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철학의 봉쇄장치
지금까지 본 것처럼 피히테는 선험적 주체를 발견하려는 칸트의 기획을 좀더 근원으로 밀고 가려고 했습니다. 즉 선험적 기획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는 칸트의 선험적 자아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서 무규정적 자아에서 출발합니다. 칸트적인 선험적 주체조차 거기에 의존해야 하는 자아의 존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피히테는 근대철학적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있음 그 자체가 ‘자명한’, 존재로서의 자아로 말입니다. 이 자아가 활동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아는 존재하고 있음이 자명하다고 합니다. 비록 이 자아를, 데카르트처럼 사유한다는 사실에서 도출하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자아’는 주체와 대상을 연관지어주는 활동입니다. 즉 주체와 대상을 자기 안에 포괄하고 있는 전체입니다. 이런 점에서 ‘절대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피히테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나’(자아)를 절대화하여 절대자의 자리를 부여합니다. 예전에 신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이젠 ‘자아’가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피히테는 이 근대적 자아를 신의 자리로 밀어올림으로써 칸트에 의해 재건된 근대철학이 이젠 완전히 승리를 거두었음을 선언하는 셈이기도 합니다. 이로써 근대적 주체철학은 새로이 ‘자아의 신학’을 구성하기 시작합니다. 자아라는 절대자를 신의 자리에 옮겨놓은 학문을 말입니다. 이 ‘신학’ 안에서 모든 것은 자아의 소산이며, 자아활동의 결과물입니다. ‘자아’라는 이름의 주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래서 피히테의 철학을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다른 한편 모든 대상은 자아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자아’ 내부에 있습니다. 이 ‘자아’를 벗어나 있는 사물 자체는 따로 없다고 합니다. 나아가 주체와 대상 모두가 자아 안에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의 일치를 어떻게 보증하느냐 하는 문제는 아예 생겨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건 항상-이미 ‘자아’ 안에서 통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피히테에게 이 통일성은 ‘절대적’입니다.
이로써 사물 자체가 일으키는 난점은 물론, 근대철학이 언제나 부딪혀야 했던 주체와 대상의 일치를 어떻게 확인하고 보증할 수 있는가라는 난문은 해소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일치는 자아에 의해 처음부터 항상-이미 절대적으로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아’ 안에서 자아에 의해 비아가 만들어진다고 하는 것이, 그 비아(대상)를 자아가 올바로 인식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먹는 활동으로서 ‘자아’가 먹는 자아와 먹히는 비아(음식)를 자기 내부에서 반정립시킨다 하더라도, 자신이 무얼 먹는지 모르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그걸 아무리 ‘음식’으로서 이미 판단하고 먹기 시작한다 해도 말입니다. 광인이 똥을 쨈(음식)으로 ‘자기 안에 정립하고’ 먹는다 해서 그게 똥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라고 할 순 없는 일일 테니 말입니다.
나아가 그걸 똥이란 대상으로 정립하는 자아와 쨈이란 대상으로 정립하는 자아가 있다면, 이 두 자아가 모두 옳은 것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요? 피히테에 따르면 그렇다, 인정될 수 있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는 그걸 똥이란 대상으로 반정립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걸 쨈이란 대상으로 반정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많은 자아들이 모두 자기의 대상을 반정립하고 그걸 진리라고 부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구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하고, 누구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하는 게 모두 다 진리가 될 수 있는 ‘혁명적’ 방법인 셈입니다. 이는 진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근대철학의 딜레마가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피히테가 진리의 문제를 ‘절대적으로’ 해결하는 데서 뚫고 나가야 할 근원적인 장애는 차라리 ‘차이’와 ‘불일치’를 사고할 수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피히테가 보기에 주체와 대상은 ‘자아’ 안에서 절대적으로 일치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차이와 불일치는 사고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불일치를 사고할 수 없다면 새로운 것을 사고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기존의 판단과 ‘다른’(불일치하는) 사실이나 대상을 주목함으로써 비로소 인식될 수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피히테의 철학으로는 다수 지식의 대립과 충돌, 그것을 통한 새로운 사실의 발견, 그 결과로서 새로운 지식의 출현이라는 중요한 사태를 이해하기 곤란해집니다. 즉 진리를 아예 처음부터 절대적으로 보장하려다 보니 실제로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지식의 변화와 발전을 이해할 여지를 스스로 봉쇄해 버린 것입니다. 딜레마가 ‘해결’된 대신 사상적인 봉쇄가 나타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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