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와 팔정도
붓다는 처음에 이 십이지연기를 무식한 일반대중에게 설하는 데 무서운 당혹감을 느꼈다. 자신의 내면적 사유과정을 타인이 깊게 이해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고안해 낸 것이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의 사성제(四聖諦, Four Noble Truth)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성제는 연기설을 일반대중이 알아듣기 쉽게 변모시킨 것이다. 사성제 중에서 고성제와 집성제는 유전연기(流轉緣起)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멸성제와 도성제는 환멸연기를 말한 것이다. 집(集)이 인(因)이라면 고(苦)는 과(果)다. 도(道)가 인(因)이라면 멸(滅)은 과(果)다.
유전연기(流轉緣起) | 환멸연기(還滅緣起) | ||
고제(苦諦) | 과(果) | 멸제(滅諦) | 과(果) |
집제(集諦) | 인(因) | 도제(道諦) | 인(因) |
연기설이 사뭇 이론적이라고 한다면, 사제설은 퍽 실천적이다. 연기설은 싯달타 자신의 깨달음을 위한 법문이요, 사제설은 타인의 깨달음을 유도하기 위한 연기설의 법문이다. 따라서 붓다는 초전법륜에서 최초의 제자가 된 다섯 비구들에게 연기설을 말하지 않고 사제설을 말했던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이유때문에 사제설의 중점은 어디까지나 고ㆍ집 보다는 멸ㆍ도에 놓여 있다. 유전연기(流轉緣起)보다는 환멸연기를 보다 상세히 설한 것이다. 환멸연기 중에서도 멸(滅) 보다는 멸을 이룩하는 방법론인 도(道)를 상세히 말한 것이다. 여기서 도라는 것은 방법 즉 길(道跡, method)의 의미다.
아함경에서 보통 고멸도적성제(苦滅道跡聖諦: 괴로움의 멸함에 이르는 길의 진리)라 표현한 이 마지막 도제(道諦)를 우리가 보통 팔정도(八正道: 여덟 가지 바른 길)라고 하는 것인데, 이 팔정도야말로 원시불교의 실천강령이라고 할 것이다.
정견 | 正見 | sammā-diṭṭhi | 慧 |
정사유 | 正思惟 | sammā-sarikappa | |
정어 | 正語 | sammā-vācā | 戒 |
정업 | 正業 | sammā-kammanta | |
정명 | 正命 | sammā-ājīva | |
정정 | 正定 | sammā-samādhi | 定 |
정념 | 正念 | sammā-sati | |
정정진 | 正精進 | sammā-vāyāma |
후기 대승불교의 공사상의 치우친 해석으로 인하여 불교를 초윤리적(trans-ethical)인 종교로 간주하기 쉬우나, 싯달타가 구상한 근본불교는 어디까지나 윤리적 관심에서 시작하여 윤리적 실천으로 끝나는 종교라 해야 할 것이다.
바른 소견[正見],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업[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기억[正念], 바른 집중[正定]은 얼핏 듣기에 시시콜콜한 시어머니 잔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불교도이기 전에, 시공에 국한됨이 없는 모든 인간들, 그 모든 인간들이 사회생활을 유지하는 한에 있어서는 반드시 지켜야할 삶의 바른 자세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인격자세의 핵심을 말한 것이다.
팔정도 중에서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의 3도는 계(戒, sīla)에 속하는 것이다. 정념(正念)ㆍ정정(正定)의 2도는 정(定, samādhi)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의 2도는 혜(慧, pañña)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정진(正精進)은 계(戒)ㆍ정(定)ㆍ혜(慧) 삼자에 공통된 미덕이다. 이 지상에서 부처님이 남긴 마지막 말씀, 『대반열반경』에 수록된, 이 지상에서 제자들에게 남긴 그 간곡한 마지막 유훈은 무엇이었던가【팔리어장경 長니까야 16번째 경전인, 『大般涅槃經』의 말과 그에 해당되는 『長阿含經』 「遊行經」에 나오는 말을 절충하여 번역하였다. 전자는 『南傳』 7-144, 후자는 『大正』1-26】?
“그럼 비구들이여! 이제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고하노라! 만들어진 것은 모두 변해가는 법이니라. 게으름 피우지 말라. 나는 오직 게으르지 않음으로써만 홀로 바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방일치 말고 정진(精進)하여라.”
是故比丘, 無爲放逸. 我以不放逸故, 自致正覺. 無量衆善, 亦由不放逸得. 一切萬物無常存者. 此是如來末後所說.
이것이 여래의 최후의 말이었다.
이 계(戒), 정(定)ㆍ혜(慧)를 삼학(三學)이라 하는 것으로서 소승ㆍ대승을 불문하고 모든 불교에 공통된 수행방법의 요체를 이루는 것이다. 삼학(三學)을 떠나서 불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대선사요 대사상가인 보조 지눌(普照 知訥, 1158~1210)이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극복하고 바른 불교의 원형을 삼학(三學)으로 정립한 주장 속에도 함축적으로 드러나 있다.
▲ 우리나라 불보사찰의 원종제일대가람(源宗第一大伽藍)인 통도사(通度寺), 자장(慈藏) 율사의 영정을 모신 개산조당(開山祖堂) 앞에 고졸한 돌 받침이 하나 서 있다. 이 팔각형의 돌받침에는 팔정도의 문자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이나마 정도의 삶을 생각해 주었으면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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