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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 종교 선택의 자유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 종교 선택의 자유

건방진방랑자 2022. 3. 19.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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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선택의 자유

 

 

내가 종교의 대화라는 말을 할 때에는 종교간의 상이성을 거부한다는 맥락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종교간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서 대화를 해야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종교는 서로간의 차이를 명료하게 인식하기 위해서 대화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간의 대화가 개종이나 교리의 혼합을 유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 나름대로, 불교도는 불교도 나름대로 자기의 종교적 목적을 충실히 달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티벹에는 양의 몸에 야크의 머리를 올려놓지 말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중론의 완성자인 나가르쥬나모든 것을 같게만 보려고 하면 모든 것이 같아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고 들어가면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단 한 개의 일양적 존재로 축소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며, 모든 사람들의 음식의 기호가 다르듯이 자기에게 맞는 종교를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인도사람들은 흔히 이 지구상의 인구 숫자만큼의 다른 종교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개별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라는 서양의 신학자가 신을 가리켜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고 표현했다는데, 그렇다면 그 궁극적 관심은 인간마다 다 다를 것이 아닙니까? 물론 그 궁극성에 어느 정도의 공통성은 있다 하더라도. 나는 보편종교를 신봉하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의 교리를 인수분해해서 만든 하나의 보편적 종교의 가능성을 믿지 않습니다. 무굴제국아크바르(Akbar)는 매우 종교에 대해 관용심이 컸던 사람이고 모든 종교를 섭렵한 끝에 그 모든 종교의 장점만을 딴 딘 이 일라히’(din-i-Ilahi, Religion of God)라는 보편종교를 만들었지만아크바르 대제는 딘 이 일라히’(din-i-llahi)1582년에 반포하였다. 그러나 결국 아무런 추종세력도 못얻었고 그의 사후에는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특히 이슬람신민들의 불만이 컸다. Bamber Gascoigne, The Great Moghuls, p.115., 결국 그가 포섭한 어떠한 종교인들에게도 만족감을 주지 못했습니다. 종교를 서로 풍성하게 만드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다양성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 지구에는 다양한 정신적 성향과 관심, 영적 기질, 그리고 문화적 풍토, 언어적 감각과 기호, 심미적 통찰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양성에 따라 종교적 해결도 다양한 선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다양성을 말살시키면 오히려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입니다.”

 

 

무굴제국이 남긴 가장 위대한 예술품으로서 나는 서슴치 않고 이 아크바르(Akbar)대제의 초상화를 들겠다. 비록 자화상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공재 윤두서의 초상화와 비견할 만한 걸작이라 하겠다. 가장 위대한 제국의 풍모를 완성한 황제의 모습이건만 그 조촐한 인간미, 확고한 판단력, 인간의 희비를 관조하는 듯한 관용미, 그리고 거친 전투적 삶의 역정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이 초상으로 무굴제국의 지배자들이 우리나라 시골 아저씨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몽골리안들이었다는 것을 너무도 실감할 수 있다. 후마윤의 뜻밖의 죽음으로 13세에 왕위에 오른 그는 무용과 관용, 탁월한 치세의 방략을 과시하면서 50년간 무굴제국의 기틀을 완성하였다. 이 초상화는 1605년 죽기 직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성하의 말씀은 너무도 지당하신 것이며 양식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러한 성하의 견해에 충심의 동의를 표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하의 그러한 논의는 매우 원초적이며 목가적입니다. 우리가 종교간의 대화를 논의하는 가장 큰 이유는 종교와 결탁된 정치권력이 인간세상에 더 말할 나위 없는 폭력을 행사해왔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대부분의 전쟁이 종교적 신념의 차이를 빌미로 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인류의 참혹한 전쟁의 대부분이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종교전쟁인 것입니다. 성하의 말씀처럼 종교간의 다양성을 공인하고 관용하고 존중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이러한 현상의 가장 나이브한 결론은 또 다시 그러한 다양한 종교간의 공존상태에서 어느 종교가 가장 인기를 얻어 헤게모니를 잡느냐 하는 위장된 에반젤리즘의 병폐로 귀결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파테푸르 시크리에 있는 아크바르 대제의 개인 접견실, 디완이카스(Diwan-i-khas), 2층으로 되어 있는 건물인데 들어가면 하나의 거대한 홀이고 그 중앙에 한 돌기둥이 우뚝 서있다. 구자라트 공포 양식을 겹쳐 만든 힌두 만다라양식의 기둥 꼭대기에 대제가 앉아있다. 그리고 그곳은 사방으로 통로가 나있다. 아크바르는 사람들을 여기서 접견하였다. 알현하는 사람은 바닥에 있기 때문에 그를 볼 수가 없다. 이 접견실은 신비로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는 엄청난 지적 호기심의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다양한 신념의 사람들과 대화를 즐겼다. 그리고 모든 종교와 인종을 관용했고, 그들로부터 배울려고 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크바르는 완전히 문맹의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대화, 대독, 암송, 그림책을 통해서 지식을 흡수했다. 이 접견실의 구조는 그의 개방성과 동시에 암살을 방지하려는 무장의 치밀함을 보여준다. 그의 자리는 우주를 굴리는 법륜의 주축을 상징한다.

 

 

성군 아크바르의 입김이 서려있는 파테푸르 시크리로 가는 새벽 길. 위의 사진은 아크바르가 짓기 시작한 아그라 포트(Agra Fort)의 야경, 아크바르는 군사적 요새로 지었으나 그의 손자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이 이 성채를 화려한 궁전으로 개축, 완성시켰다. 그러나 결국 이 아그라 포트는 샤 자한의 감옥이 되고 말았다.

 

 

 아크바르 진묘로 가는 길. 나는 그곳에서 『꾸란 구절을 묘지기를 따라 암송했다. 묘한 여운이 지하의 어둠속으로 깊게 퍼져나갔다.

 

 

인용

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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