하고 있다. 6ㆍ7세기에 활약했던 디그나가(陳那)와 디르마키르티(法稱)의 논리학과 인식론의 체계를 집중적으로 천착하고 있다. 레닌그라드의 소련과학원(the Academy of Sciences of the U. S. S. R)에서 1930년경 출판된 책인데 1962년 미국에서 다시 출판되었다. th. Stcherbatsky, Buddhist Logic, New York : Dover, 1962. 2 Vols. 우리나라에서는 Vol.1에 해당되는 부분만, 임옥균에 의하여 번역되었다. 데오도르 체르바츠키 지음, 임옥균 옮김, 『佛敎論理學』, 총2권, 서울 : 경서원, 1997.】 소개하는 다양한 인도학파들의 논리학이 이러한 인도인의 성향과 관련된 것일까? 그런데 나를 경악시킨 것은 이러한 논리학의 문제가 아니다. 100루삐권(우리나라 돈 3000원 정도에 해당)을 100장씩 묶은 돈뭉치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인도를 여행하면서 인도의 지폐가 모두 매우 너덜너덜하게 닳아있거나 부분이 꼭 찢어져 있는 사실을 좀 이상하게 생각했다. 지폐의 왼쪽의 중앙부 부분이 항상 구멍이 나있거나 찢어져 있거나 한 것이다. 그런데 또 환장할 노릇은, 자기들이 그런 돈을 나에게 주고는 또 찢어진 돈은 잘 안 받으려 하니 산통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골똘한 나의 추리과정을 단절시켜준 경악할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은행에서 보통 돈뭉치를 내줄 때, 우리나라에서는 백매를 질긴 종이끈으로 싹 돌려 묶어 버리고는 옆에다가 조그마한 도장을 하나 꽉 찍으면 만사가 오케이다. 그러면 누구든지 천원권 백매가 묶인, 은행도장이 찍힌 뭉치가 10만원으로 통용되는 데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잘 살 때이든, 못살 때이든, 내 기억으로는 항상 그러했다. 만원짜리 백매를 묶어도 은행도장만 찍혀 있으면 의심없이 불편없이 100만원 뭉치를 주고받는다. 그것을 일일이 다 세어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나라의 평상적 윤리가 하나의 기적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인도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중간 허리를 그냥 돌려 매놓은 끈으로는 도저히 100장이라는 보장이 설 수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유통과정에서 몇 장을 빼먹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은행에서 나오는 모든 100장 돈뭉치가 어마어마한 두꺼운 호치키스로 세 번이 꼭 찍혀있고 그 스테이플 철사 위로 은행이 보장한다는 보증서가 풀로 발라져 있는 것이다. 그 스테이플이 매우 단단하게 박혀있기 때문에 그것을 돌려 떼어내는 과정에서 반드시 지폐가 상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스테이플이 찍힌 돈뭉치! 이것이 인도의 현실이었다.
사회윤리의 보편적 기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인도의 청년 싯달타의 고민도 아마 이 스테이플이 찍힌 돈뭉치와 분명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내가 바꾸고자 했던 미화에 해당되는 돈뭉치는 수북했다. 나는 그것을 배낭에 가뜩 담아 실어날러야 했던 것이다.
▲ 돈뭉치를 배낭에 걸머메고 네팔로 가는 길에 소달구지를 몰고가는 인도농부의 평화로운 모습을 잡았다. 인도인은 잘 생긴 사람이 많고 자태가 여유롭고 깊이가 있다. 닥터 지바고의 오마 샤리프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해탈(解脫, mokṣa)은 이들에게 더 어울리는 말 같았다.
보드베가스의 세자매
보드베가스의 아침 겸 점심은 날 무척 행복하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밥ㆍ국ㆍ김치였다. 너무도 단순한 식단이었지만, 너무도 행복한 식단이었다. 남군은 여행동안 보플거리는 남방의 알랑미를 아주 못견뎌 했다. 나는 중국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기름기 없는 쌀의 묘미를 잘 안다. 그런데 남군은 계속 선 밥을 먹으니까 속이 불편하다고 했다. 그래서 보드베가스의 딸들에게 쌀 물을 좀 많이 넣고 오래 푹 삶아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알랑미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쌀밥처럼 푹 익은 쌀밥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남군은 좀 진 듯한 밥을 먹으면서 무척 행복해 했다. 나는 좀 게짐짐했지만 미역국을 실컷 들이키면서 목젖의 카랑한 기운을 쫓아내느라고 안깐힘을 썼다.
보드베가스라는 곳은 우리나라의 인도여행 매니아들의 조직체인 ‘친구따라 인도가기’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잘 알려진 곳인 모양이었다. 값싸게 한국음식을 먹고 또 묵을 수 있는 곳으로 인기가 높은 곳인 듯 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어여쁜 세 자매가 있었다. 열여섯살 큰딸 이름이 샬라(Shahla)고, 열네살 둘째딸 이름이 샤바(Shaba)고, 열두살 막내딸 이름이 샤니아(Shania)인데 샤니아에게는 진달레이(Jindalley)라는 어여쁜 한국꽃 이름의 별명이 붙어있다. 샤니아는 한국말을 잘 했고, 한국음식 간을 잘 맞추었다. 이 세 자매가 자기집 옥상에서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 왼쪽으로부터 샤바, 샬라, 진달레이. 세딸은 옥상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고, 부모와 할머니 할아버지는 하는 일없이 『꾸란』만 암송하고 있는 듯했다.
보드베가스 옥상과 붙은 옆집의 옥상에는 어린 인도아동들이 가득 있었다. 왠 일이냐고 물어보니까, 바로 옆집 옥상이 학교라는 것이다. 인도의 학교는 대개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조그마한 한 건물에 다 들어가 있다. 선생님도 한 명에서 많아야 세 명 정도다. 그리고 그들은 옥외에서 조례를 많이 한다. 그리고 암송을 많이 한다. 바라문의 전통을 아직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인도여행을 하면서 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과 많은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이나 학생이나 수업도중인데도 나 같은 침입자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느꼈다. 그리고 학창시절에 일본에서 본 『니쥬우욘노 히토미』(二十四の瞳)라는 아름다운 영화를 상기해냈다. 그 제목은 ‘24개의 눈동자’라는 뜻인데 전전(戰前) 일본 시코쿠 어느 시골의 12명의 학생을 거느린 한 교사의 생애를 그린 명화였다.
▲ 보드베가스 옆집 옥상의 학교, 아침조례시간.
세 자매 보고 학교다닐 나인데 학교는 안 가냐고 물었더니 집에 손님이 많이 오면 학교에 안 가고 손님이 적으면 번갈아 학교에 간다는 것이다. 지식보다 삶이 우선인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학교를 다녀도 그들은 일체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세 자매의 모습은 너무도 보기 좋았다. 자매들이 협심해서 노동하고 자력으로 가정을 꾸려가는 그런 모습을 우리나라 어디에서 지금 볼 수 있단 말인가? 모두 입시 스트레스에 쩔은 아파트의 공주님들밖에 더 있는가?
나는 보드베가스에서 목을 축이고 난 후, 새로운 거처를 찾았다. 수자타호텔 값이 환불 안될 것이 뻔한 마당엔 그냥 포기하고 돈을 새로 주고서라도, 난 돌의 한기로부터는 피신을 해야만 했다. 비싼 집부터 싼 집까지 보드가야 시내 호텔ㆍ여관을 샅샅이 뒤졌으나 마땅한 방이 없었다. 남향은 오히려 가리는 방향으로 모두 설계가 되어 있었고 그나마 만만한 방은 모두 예약완료였다. 그러던 중, 바로 수자타호텔 옆에 샨띠 게스트 하우스(Shanti Guest House)라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층에 허름한 남향방이 있었고 다 낡아 빠졌지만 양탄자가 깔려있어 한기를 막아주었다. 하루 350루피라고 했다. 우리 돈으로 만원 정도였다. 오케이! 나는 수자타호텔의 좋은 담요들을 몰래 들고 나왔다. 그리고 샨띠 게스트 하우스의 양광이 비쳐들어오는 여인숙방에서 낮잠을 실컷 잤다. 오후 3시경, 남군의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자고만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티벹궁으로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드디어 미스타 타클라(Mr. Tenzin Taklha)를 만나는 데 성공했다. 타클라는 달라이라마의 바로 윗형 롭상 삼텐(Lobsang Samten)의 아들이었다. 롭상 삼텐은 달라이라마보다 세살 위의 형이었는데 달라이라마보다 앞서 그들의 고향 탁처(Taktser)에서 멀지 않은 쿰붐(Kumbum) 사원으로 출가를 했다. 그런데 나중에 환속을 했고 달라이라마의 정치적 고난의 동반자로서 활약하다가 인도에서 울화병으로 세상을 떴다. 54세였다. 그들의 어머니는 매우 훌륭한 인품의 여인이었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 중에서 누굴 가장 좋아했냐고 여쭈었더니 롭상 삼텐이었다고 말하셨다는 것이다【달라이라마의 어머니는 1981년에 돌아가셨다. 달라이라마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이 이야기는 달라이라마의 자서전에 실려있다. Freedom in Exile, p.239.】.
타클라는 매우 늠름한 청년이었다. 이목구비가 정말 잘생긴 티벹청년이었다. 그는 인도와 미국에서 공부했다 하는데, 현재 달라이라마의 개인비서로서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타클라로부터 우리는 달라이라마의 도착을 확인했다. 다행스럽게 타클라는 자툴 대사의 전갈을 받았고 우리의 만남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내일 10시에 다시 와달라고 했다.
▲ 초전법륜지에서 야외법회 중인 티벹스님들, 동네 개도 법회에 참석 중.
수자타의 마을, 우루벨라의 정경
우리는 차를 타고 다시 나이란쟈나강을 건넜다. 원시경전에 우루벨라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는 수자타의 마을을 가보기 위해서였다. 수자타의 마을을 들어서자마자 나는 무엇인가 포근한 고향의 품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태고적부터 같은 탯줄로 이어져 내려왔던 어떤 동포(同胞)의 숨결이라고나 할까? 사방에 어린 아이들이 내가 어릴 때 놀았던 것과 똑같은 ‘자치기’를 하고 있었고, 또 한구텡이에서는 제기를 차고 있었다. 동네 아낙들이 모여서 탈곡을 하고 있는 모습이 어쩌면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너무도 나의 고향같이만 느껴지는 유족한 농촌의 풍경이었다. 둥글둥글 거대하게 쌓아놓은 짚더미 사이로 우리나라 토종과 똑같이 생긴 황소들이 음메하고 있었고, 할아버지들은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짚새기를 꼬으고 있었다. 이러한 풍요로운 인심 속에서 수자타의 유미죽도 탄생되었을 것이다.
나는 김수로왕의 무덤에 있는 특이한 쌍어문,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그 문양이 아요다(Ayodhya, 阿踰陁國)지역에서 지금도 흔하게 발견된다는 사실을 들어 『가락국기』의 허왕후(許王后) 설화의 진실성을 논증한 김병모교수님의 주장은 천번만번 타당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었다. 가야는 당대의 조선반도 어느 나라보다도 선진의 철기문명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한(漢)제국의 문물도 일찍 받아들였으며, 인도와도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어떤 해상의 대제국을 건설한 특이한 나라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니혼쇼키』(日本書紀)의 자료에 의하여 이 가야지역에 일본 고대 야마토 조정의 미마나니혼후(任那日本府)가 있었다고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사료는 역으로 가야가 고대일본열도에 방대한 식민지를 개척했으며 활발한 문화교류를 한 매우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의 문명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정확한 사료의 고증을 요하는 신중한 문제이지만 가야라는 문명의 특이한 성격은, 오늘날까지도 부산지역 사람들의 신바람, 그리고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으로도 잘 입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산지역이 아직도 민중들의 불교에 대한 향심이 지극하다는 사실도 결코 우연으로 돌릴 수만은 없는 일일 것이다.
접견 전날밤의 풍경
우리는 수자타 집터가 있었다는 동산에서 아주 영어를 썩 잘하는 귀여운 꼬마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아눕 꾸마르(Anup Kumar)라는 이 소년의 별명을 ‘수자타동생’이라고 지었다. 나는 이 날 오후 늦게라도 법륜 스님이 계신 수자타 아카데미(Sujata Academy)를 들려올 생각이었다. 수자타동생이 마침 수자타 아카데미 가는 길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운전사 고삐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 밤이 늦어지면 이 지역에서 산길을 다닌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우리 차가 토요타이기 때문에 눈에 잘 띄고 외국인이라는 것이 완연해서 곧 낙살리떼(naxalite, 산적)의 공격타게트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는 비하르(Bihar)다. 우리는 밴디트 퀸(Bandit Queen) 푸란 데비(Phoolan Devi)의 고향에 와있는 것이다. 이러한 처지는 혜초스님의 여로에도 동일한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도로에는 도적이 많다. 물건을 빼앗고는 곧 놓아주며 다치거나 죽이지는 않는다. 만약 물건을 아끼다가는 다치는 수도 있다.
道路雖卽足賊, 取物卽放, 不傷煞. 如若怯物, 卽有損也. 慧超, 『往五天竺國傳』
우리는 고삐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리고 수자타동생 보고 내일 아침에 수자타호텔로 와달라고 했다. 꼬마는 기꺼이 응락했다. 나는 저녁 7시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랜 여행으로 지쳐있었고 감기기운이 골치를 띵하게 했다. 수자타호텔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샨띠여인숙으로 들어갔다. 수자타호텔의 한기가 으스스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무리 아파도 약을 먹지 않는다. 그런데 하는 수 없이 나는 콘택600을 꾹 삼켰다. 달라이라마를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싯달타에게 빌었다. 오옴~ 이리띠 이실리 슈로다 비샤야 비샤야, 제발 오늘밤 감기가 떨어지게 하옵소서, 스바하~.
▲ 수자타 마을에서 새끼 꼬는 할아버지. 우리의 일상생활과 너무도 같은 모습이다. 혁명의 와중 속에서도 한시도 쉬지않고 새끼 꼬으며 생활하신 해월 최시형선생 생각이 났다.
눈을 떴다. 몸에 땀이 흘러 속옷이 젖었다. 하룻밤을 늘어지게 잤으려니, 아침이려니, 그리고 이젠 감기가 떨어졌으려니 했는데 낡아빠진 양탄자의 불결한 내음새 속에서 확인된 시간은 겨우 밤 10시였다. 난 3시간밖에 자질 못했다. 그리고 계속 잠만 자고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허기가 느껴졌다. 무슨 우동국물 같은 것이 먹고 싶었다. 갑자기 티벹인들이 운영하는 천막촌 식당가 광경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암도(Amdo)라는 이름의 포장마차집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암도는 달라이라마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한국수제비와 유사한 수제비음식으로 유명하다는 말이 생각났다. 나는 룸비니의 티벹사원에서 수제비를 맛있게 만들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 수제비 좀 얻어먹으려다 실패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다. 먹고 싶으니 한 그릇 떠줄 수 없느냐고 하니깐, 스님들 다 드시고 난 다음에야 보시를 하겠다는 것이다. 난 수제비 한 그릇 얻어먹기 위해 1시간 가량을 지체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냥 입맛을 다시며 룸비니를 떠나야 했다.
▲ 티벹의학의 현장. 약초파는 티 할아버지. 우리와 비슷한 의학전통을 지니고 있다.
중국의 티벹 동화정책의 명과 암
이군과 남군을 데리고 나는 암도라는 천막촌 식당에 들어섰다. 늦은 시간인데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는 모습에 좀 놀랐다. 나는 음식만은 깨끗하게 먹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인도여행을 통해 최고급 레스토랑만을 고집했다. 대개 5성급 호텔에 속한 식당들이었다. 평균 한끼에 2천루삐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런데 내가 충격을 받은 사실은 암도식당내의 모든 메뉴가 10루삐 전후라는 사실이었다. 한끼가 10루삐로 해결될 수 있다니! 신라호텔 최고급식당과 서울 뒷골목 포장마차집의 가격의 차이가 심하다 해도 2000 : 10이라는 차이는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고급레스토랑만 고집했던 나의 아집을 후회했다. 2000 : 10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도인들의 현실적 모습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송구스러운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암도식당은 아주 라이브리했다. 생기가 넘쳤다. 인도인들은 평상적으로 한끼를 10루삐로 때우고 있는 것이다. 10루삐로 나오는 음식과 2000루삐로 나오는 음식의 수준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루 쉰(魯迅)의 말씀대로 ‘차뿌뚜어’(差不多)였다.
▲ 이것이 고속도로 휴게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이 빤이다. 밤새 달려야 했던, 카주라호로 가는 지루한 여정에서.
바글거리는 싸구려 포장마차집! 풍경은 동종의 것이지만 한국의 그것과 인도의 그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의 바글거리는 식당에 가면 품격의 고하를 막론하고 반드시 뽀얀 담배연기에 여기저기 쇠주잔이나 맥주잔이 놓이게 마련이다. 놀라운 사실은 인도인들은 하층 서민으로부터 고위층에 이르기까지 대체적으로 술ㆍ담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계급들도 피곤을 ‘짜이’(cāy)라는 차로 달래지 쇠주를 들이키는 습속이 없다【중국말의 ‘茶’(츠아)라는 것도 인도의 ‘차이’(cāy: ‘짜이’로 발음을 표기할 수도 있지만 ‘차이’로도 가하다. ‘c’는 짜와 차의 중간음이다)에서 유래된 것이다. 선진문헌에는 ‘茶’라는 글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인도인들의 ‘짜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홍차잎에다가 우유나 생강 혹은 다른 향신료를 같이 넣어 달인 것이며 길거리ㆍ가정 어디서나 가장 보편적인 음료이다. 그리고 반드시 흑설탕이 들어가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달다. 참으로 보기 좋은 것은 서민들이 길거리에서 이 차를 아주 원시적인 토기 담아 먹는데, 한번 마시고 그 토기를 깨어버리는 것이다. 토기를 종이컵보다 더 싸게 생각하는 것인데 나의 눈에는 옛 신라의 토기보다도 더 귀한 물건으로 보였다. 몇개 싸 가지고 왔다.】. 담배에 해당되는 것도 빤(paan)이라는 습관성의 식물인데【‘빤’(paan)은 베텔(betel) 너트와 잎새, 그리고 약간의 단 것과 라임 등을 첨가하여 만든 것으로 약간의 중독성이 있다.】, 대만사람들이 즐겨먹는 삔랑(檳榔)과도 비슷한 것이다. 하여튼 인도인들의 삶에는 술ㆍ담배가 없다는 것이 우리네 삶의 상식으로 보면 참 건전하게 보인다. 이슬람과 힌두이즘 모두 서구적인 바카스 문화에 오염되질 않았다. 인도인들은 한국인들이 술ㆍ담배로 보내는 시간을 종교적 명상이나 한담으로 보낸다. 평화로운 농촌에서 동네 장로들이 모여있는 모습도 술잔을 기울이거나 장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짜이 잔을 기울이며 한담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최다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인의 종교는 기독교도 아니요, 불교도 아니다. 한국인의 최고의 종교는 술이요, 바카스(酒神)다. 사실 대한민국은 바카스 공화국인 것이다.
황토빛의 흙내음새가 물씬 배어나오는 듯한 건강한 몽골리안 얼굴의 한 가족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내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간간이 중국말이 새어나오는 것이다. 나는 잽싸게 말을 걸었다.
“그대들은 중국사람입니까? 티벹사람입니까?”
난 티벹사람들과 많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언어장벽이 큰 문제였다. 일반인들은 영어를 못했고, 나는 또 티말을 못했다. 그런데 난 중국말이라면 편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
“우리는 라사에서 온 티벹인입니다.”
“티벹에서 어떻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칼라차크라에 참여하려고 왔습니다.”
내 말의 포인트를 잘 캣취하지 못한 듯했다. ‘어떻게 왔냐’는 나의 질문은 티벹은 작금 중국인의 압제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터인데 어떻게 이렇게 일가족이 자유롭게 빠져나올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에서 우러나왔던 것이다.
“티벹은 아주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여권(護照)을 받아서 여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중화인민공화국내의 시짱쯔즈취(西藏自治區)【현재 중국인들이 티벹을 부르는 이름이다. 그러나 진정한 ‘自治’는 오로지 달라이라마의 모든 권한을 회복함으로써만 가능해지는 것이다.】의 모습에 대해서 아주 자랑스러운 듯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경직되고 위장된 가식의 말이 아니라, 참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저으기 놀랐다.
“달라이라마가 계시던 티벹보다 중국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지금이 더 좋다는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옛날보다 모든 것이 훨씬 더 좋아졌습니다. 사는 데 큰 불편이 없습니다.”
나의 충격은 배가 되었다. 여기 ‘훨씬 더 좋아졌다’는 표현은 중국말로 하면 ‘하오 더 뚜어’(好得多)라는 말이다. 그들은 30대 초반의 부부였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이들의 부모가 겪은, 달라이라마의 삶의 역정이 보여주고 있는 그러한 고난이 피부로 와닿고 있질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물질적 풍요 속으로 점점 용해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1959년의 라사침공(이로서 달라이라마는 인도로 망명)을 ‘민주개혁’혹은 ‘티혁명’이라고 부른다. 내가 만난 이들은 물론 민주개혁 이후에 태어난 신세대들이다.
때마침 수제비가 내 식탁 위에 놓였는데, 인도에서 처음으로 구경하는 소고기국물이었다. 인도인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런데 티벹인들은 철저한 불교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육식을 즐긴다. 고원지대이기 때문에 채소ㆍ곡물의 경작이 한계가 있는 것이다. 고원의 풀을 뜯어먹고 자라는 가축의 고기를 아니 먹을 수 없다. 그것은 계율이기 전에 생존의 문제다. 티벹의 승려들은 육식의 금기가 없다. 수제비는 분명 수제비였으나, 국물이 내 입맛엔 너무 걸쭉했고, 시앙차이(香菜, 고소)류의 향신료의 냄새가 너무 강했다. 내가 수제비를 즐기지 않는 것을 보더니 그 티벹부부들이 말하는 것이었다.
“라사에 한번 놀러 오세요. 여기 하고는 비교도 안됩니다. 엄청 맛있는 것이 많아요. 맛있는 중국음식도 많고, 티벹식 니우르어우미엔(牛肉麵)도 많고, 포탈라궁 앞에도 좋은 음식점이 즐비합니다.”
중국인들의 동화정책은 분명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아이덴티티의 상실과 물질적 풍요의 갈등은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물결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국가들의 공통된 문제이다. 그러나 인간은 간사스럽게도 자기존재의 도덕성을 상실할지언정, 물질적 풍요와 타락으로부터 자신을 방비하는 능력이 박약하다. 세계의 지붕, 고고한 고독 속에 고결하게 지내던 티, 이제 고속도로의 풍진에 휩싸이고 원자력발전의 기지가 되고 핵폐기물의 매립지로 변모해가면서 인민에게는 물질적 풍요와 민주의 타락이 선사되고 있는 것이다.
▲ 짜이를 다리고 있는 노점상. 뒤에는 빤이 매달려 있고 옆에는 달걀이 쌓여 있다. 짜이를 보통 삶은 계란과 먹는다. 똑같은 짜이가 여기서는 2루삐공항에서는 150루삐. 서민들의 삶은 최소한의 돈으로도 건강한 삶이 유지될 수 있는 것 같았다. 아그라 시장에서
뺨따귀를 쳐올리던 여학생
어저께 보드베가스에서 있던 일이다. 우리 식탁 옆에는 아주 명랑하고 맹랑하게 생긴 성신여대생 한 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티벹의 라사를 다녀서 인도로 넘어왔다고 했다. 그런데 매우 재미있는 일화를 그 학생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티벹여행을 하는데 우연스럽게 일본의 멀쑥한 대학생 청년 두명과 함께 내내 동반여행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열차간에서 갑자기 한 일본청년이 묻더라는 것이다.
“저는 정말 이해 못하는 게 있는데요, 왜 만나는 한국사람마다 암암리에 일본사람들을 적대시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한국사람들은 그렇게 일본사람들을 싫어하죠?”
이때 이 여학생은 돌연하게 그 일본청년을 꿰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럼, 제가 이해시켜 드리죠.”
그 순간 이 여학생은 세차게 그 일본청년의 뺨을 후려쳤다. 갑자기 어이없이 당하게 된 일본인은 화끈해진 뺨을 어루만지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좀, 알 것 같습니다.”
나는 그 성신여대생의 용기와 슬기를 격찬했다. 우리는 일본인들에게 이유 없이 갑자기 그렇게 뺨을 맞듯이 당한 것이다. 갑자기 아무 이유없이 구속당하고 짓밟히고 발기발기 찢겨진 것이다. 티벹인들이 중국인들에게 당한 것은 아주 동일한 문제이다. 왜 우리는 지금 우리의 위대한 계몽주의 문학가 이광수를 정죄해야 하고, 왜 그 위대한 시정(詩情)을 우리민족에게 선사한 시인 서정주를 단죄해야 하는가? 아무리 그들의 문학이 위대하다 하더라도 그들의 도덕성으로서는 우리민족의 앞길이 보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우리 삶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을 확실히 역사에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의식이 우리 조선의 젊은이들에게는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 조선의 희망이다.
티벹의 젊은 부부는 국민학교 4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들을 데리고 있었고, 그 옆에는 친정동생이 있었다. 엄마의 얼굴은 정말 내가 보던 어린 시절의 건강한 한국여인의 얼굴이었다. 볼이 천도복숭아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널찍한 광대뼈와 선량한 눈매, 호기심 많은 눈초리… 그런데 이들은 라사에 살면서 아들은 다람살라에 이미 3년째 유학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에 안주하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자식의 미래는 썩어가는 라사에 묻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도 우리나라가 어렵던 시절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라 했고, 자식을 열심히 공부시켜서 꼭 미국으로 유학 보내라고 했다. 지금의 티벹 상황에서는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그대들이 이 세상에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선량한 업은 자식 하나라도 올바르게 교육시키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미래의 티벹은 근대적인 새로운 교육을 받은 일꾼들을 많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간곡하게 말해주었다. 그들은 꼭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응답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달라이라마의 초청으로 여기 보드가야에 오게 된 사람이며 내일 모레면 달라이라마를 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그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나는 사실 뭄바이 엘레판타(Elephanta) 사원 입구에서 산 싸구려 빵떡모자를 썼고 몇 년 전 삼성의 초청으로 베세토 어드벤쳐를 따라갔을 때 얻은 등산조끼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행색이 매우 초라했지만, 그들은 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다 받아들였다. 그들은 갑자기 경탄과 선망의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나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는 것이었다.
“달라이라마 성하를 뵈오면 꼭 흰 카타(축복의 비단천)를 걸어달라고 하십시오. 당신의 모든 전생과 금생의 업장이 소멸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들의 선량한 눈에는 어슴프레한 전구빛에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물이 역력했다. 이 순간 나는 달라이라마라는 존재가 티벹인민들에게 지니는 의미를 깨달았다. 정치적 맥락과 무관하게 달라이라마는 그들 삶의 모든 고귀한 가치의 화신이었고, 그들이 살아가는 희망이요 존재이유였다.
헤어드레서 엘리자베쓰
나는 암도식당을 나왔다. 암도 수제비에 좀 실패를 했기 때문에 2차를 시도하기로 했다. 그 옆의 포장마차 문깐에서 한국글씨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호미 까페(Homy Cafe)라는 간판 밑에는 한국글씨로 ‘수제비, 빈대떡, 만두, 만두국, 볶음밥, 생선튀김, 감자 튀김, 닭고기와 샐러드’라고 쓰여져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사람들의 구미를 좀더 잘 이해하는 곳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도 식단의 가격은 대체로 10루삐 전후였다. 그런데 이곳은 서양사람들이 우글거렸다. 서양인들은 대체적으로 우리보다 검약하다.
나는 야채만두와 소고기 수제비를 또 시켰다. 그런데 내 옆을 힐끗 쳐다보니까 세명이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데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남자는 동양계 청년이었고, 한 여자는 서양과 인도네시아의 혼혈 정도로 보였다. 그런데 또 한 여자는 브리티쉬 액센트가 섞인 영어를 하는 금발의 미녀였는데 꼭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 나오는 귀네스 팰트로우(Gwyneth Paltrow)를 연상시켰다. 뭐라 할까 선머슴같이도 보이는데 우아한 품격이 있었다. 세명이 다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서양사람들이었다. 나는 귀네쓰 팰트로우 같이 생긴 여자가 먹고 있는 플레이트가 갑자기 먹고 싶어졌다. 감자를 크게 4등분하여 기름에 푹 튀긴 것인데 굵은 소금만 쳐서 먹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팰트로우에게 그 요리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 여자는 이제 또 추가로 시키면 한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고 죠크를 하는 것이었다. 이 집은 맛은 있는데 되게 더디게 나온다는 것이었다. 주문 받고부터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한다고 했다. 나는 슬쩍 궁둥이를 그 여자 쪽으로 붙여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외국에 나오면 인간과의 대화처럼 많은 정보를 제공받는 이벤트는 없기 때문이다. 나의 관광의 주력 포인트는 대화다.
이 여자에겐 생긴 대로 우아하게 엘리자베쓰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영국 스콧트랜드 출신인데, 런던에서 잘 나가던 헤어드레서였다고 했다. 그리고 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뉴욕 맨하탄에서 최상급의 헤어드레서로서 유족한 생활을 했다고 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멋은 역시 헤어드레서라는 직업과 관련이 있을 듯 싶었다. 멋의 감각이라 할까?
“헤어드레서의 가장 중요한 삶의 부분은 손님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님의 성격, 그의 인간됨을 직감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만 손님이 흡족할 수 있는 헤어의 스타일을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매우 프로다웁게 이야기했다.
“당신은 어떻게 티벹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까?”
“우리 헤어드레서는 인간을 아름다웁게 꾸미는 데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인간을 아름다웁게 만들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일과의 주요부분은 앉아있는 손님들의 슬픈 인생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입니다. 헤어드레서를 하다보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슬프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잣집 마나님들일수록 콧대를 드세우며 자랑스럽게 푸념을 늘어놓지만 그들은 고독하고 가련합니다. 그런 얘기들을 가슴 깊이 공감하며 잘 들어줄수록 손님들이 꼬이게 마련입니다. 나는 정말 잘 나갔지요.”
“그런데요?”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는 남이 슬프게 산다고만 생각해봤지 내 인생을 되돌아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손님이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너무 슬픈 얼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고 진지하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묻는 그 여자의 얼굴이 광채가 났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네팔에 있는 티벹사원에서 오랫동안 수도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성제(四聖諦, Four Noble Truth)를 설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제1성제를 듣는 순간 이미 딴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미국에 있던 집과 자동차를 다 팔아버리고 인도로 왔다는 것이었다. 다람살라에 30세에 왔는데 이미 38세가 되었다고 했다. 8년 간의 수도생활을 한 베테랑이었다.
▲ 칸다리야 마하데바 사원의 전경.
엘리자베쓰와의 인터뷰
“인도에 와봐야 비로소 인간의 고통의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터무니없이 불공평한 것입니다. 정말 카르마(Karma, 業)의 이론의 정당성이 리얼하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결국 그러한 모든 인간의 고통을 극복하는 열쇠가 내 마음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티벹불교가 뭐가 그렇게 좋습니까? 우리는 기독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독교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데 종교적인 차원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콘트롤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상태를 항상 개선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티벹불교는 인간의 마음을 콘트롤하는 데는 최상입니다. 티벹불교에는 소승과 대승과 밀교, 3승의 전통이 빠짐없이 다 구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개인적인 사제관계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수련의 단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 행복하십니까?”
“물론이지요.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행복해지려는 동기입니다. 나는 여기 와서 그런 동기를 얻었습니다. 최근에도 나의 어머니를 만났는데, 내 몰골은 초라하게 보일지 몰라도, 엄마는 나의 현재 모습이 나의 과거모습보다 더 낫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서도 나는 나의 행복을 인정받고 있는 셈이지요.”
“달라이라마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분이 옆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의 존재 그 자체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항상 격려와 영감을 던져주며, 가르침을 줍니다. 겔룩과의 가르침은 신비롭지 않습니다. 인간의 추리능력(reasoning)을 강조합니다. 믿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인도는 물가가 엄청 쌉니다. 방 하나 빌려 사는 데, 돈 들 것이 없습니다. 8년 전에 판 집값 저축해놓은 것으로 지금까지 그냥 행복하게 살고 있지요…”
나는 수자타호텔이 한기가 심해 비싼 값 들여 빌린 방을 비워두고 옆에 허름한 여인숙에서 자고 있는 아이러니를 그냥 죠크로 얘기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금방 호텔열쇠 좀 빌려달라고 했다. 들어가서 목욕 좀 하고 싶다는 것이다. 수도생활은 오래 했어도 문명의 이기는 그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참 대답하기가 난감했다. 어느 묘령의 여인에게 호텔방을 빌려준다는 것도 그렇고 또 빈방을 두고 거절하는 것도 그렇고 나는 대답을 회피한 채 그냥 슬그머니 호미 까페를 나와버리고 말았다. 이날 밤 나는 비교적 평온한 잠을 잘 수 있었다.
2002년 1월 10일 아침, 남군과 이군은 미스터 타클라를 만나러 갔다. 미스터 타클라는 오늘 오후 1시에 달라이라마를 만나 회합을 가질 예정이며 오늘 오후에 오면 정확한 알현시간을 줄 수 있다고 확약했다. 우리는 어차피 오늘 하루가 공백이기 때문에 시타림ㆍ전정각산에 자리잡고 있는 수자타 아카데미를 여유있게 다녀오기로 했다. 어제 만난 수자타동생 꾸마르는 예정대로 와주었다.
▲ 신앙심 깊은 인도여인, 작은 신상을 앞에 놓고 끊임없이 천연염료를 발라가면서 신에 대한 신앙(바크디)을 표시한다. 더러운 육신의 입김이 신에게 닿지 않게 하기 위하여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있다. 뭄바이 말라바르 언덕(Mallabar Hill) 위에 있는 쟈이나 사원에서.
수자타 아카데미
수자타 아카데미(Sujata Academy)는 한국의 제이티에스(JTS, Join Together Society)라는 국제복지기관이 1994년 1월에 바로 부처님의 고행지였던 시타림ㆍ전정각산 주변 척박한 지역의 주민들을 위하여 개교한 학교다. 제이티에스는 한국의 불교단체인 정토회 산하기관이다. 그런데 정토회는 80년대 초반부터 법륜스님께서 구심점이 되어 이끌어오셨는데, 의식있는 젊은 불자들의 호응이 높을 뿐 아니라, 한국불교의 취약점이라 할 수 있는 사회의식의 빈곤을 매우 조직적으로 극복해나간 훌륭한 사회활동단체로서 평가받고 있다. 80년대 학생운동이 활발했을 때는 그런 사회의 진취적인 흐름과 보조를 같이 했을 뿐 아니라, 90년대에 들어오면서는 그러한 운동의 에너지를 인권ㆍ복지ㆍ환경의 제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사회활동으로 일관성있게 전환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재가신도들의 신앙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도, 그 신앙의 에너지를 단순히 개인의 해탈(解脫, mokṣa)이나 복락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대승적인 보살행의 사회적 실천으로 승화시키는 데 크게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산하단체인 한국 제이티에스, 한국불교환경 교육원, 좋은 벗들은 모두 복지ㆍ환경ㆍ인권 분야에서 모범적인 활약을 하고 있다.
내가 보드가야에 온 마당에 그러한 활동의 현장을 한번 안 가본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싯달타의 고행의 체취도 느껴볼 겸 해서 나는 수자타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후 1시 반경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문이 높았다. 높은 철문이 꽝 닫혀있었고 안이 잘 안 들여다보일 정도로 담이 높았다. 담 속에 지어진 건물은 지역의 현실에 비하면 너무 육중했고 위압적이었다. 담 밖과 안의 괴리가 너무 심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비하르라는, 극심한 빈곤 속에 문명을 거부하는 배타적인 멘탈리티가 야기시키는 괴리를 극복 못한 채 서있는 화이트 엘레판트(White Elefant)와도 같았다.
사실 어떠한 형태의 에반젤리즘(evangelism)이든 그 에반젤리즘을 마음속으로부터 요구치 않는 컴뮤니티에다가 일방적인 선의 기준에 의하여 강행하는 것은 아무리 그것이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다 할지라도 나는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지역의 주민들은 근원적으로 무지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근대적 사회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지한 채라도 열악한 환경속에서 단지 생존만을 위해서 배타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 선을 가르칠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여여(如如)라는 말로 현상고착적 방임을 다 합리화해서는 아니 되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사회활동의 보다 효율적인 영역을 개발해야 한다.
남군이 들어가서 알아보니 법륜스님은 정토회 신도들의 여행단을 리드하시기 위해 델리에 가고 안 계셨다. 그리고 여법사님 한 분이 나를 맞이해 주셨다. 그리고 경내의 교육ㆍ의료시설을 소개시켜주셨다. 최근에는 정부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도움도 많이 얻었다고 했다. 하여튼 좋은 일이었다. 학생들이 내일 모레 있을 개교 8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한참 열심히 한국노래도 부르고 부채춤도 추고 있었다.
▲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마주보이는 전정각산과 유영굴. 그 유영굴 자리에 티벹사원(흰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네팔 카필라바스투 강행군
지난 1월 5일 나는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를 가고 있었다. 현재 룸비니는 인도에 있질 않고 네팔에 있다. 그런데 인도에서 네팔국경을 건너는 문제도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항상 쓸데 없는 번문욕례(繁文縟禮)가 많이 따라 다니기 때문이다. 고락크뿌르(Gorakhpur)를 아침에 출발하여 네팔국경을 넘어 룸비니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였다. 우리는 그날로 다시 고락크뿌르로 내려와 쿠시나가르까지 가는 여정을 짜놓았다. 호텔이 모두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스케쥴 변경은 항상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네팔에 있는 카필라바스투를 꼭 둘러보고 싶었다. 그곳에 가봐야만 나는 원시불교의 많은 문제에 관한 나의 사색의 확고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남군과 이군은 네팔의 카필라바스투를 들르는 것은, 당일 네팔국경을 넘기로 작정한다면, 무리한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카필라바스투 가는 것을 강행했다. 룸비니를 급히 떠나 내가 전속력으로 달려 카필라바스투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였다. 스케쥴이 절박했지만 나는 후회없는 강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요번 인도여행에서 네팔 카필라바스투의 아무도 없는 빈 성터에서 가장 큰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청년 싯달타가 반가좌사유의 고민 끝에 카필라의 동문을 나서는 외로운 고행길의 현장을 역력하게 목격했다. 나는 그곳에서 인간 싯달타를 생생한 모습으로 만났다. 그리고 카필라성 고타마족에 대한 모든 역사적 논의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얻었다. 나는 급히 다시 룸비니로 돌아와야 했다. 네팔 국경을 넘는 길은 다시 룸비니를 거쳐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룸비니를 다시 지나게 된 것은 저녁 6시 반경이었다. 어두웠다. 그런데 배가 몹시 고팠다. 그런데 아까 룸비니의 티벹사원에서 만난 어느 초등학교 여교사의 암시적 한마디가 계속 뇌리를 감돌았다. 룸비니에는 대성석가사(大聖釋迦寺)라는 한국절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맛있는 총각김치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뭄바이에서 아라비아해의 아침 햇살을 본 이후로 단 한번 한국음식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총각김치, 총각김치, 흰 쌀밥, 된장찌개… 룸비니를 지나가는데 계속 혓바닥에선 군침이 돌았다. 남군과 이군은 지금 도저히 지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오늘 8시 전에 국경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늦으면 출입국관리소가 다 문을 닫아버린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끽소리 못하고 나는 룸비니를 그냥 지나쳐야 했다. 한참을 지났을 때였다. 나는 갑자기 소리쳤다.
▲ 카필라바스투의 성터. 그리고 싯달타가 출가했다는 동문의 성벽(윗 사진)이 남아 있다. 카필라성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동서 400m, 남북 50m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규모의 성이다. 기껏해야 순천 벌교 낙안성보다 조금 더 큰 규모일 뿐이다. 따라서 호화로운 삶을 산 싯달타 왕자의 모습은 완벽한 픽션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타마가 히말라야 산 중턱의 고산종족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카필라성으로 가는 길(아랫 사진)은 끊임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벌판이요 비옥한 농토였다. 따라서 카필라성은 작더라도 충분한 하부구조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룸비니의 총각김치
“무조건 이 차를 돌려 대성석가사에 대라!”
죽으면 죽었지 우리 총각김치나 한번 먹고 가자! 오늘 국경을 못넘으면 내일 넘지! 호텔값이야 날리면 그뿐 아닌가? 서울 강남 서초구 끝자락에 우면산이라는 유서 깊은 산이 있다. 그 밑에 예술의 전당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예술의 전당 뒤쪽으로 돌아 산허리를 올라가면 대성사(大聖寺)라는 절이 있다. 그 절은 바로 백제에 불교가 초전된 터에 세워진 사찰인데 그 대성사에는 도문(道文)스님이라는 도력이 고매하고 행보의 스케일이 매우 크신 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다. 그 도문스님 문하에서 아까 말한 법륜스님, 그리고 법성스님, 보광스님과 같은 훌륭한 스님들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룸비니의 대성석가사는 도문스님 문하에서 이루어진 사찰이라는 정보를 나는 가지고 있었다. 도문스님은 일찍이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문명에 대하여 매우 선각자적인 통찰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고, 인도유학생들도 많이 후원하신 분이었다. 도문의 문하라면 내가 들러 푸대접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난 무엇보다 총각김치 한 접시가 그토록 절박하게 그리웠다.
대성석가사를 들어섰을 때 도문스님의 문하생이며 법륜스님의 도반인 법신(法信)스님이 나를 맞이했다. 그런데 광목 벙거지모자에다 등산조끼를 입은 초라한 나를 법신스님이 알아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신스님은 내가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만사를 제치고, 이역만리를 떠나온 동포의 손길을 따뜻하게 만져주시면서, 총각김치 한그릇 먹고 싶어서 왔다고 말하는 나를 바로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식당에 불을 밝히고 차분히 내 얼굴을 보시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하셨다. 그때였다. 멀리서 어느 보살님이 달려와서는 가슴이 메지는 감격의 몸짓으로 내 앞에 와서 허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도 덩달아 가슴이 메지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법신스님은 날 알아보셨다. 스님은 내 손을 잡고 반가워 어쩔 줄을 모르셨다. 그러더니 당신 방으로 가서 곱게곱게 읽으신 『도올의 금강경 강해』를 들고 나오시더니 이 나의 강해에서 너무도 너무도 큰 감동과 정확한 해석을 얻었다는 것이다.
룸비니 무우수 그늘 아래서 나의 분신, 나의 언어가 담긴 서물을 발견하게 되는 감동은 무엇보다도 시공을 초월하여 교감되는 진리의 힘에 대한 감사로 이어졌다. 금방 대성석가사는 탕아를 맞이한 아버지의 집처럼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나를 알아보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재미있는 얘기로 꽃을 피울 때, 나를 알아보신 명선행(明善行) 보살님께서 정성스럽게 만들어주신 따끈한 새 밥과 수북한 총각김치, 열무김치, 양배추김치, 그리고 감자ㆍ당근ㆍ양배추를 넣어 만든 야채국….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한 끼라고 단언한다. 감사하옵나이다. 감사하옵나이다. 황천길을 갈 때에도 룸비니 대성석가사의 총각김치가 먹고파서 계속 뒤돌아 볼 것이외다.
여자 법사님의 푸대접
수자타 아카데미를 돌아볼 때에도 사실 나는 점심을 먹지 않았다. 그래서 그 여자 법사님께 점심공양은 하셨습니까 하고 오히려 내 쪽에서 슬쩍 떠봤는데, 그 법사님은 다음과 같이 냉랭하게 내뱉는 것이었다.
“11시 반이면 점심공양이 다 끝나요. 학생들에게 무료급식을 하기 때문에 인도식 수제비로 점심을 들지요. 그런데 선생이나 학생이나 모두 똑같이 먹습니다. 예외가 없지요. 지금은 공양시간이 지나 부엌에 사람이 없습니다.”
예외가 없다는 말의 여운이 좀 께름직 했다. 그러면서 마당에 널린 배추밭을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은 자랑을 늘어놓았다.
“우리 아카데미에서는 배추를 길러 김치를 담궈 먹습니다. 요번에도 김치를 많이 담궜는데 내일 모레 개교기념행사를 치르려고 항아리를 봉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김치도 없구만요.”
그러면서 자기는 행사가 끝나면 곧 귀국할 것이라고 했다. 6년이나 봉사했기 때문에 이제 귀국해서 고국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역땅에서 어렵게 지낸 법사님의 노고를 치하했고 후임을 걱정해주었다. 그랬더니 금방 법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는 것이었다.
“여기는 사람들이 못 와서 안달입니다. 오고 싶은 사람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서 걱정할게 아무것도 없지요.”
아주 대단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못 와서 걱정인 듯, 엄청난 자부감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나는 잘 알겠다고 인사하곤 수자타 아카데미를 나왔다. 그리곤 그 앞에서 관광객 상대로 팔고 있는 찐 달걀을 배고픈 김에 꾸역꾸역 뱃속에 여러 개 집어넣었다. 그리고 거지들이 달라붙는 산길을 걸어 유영굴을 올라갔다. 그러면서 나는 수첩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道文之門下,
以法信之恩,
忘法輪之業.
도문의 문하에서
내 법신에게 입은 은혜로써
법륜의 업을 잊으리라!
나에게 선을 베푸는 자에게서보다 나에게 선을 베풀지 못하는 자로부터 더 많은 선을 배운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나는 전정각산 능선에 있는 스투파(stūpa)의 폐허들을 되돌아보았다. 시타림의 대지에서 뿜어대는 각박한 기운으로 전정각산의 쌍봉우리가 뿌옇게 가리웠다. 두어 시간을 헤매다가 내려왔을 때 자원봉사자라는 어린 학생이 날 계속 기다리고 있다가 법사님께서 짜이나 한잔 들고 가시라고 날 초대한다는 전갈을 전하는 것이었다. 나는 남군에게 ‘응공은 응당한 자리가 아니면 대접받지 아니 한다’고 이르라고 말했다. 남군은 차마 내 말을 그대로 옮기지 못하고, 공손하게 일정이 바빠 그냥 떠난다고 말씀드려 달라고 말했다. 나는 고삐의 차에 몸을 실었다. 때마침 보드가야를 가야한다는 티벹승려 두 명이 동승을 원해 같이 태워주었다.
조금 지났을 때였다.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멀지 않은 동네의 아주 작은 다리 하나를 지나려할 때였다. 갑자기 동네 어린이들이 떼지어 다리 위에 서서 우리 차를 막았다. 그리고 몽둥이를 든 괴한 같은 놈들이 분홍빛의 통행료 영수증을 내밀며 돈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영수증은 모두 가짜다. 강탈인 것이다. 우리 차에는 티벹승려가 두 명이나 타고 있었고, 우리는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오는 사람들이었다. 모두 그 동네에 큰 혜택을 주고 있는 기관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나는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일보고 오는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대접할 수 있냐 해도 막무가내였다. 나는 차를 확 밀어붙이자고 했다. 신중한 고삐는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돈은 달라는 대로 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는 갑자기 혜초스님 말씀이 생각났다. ‘물건을 아끼다가는 다치는 수가 있다[如若怯物, 卽有損也].’ 에헤라! 달라는 대로 주어라!
이러한 사건은 사소한 문제이지만 이 지역에 8년을 봉사해오신 법륜스님의 노고가 그 동네사람들의 윤리체계와 근원적으로 융합되기에는 본질적인 어떤 괴리감이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더욱 괴로운 문제는 그러한 괴리감이 근원적으로 해소되어야만 할 필연성이 있느냐는 어려운 문명사적 주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개화ㆍ근대화라는 이름 아래서 자행되어온 제국주의의 병폐를 너무도 뼈저리게 절감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륜스님은 학교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11개의 마을을 대상으로 10개의 마을유치원을 개설하였다. 그밖에도 16개 주변 마을 만여 명의 주민들에게 무료진료를 실시하고 있으며, 또 고학년 학생들을 위한 직업기술학교를 일궈나가고 계셨다. 나는 고우영 만화로 읽은 『천국의 열쇠』의 주인공, 치셤신부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A. J. 크로닌 원작, 고우영 글ㆍ그림, 『천국의 열쇠』, 서울 : 기쁜소식, 2000.】.
▲ 정각산에 오르는 길에 즐비하게 앉아있는 거지가족들, 풀 한 포기 없는 그 척박한 느낌이 싯달타의 고행(苦行)의 리얼리티를 상기시켜 준다. 이 부근이 시타림.
생과 사의 찰나
황혼에 석양이 걸렸을 무렵, 우리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이군과 남군이 미스터 타클라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인 알현시간을 확정했다. 내일 큰 행사가 있는데 그 전에 달라이라마께서 식사를 좀 일찍 끝내신 후 날 만나겠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궁 앞으로 1시까지 오면 된다고 하였다. 드디어 면담시간이 확정이 된 것이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난 매우 기뻤다. 날뛸 듯이 기뻤다. 난 결코 달라이라마를 내 마음속에 우상처럼 모시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한 위대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이 그지없이 기뻤다. 하나의 정치적 리더로서 생각을 해도 달라이라마는 20세기로부터 21세기에 걸친 세계의 최장기집권자이다. 1951년 집정하여 2002년에 이르기까지, 그가 만났던 모든 정치적 지도자들, 마오, 저우 언라이, 리우 사오치, 주 떠, 네루, 인디라 간디, 이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떴다. 김일성마저 세상을 뜬 이후에는, 가장 기나긴 시간을 일국의 지도자로서 살고 있는 20세기 인류사의 신화적 존재인 것이다.
▲ 인도의 풍경 중에서 가장 인도적인 것은 모든 공공뻐스가 반드시 사람으로 새카맣게 덮여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지붕의 사람 무게로 쓰러질 듯이 기울어져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로 질주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붙잡는 것도 없이 태연하게 앉아 있다. 길은 울퉁불퉁 파여있고…
나는 이날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못얻어먹은 한국음식에 대한 한이 맺혀서 다시 보드베가스에 갔다. 그런데 너무도 끔찍한 사건의 풍문이 보드가야전역에 퍼지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소름끼칠 사건이었다. 우리가 느지막하게 보드베가스에 당도했을 때 아직 정확한 사건이 규명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불확실한 소문들만 여기저기 들려왔다. 바로 우리가 수자타 아카데미를 떠난 얼마 후에 수자타 아카데미에 강도들이 침입했고, 스님 한 분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 스님은 다람살라에 오래 사신 비구니 스님이었는데 매우 성격이 강하고 의협심이 강해서 강도가 들어오자 모두 2층으로 피신을 했는데 혼자 강도들을 상대하러 1층으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흉악한 괴한들이 칼로 스님의 팔을 자르고 모가지를 잘랐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소문은 수자타 아카데미에 건축기사로 와 계셨던 부산분 설성봉(46) 거사의 피격사망사건이 와전된 것이기는 했으나 당시 나는 이 사건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괴한들의 칼이 여스님의 목을 자르고 팔을 잘랐다고 전언하는 동국대 여학생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모가지에 칼이 스치고 내 팔이 잘라 떨어지는 듯한 너무도 스잔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말을 나에게 전하는 사람들은 나의 상황을 몰랐지만 사실 이 사건은 곧 나에게 닥쳤을지도 모르는 사건이었다. 내가 만약 법사님의 짜이 초대를 응락했고, 또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친절하게 김치저녁공양을 나에게 보시했다고 한다면 나는 분명 그 시간에 수자타 아카데미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같은 성격에 참지 못하고 내려갔을 것이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지만 정말 이것은 운명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나를 냉랭하게 대했던 그 여자 법사님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법사는 나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 6ㆍ25 피난 때의 차량보다 더 절박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더 재미있는 것은 질주하는 차량에 붙어있는 사람 사이사이로 다니면서 돈을 받는 차장의 모습이다. 스파이더맨 같다. 기차도 예외는 아니다. 승객들이 매달려 있거나 짐을 주렁주렁 창밖에 매달어 놓기 일쑤다. 자전거가 걸려 있는 모습이 진풍경이다. 옛날 기차 통학하던 시절의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번역과 문명
2002년 1월 11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다행스럽게도 걱정스러웠던 감기 몸살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침, 호텔에 있는 신문들을 들추어보니 어제 수자타 아카데미 살인사건이 사방에 크게 보도되고 있었다. 어젯밤, 수자타호텔을 들어섰을 때 나는 갑자기 부산말을 하는 보살님들 수십 명에게 둘러 싸였다. 나는 우리나라 여자들 중에서 매우 특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이북에서는 평양여자, 이남에서는 부산여자를 꼽는다. 평양여자들은 대체적으로 잘 생겼고 거침이 없으며 말을 잘한다. 그리고 사람을 제압하는 힘이 있다. 부산여자들도 거침이 없이 말을 잘하며, 옆에 있는 사람들을 공연히 들뜨게 만든다. 부산여자들은 신바람의 소유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개방적이며 애교가 만점이다. 평양여자들은 20세기 우리나라 기독교문화를, 부산여자들은 불교문화를 상징한다.
그들은 부산의 교사불자회인 청림회(靑林會)라는 단체의 순례객들이었다. 부처님의 8대 성지를 다 돌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날 둘러싸더니 KBS 도올의 논어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하여튼 부산여자들이 모이기만 하면 왁짝찌글해지는 것이다. 나보고 계속 다시 강의를 하라했다. 나는 이제 강의는 할 만큼 했으니 내가 강의에서 얘기한 한두 마디라도 삶의 체험 속에서 음미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던 중, 이들이 무비스님과 같이 온 것을 알게 되었다.
▲ 청림회 회원들과, 수자타 호텔 로비에서
난 도올서원에서 재생들의 요청으로 우연히 『금강경』을 강의하게 되었고, 그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 집필과정에서 기존의 한글번역서 중에서 참고할 만한 마땅한 책을 찾게 되었다. 그때 만난 책이 무비스님의 『금강경 강의』라는 책이었다【무비스님, 『금강경 강의』, 서울 : 불광출판부, 1995.】.
우리나라의 불전이나 국학자료를 포함한 고전의 번역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우선 자기가 번역하고 있는 텍스트 그 자체에 대한 치밀한 문헌학적인 연구가 선행되고 있질 않다는 것이다. 문헌학적 해제가 없는 번역은 일차적으로 번역의 자격이 없다. 둘째로 번역자는 반드시 번역의 소이연의 대상이 오늘 여기 살아있는 한국사람이라는 사실을 깊게 깨달아야 한다. 텍스트의 의미체계를 반드시 오늘 여기 살아있는 사람들이 모조리 알아들을 수 있는 의미체계로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환은 의미의 대응이 아니라, 의미의 반응체계의 상응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로는, 번역은 철저히 오늘 우리 사이에서 통용되는 한국말로 전달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문가의 견식으로 볼 때, 번역자가 원문에 완벽하게 충실했다고 하는 그 원전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원전성(原典性)이란 원전의 의미맥락에 대한 다각적 고찰, 의미론적ㆍ통사론적ㆍ음운학적ㆍ역사학적ㆍ사회경제사적 제반 고찰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나오는 번역의 상당수가 일차적으로 판본에 대한 고찰이 없고, 원전의 개념의 나열에 파묻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되도 않는 자기 공상을 늘어놓거나 한다. 우리말로 정확히 이해될 수 있으면서도 원전의 오리지날한 의미맥락에 충실한 번역, 그러한 번역이 오늘날 우리에게 아쉬운 것이다. 학자의 스칼라십(Scholarship)의 이정표는 오로지 번역의 수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번역을 기피하거나 낮잡아보는 학자는 모두가 ‘사기꾼’이다. 천만개의 논문보다 단 한권의 원전번역이 그의 스칼라십을 판정할 수 있는 정확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번역이 없는 학자는 학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번역에서 그의 학문의 모든 수준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많은 학자들은 그러한 노출을 꺼리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즉 뽀로가 나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학자와 일본의 학자의 가장 큰 차이라 말할 수 있다. 일본의 학문은 번역의 학문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학문은 번역의 학문임을 통해서 세계정상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 뉴델리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 무굴제국의 제2대 황제 후마윤의 묘(Humayun's Tomb)이다. 무굴제국의 개조 바부르의 아들인 그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무굴제국의 기초를 닦았고 후에 위대한 성군이 된 어린 아들 아크바르에게 바톤을 물려주었지만 그의 생애는 거친 풍광에 휩싸였다. 나라를 잃고 방황하다가 델리를 다시 탈환한 후 1년만에 실족사로 운명하였다. 이 묘는 그의 첫 부인 하지 베감(Haji Begam)의 감독하에 페르시아에서 초청한 건축가 미락 미르자 기야스(Mirak Mirza Ghiyas)가 설계한 것인데 향후 모든 무굴건축의 조형적 요소를 다 가지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따즈 마할은 이 후마윤의 묘의 요소들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 묘는 완벽하게 대칭되는 4각의 건물이며 4방이 같은 형태의 정원(charbagh)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정원은 32개의 구역으로 나뉘는 수로로 분할되어 있다. 거대한 건물의 정중앙 돔 지붕 아래에 정팔각형의 홀이 있고 그 곳에 석관이 놓여있다. 시신은 머리가 북쪽으로 가게 남북으로 놓여있고 고개는 메카를 향하여 서쪽으로 돌려져 있다. 서쪽 벽은 메카를 상징하는 오목한 미흐랍(mihrab)의 양태로 되어 있다. 전구형의 중앙 돔이 여기서 처음 시도되었으며, 그 주변은 우산같이 생긴 차트리스(chhatris)로 둘러싸여 있다. 이 건물의 원형은 페르시아에서 온 것이지만 무굴의 건축은 어디까지나 힌두전통 속에서 피어난 인도인의 독창적인 양식이다.
무비스님과의 일문일답
나는 원전의 의미도 충실히 전달하면서도 매우 평이하고 편안하게 서술되어 있는 책으로서 무비스님의 『금강경 강의』라는 책을 만났던 것이다. 물론 나는 나의 『금강경 강해』 속에서 무비스님의 책에 많은 도움을 입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 놓았다. 그러나 나는 구체적으로 무비스님의 신상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부산 범어사에서 여환(如幻)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해인사강원을 나왔고, 구한말 대유 최익현의 학맥을 이은 한학자였으며 대학승이었던 탄허스님(呑虛, 1913~1983) 밑에서 열심히 공부한 분이라는 정도의 간단한 이력만 알고 있었다. 나는 무비스님이 만나고 싶어졌다. 한국에서 만날려면 많은 시간을 일부러 소요해야 하는데 여기 보드가야에서 한 호텔에 묵고 있는 터에 모르는 체 지나친다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내편에서 먼저 청을 넣었다. 무비스님은 그렇지 않아도 날 찾아뵈려던 참이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아침식사 후에 우리는 우연한, 그리고 반가운 만남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처음 뵙습니다.”
“아~ 저는 선생님의 학문을 매우 흠모하고 산 사람입니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가 나온 이래 선생님의 저술을 단 한 권도 안 빼놓고 다 읽었습니다. 선생님은 절 모르실지 모르지만 전 선생님을 너무 잘 알지요.”
나는 무비스님이 얼굴이 갸름하고 몸집이 호리호리한 매우 이지적인 모습의 스님일 것이라고만 암암리 상상해왔다. 경전번역을 잘 하시는 분들에 대한 통념적 상상일 것이다. 지나치게 스마트한 느낌도 있고…. 그런데 무비스님은 나의 상상과는 달리 거대한 체구에 아주 우람차고 우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학승이라기보다는 매우 실천적인 도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날 만나자마자, 아무 것도 재는 것 없이 그냥 솔직하게 나의 학문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그러한 자세에 나는 감복했다.
사실 나는 우리나라에서 8ㆍ90년대에 나의 글을 접한 사람들이 정직하게 나의 글에 대한 영향이나 그 글에 대한 객관적 가치를 평가하는 언급을 본 적이 별로 없다. 분명 나의 글을 읽고, 그 글의 양식으로 자라난 학인들도 그들의 논문에 정직하게 내 글 한번 인용하는 예를 본 적이 별로 없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내 글에서 정신적인 양식은 얻을지언정 그것을 공표하면 첫째, 자기존재가 나에게 예속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고 둘째, 주변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논란이나 공격의 타케트가 되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책은 항상 책상 밑에 몰래 숨겨두는 ‘토라노 마키’(虎の卷)의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나의 제자들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나는 처음에는 분노했지만, 요즈음은 자비롭게 바라본다. 오죽 내가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었으면 그러하랴! 모두가 내 업이려니, 내가 거두고 가마. 나는 내 인생을 나의 현존으로 종지부 찍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것을 내 무덤 속에 한줌의 흙으로 파묻고 말 것이다. 난 제자도 없고 후대에 이름이 남기를 원치도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너무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날 때, 상대방이 나를 평가해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만날 수가 없다. 나는 항상 어떻게 하면 김용옥이 이 사회에서 괴멸되는 꼴을 볼까하는 것을 꼰아보는 인간들로만 둘러싸여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 수밖에 없도록 나의 인간 역정이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것은 환상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내가 이 사회에서 얻은 고질이다. 나의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무비스님 같은 분을 뵈오면 나는 너무도 감격해버린다. 그리고 그 순간 난 무척 후회를 했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내 『금강경 강해』 속에서 무비스님 책에 관해 보다 더 잘 써드릴 것을…
“전 선생님께서 『금강경 강해』 속에서 절 야단치시는 것도 잘 듣고 반성을 했습니다.”
좀 가슴 한 구뎅이가 폭 쑤셨다.
“사실 제가 『금강경』 등 많은 불전을 번역하게 된 것은 탄허스님의 영향도 크지만, 선생님의 글에서 얻는 영감이 적지 않습니다. 번역에 대한 선생님의 채찍과 격려야말로 아마 우리나라 8. 90년대 한국의 학풍을 가장 크게 변화시킨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번역에 뜻을 둔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는 선생님께서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하나의 구원의 빛이었습니다.”
아이쿠, 좀 더 잘 써드릴 것을!
“이런 말하면 선생님께서 좋아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선생님의 그 많은 책 중에서 가장 좋아한 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침묵이 흘렀다. 내가 대답할 문제는 아니었다.
“『석도화론』이라는 책입니다. 천하의 명저이지요.”
난, 그 순간 언젠가 법정스님께서 나의 책 중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석도화론』이었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을 기억해냈다. 석도는 청초(淸初)의 대화가이자 화상(和尙, 스님)이었다.
“선생님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불교를 비불자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말씀해주신 최고의 포교사이십니다. 우리나라의 지식대중이 불교에 관해 귀를 기울이게 되는 소중한 루트가 선생님의 글과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지금 제가 조계종 교육원장직을 맡고 있습니다만, 우리 교육원의 업무는 선생님이 다 맡아주시고 있는 셈이지요. 핫핫하……”
난 갑자기 일류 포교사가 된 느낌이었다.
“인도여행을 하셨으니까, 저는 믿습니다. 아마도 그 누구도 꿈도 꿀 수 없는 아주 새로운 인도여행기를 쓰실 것이라고, 누구나 쓰는 그런 기행문이 아닌…… 혜초가 못다한 꿈을 이루어 주십시오.”
스님께서는 정다웁게 내 손을 잡아주셨다. 그리고 다음 순례지로 떠나기 위해 로비에 가득 모인 청림회 회원들에게 간단한 법어를 해달라고 청했다. 나는 여행의 목적은 관광이 아니라 살아있는 불타를 느끼기 위함이라고 역설했다. 지나치는 풀 한 포기에서도 부처님의 체취를 발견하기를 빈다고 하고 합장을 했다. 그들이 탄 뻐스는 떠났다. 난 무비스님께서 창가에 앉아 계신 모습이 멀어지고 또 멀어질 때까지 수자타호텔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일은 이제 머리를 깎는 일이다. 난 내 머리를 항상 손수 깎는다. 이부갈이로 깎다보니 좀 지저분한 느낌이 들어 아예 박박 밀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면도도 하고 구리무도 바르고, 정결하게 몸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도올서원 제자이며, 디자이너인 승해군이 달라이라마 알현을 위하여 특별히 만들어준 검은 면의 도포를 단정하게 입었다. 그리고 구두까지 깨끗하게 닦았다. 그리고 남군ㆍ이군과 함께 티벹궁 앞에 1시 정각에 섰다. 복잡한 수속이 시작되었다. 몸과 짐의 철저한 검색과정을 거쳐야 했다. 너무 뒤져 싸니까 우리의 호위를 맡고 있던 미스터 타클라가 짜증을 냈다. 귀인들을 너무 홀대한다는 느낌으로 호위병들에게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달라이라마의 수비를 맡고 있는 사람들이 티벹인이 아니라 인도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를 검색한 것도 티벹인들이 아니라 인도인이었다. 망명정부의 한 고달픈 측면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 이것은 노예왕조의 꾸듭 웃딘 아이바크를 계승한 제2대 왕 일투트 미쉬(lltutmish, r, 1211~1236)의 묘이다. 이 사람이 꾸듭 미나르의 주인이며, 인도에 처음으로 델리 술탄제도를 확립시킨 장본인이다. 징기스칸의 남침을 저지시켰으며, 인도의 전통적 행정과 터키의 군사제도, 꾸란의 법제를 결합시켰다. 이 묘는 무굴제국 훨씬 이전의 인도 이슬람 묘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후마 윤의 묘나 따즈 마할이 나를 막론하고 모든 지상의 묘는 가묘이다. 항상 그 지하실에 진짜 묘가 따로 있다. 이 사진은 돔 아래 홀에 놓여있는 가묘와 지하의 진묘로 내려가는 통로를 동시에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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