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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 기독교는 본래 아시아대륙의 종교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 기독교는 본래 아시아대륙의 종교

건방진방랑자 2022. 3. 1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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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본래 아시아대륙의 종교

 

 

그런데 지금 논의가 조금 빗나가 버렸습니다. 제가 제기한 문제, 종교적 진리의 다양성의 관용이 또 다시 종교간의 에반젤리즘의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하는 문제는 결코 성하께서 답변하신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앞으로 종교간의 충돌이라고 하는 우리 인류사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단순한 다양성의 관용 이상의 어떤 종교에 대한 본질적 이해가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뉴잉글란드로 건너간 청교도들보다도 더 순결하고 엄격한 기독교신앙을 가지신 어머님 슬하에서 자라났고 한때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대학에서 도가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또 한때 절깐에서 승려생활까지 했고 불교경전을 깊게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학으로 물려받은 것은 엄격한 유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 세대의 사람으로서 유교경전을 저만큼 폭넓게 몸에 익히고 있는 인간도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부디스트(불교인)? 크리스챤(기독교인)? 따오이스트(도학자)? 콘퓨시안(유학자)?…… 사실 저는 성장과정에서 종교적 문제로써 엄청난 갈등을 겪었습니다. 성하처럼 단일한 색깔의 문명 속에서 단일한 종교적 목표를 향하여 성장하신 분은 저 같은 인간이 지니는 갈등과 고민을 상상은 하실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체득하실 수는 없으실 것입니다. 한 인간의 내면 속에서 일어나는 다른 제도종교의 신념의 갈등은 매우 폭력적이며 결코 쉽게 조화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사실 아크바르 같은 사람의 시도의 내면에 깔린 고뇌를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성하를 뵈옵자마자 저는 프레케와 간디의 최근 연구성과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이들의 가설을 뒷받침하는 스칼라십의 수준이라든가 생각의 깊이에 완벽하게 동의하기 때문에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들을 가상히 여긴 것은 발상의 전환입니다. 문제되는 것을 다 피해가는 피상적인 종교간의 대화보다는 한 종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본질적인 대화를 가능케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발견된(1945년에 발견되어 근 30여 년의 정리작업을 거침) 나하그 함마하디 영지주의 문서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 초기기독교운동이 얼마나 복잡한 갈래의 운동이었는가, 그리고 지중해연안에 산재해 있던 유대인 콤뮤니티벹의 종교적 성향 속에 얼마나 다양한 갈래의 신학체계들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초기기독교의 원래적 모습을 천착해 들어가면, 우리가 지금 기독교라고 규정하고 있는 어떠한 신앙체계의 절대성이 붕괴될 수 있으며, 그 신앙체계 배면의 다양한 인식체계의 정당성에 눈을 뜨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통과 이단의 의미가 역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규정짓고 있는 정통과 이단의 구분근거가 전혀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의 종교에 대한 진실한 이해를 천착해 들어가면 갈수록 그 종교가 형성되어간 과정에 대한 이해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한 형성과정(formative process)에 대한 다이내믹한 고찰을 해보면 해볼수록 하나의 종교 그 자체가 이미 오늘날 우리가 시도하려는 종교간의 대화 이상으로 이미 엄청난 문화ㆍ종교현상의 교류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원래 기독교로서 고존(孤存)한 것이 아니라 수없는 교류 속에서 장구한 세월에 걸쳐 다이내믹하게 그 아이덴티티를 형성해갔다는 그 사실에 눈을 떠야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도 유교도 이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시불교를 말하려면 베다나 우파니샤드(Upanisad)나 쟈이니즘이나 육사외도 등의 교류된 다양한 체계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듯이, 원시기독교를 말하려면 그노스티시즘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이것은 희랍의 올페이즘이나 이집트의 헤르메티카, 그리고 특히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이원론을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리고 후대에 중국에까지 크게 위세를 떨친 마니교, 그리고 이란과 인도에 공통된 신화적 세계관과의 관련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기독교하며는 당연히 서양의 종교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채택된 이후 라틴 웨스트를 중심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그러한 인상을 주는 것뿐입니다. 기독교는 본래 아시아대륙의 종교며, 소아시아 페르시아-인도로 걸치는 문명권에 깔려있는 신비주의의 소산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라틴 웨스트를 중심으로만 보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이단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의 정신적 지도자들과 많은 교류의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만 제 마음 속에서 솔직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 하나였습니다. 신의 해석입니다. 신을 인격적 존재로서 이야기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비인격적 추상적 진리체계로서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모든 것이 갈려지게 되어있습니다. 신을 추상적 진리체계로서 이야기한다면 모든 종교의 대화는 쉬워집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모든 종교의 이해를 서로에게 풍요롭게 만듭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신에게서 인격적 존재성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신을 추상적인 진리체계로서 이해하는 척하다가도 결국은 인격적 존재성의 전제로부터 나오는 사유체계로 함몰되어버리고 말아버리기 때문에 더 깊은 대화가 단절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들은 내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으로 건너가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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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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