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젤리즘의 한계
“그것은 또다시 에반젤리즘(evangelism, 전도주의)의 본질에 관한 논의를 해야겠지요. 모든 종교현상에 있어서 에반젤리즘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자기가 깨달은 바나 믿는 바가 자기실존에 거대한 기쁨으로 다가올 때, 그 기쁨을 타인과 나누고 싶어하는 충동은 거의 본능적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가 깨달은 것이나 믿는 것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무리가 발생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채식을 실천해보니 너무도 좋다고 해서, 고기를 안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채식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 좋은 것이 꼭 타인에게도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실천해보니 정말 좋다고 생각될 때에 그것을 남에게 권유해볼 수는 있습니다. 나는 종교적 진리도 권유(exhortation) 이상의 전도주의를 표방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 진리의 선택은 전도인의 소관이 아니라 피전도인의 주체적인 결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종교적 진리는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체험진리가 될 수밖에 없으며, 체험의 진리라 하는 것은 자각의 진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인간 개인의 ‘자각’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에반젤리즘은 타인에게 자각의 계기를 제공하는 그러한 선업(善業) 의미를 지닐 수 없습니다. 교세를 확장한다든가, 나의 신념의 동조자를 구한다든가 하는 세속적인 행위를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전도가 아니라 권력의 야욕에 불과합니다. 불타의 45년간의 전도의 삶은 끊임없는 ‘유행’(遊行)이었습니다. 그것은 ‘안주’(安住)가 아니며 ‘상주’(常住)가 아니었습니다. 상주는 결국 집단적 권력의 확대를 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유행의 수단은 걸식이었습니다. ‘걸식’은 남에게 폐를 끼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소유의 실천’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불교는 인류사에 있어서, 기독교가 십자군전쟁 등 끊임없는 제국주의 전쟁의 주도적 역할을 한 것과는 달리, 인류를 파멸로 휘모는 그러한 전쟁의 주체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박해를 당했으면 당했지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가 지니는 교리내용이나 승가의 성격이 기독교와는 좀 상이한 어떠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불교의 에반젤리즘의 성격이 기독교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역시 에반젤리즘이라는 측면에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불교는 전혀 전도를 하지 않는 종교처럼 생각했는데, 미국 대학에서 강의를 듣는데 미국인 교수들이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세계사에 유례를 보기 힘든 전도주의적 열정’ 운운하는데 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19ㆍ20세기에 기독교의 선교사들이 동아시아를 침투하는 과정이나 위진남북조시대에 인도의 승려들이 중국을 침투하는 과정이 결과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세계사적 사건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눈이 번쩍 뜨이게 되었습니다. 불교는 전도를 표방하지 않는 듯하면서 무서운 전도의 괴력을 발휘하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독일학자 취르허(E. Zürcher)는 위진남북조 시대 불교의 전래를 ‘불교의 중국정복’(the Buddhist Conquest of China)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콘퀘스트’(conquest, 정복)라는 단어를 그의 명저의 제목에 썼던 것입니다. 오스왈드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1936)의 말대로, 중국문명과 인도문명처럼 지정학적 격절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성장해온 유기체들이 이렇게 대규모의 교류를 단기간에 집약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에반젤리즘의 열정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불교가 공격적 이래서가 아니라 중국문명내에 불교를 수용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내적 여건이나 사상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불교는 중국인들의 자각을 도와주었을 뿐일 것입니다.”
“상당히 통찰력 있는 말씀이십니다. 슈펭글러는 인도와 중국의 불교교류에 있어서도 불교의 외연(denotation)은 전래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내포(connotation)는 전달되지 않았다고 얘기했습니다. 같은 언어체계, 같은 제식, 같은 상징이 전이되었다 할지라도 양자는 자기의 고유한 길을 걸어갈 뿐인 두 개의 다른 영혼이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결국 불교가 중국문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던 것은 동한제국문명의 말기로부터 위진시대에 걸쳐 현학(玄學)이라고 하는 노장사상이 성행하여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정신적 토양을 깔아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며칠 전에 작고하신 저의 스승 후쿠나가 미쯔지(福永光司, 1918~2001)선생은 중국에 있어서의 불교의 전개는 노장사상에 의한 격의불교(格義佛敎)의 역사일 뿐이라는 테제를 제시했습니다. 여기 격의불교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생소한 이론들을 자기들에게 친숙한 도가계열의 개념을 빌어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타’(Buddha)를 장자가 말하는 ‘진인’(眞人)으로 이해한다든가, '열반(涅槃, nirvāṇa)을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로, ‘보리’(bodhi)를 ‘도’(道)로 이해한다는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티벹불교는 중국불교에 비해 격의가 최소화된 인도 본연의 모습에 가까운 불교를 보존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죠.”
“모든 문명의 교류는 필연적으로 왜곡과 변용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아잔타 제19 석굴의 한 부조. 저 구석에 싯달타가 득도한 후 카필라성에 돌아와 부인 야쇼다라와 12세의 아들 라훌라를 만나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부인 야쇼다라는 유산을 요구한다. 그러나 붓다는 불법이외의 어느 것도 자식에게 유산으로 남겨줄 것이 없었다. 라훌라는 최초의 사미가 되었다. 붓다와 그 외의 인물묘사에 동체 비례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바로 붓다의 위대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수법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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