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 라캉 : 구조주의 혹은 포스트구조주의
라캉의 이론은 레비-스트로스가 그렇듯이 주체나 인간이란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습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주체의 통일성이나 중심성을 해체하는 효과에 대해선 앞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라캉은 이런 해체 효과를 아주 멀리까지 밀고 갑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왕비는 자신의 ‘자아의 이상’을 획득하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본래 모습이라고 상상적으로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 사실은 타자가 지정한 자리를 받아들입니다. 즉 ‘내 자리’는 내가 아니라 타자가 지정하는 것이란 얘깁니다. 따라서 자아의 중심성은 거꾸로 타자의 중심성으로 전환됩니다. 그래서 그는 데카르트를 겨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예컨대 왕비는 편지에 대한 관계 속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즉 내가 아니라 타자의 담론 속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서 있어야 할 곳, 즉 내가 존재해야 할 곳은 타자가 지정해 준 내 지점이지요. 따라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타자가 ‘생각하는’(지정하는) 곳, 즉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즉 타자의 담론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캉이 보기에 ‘나’ 혹은 ‘자아’라는 주체는 떤 중심성도 통일성도 갖지 않으며, 오히려 타자의 담론, 타자의 욕망으로서 의식의 결과물입니다. 즉 무의식이란 형태로 내면화된 체계와 구조의 결과요 효과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라캉의 출발점은 레비-스트로스와 방식으로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나아가 주체의 구성을 ‘타자’라는 구조의 효과로, 그 결과물로 본다는 점에서도 레비-스트로스와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라캉 역시 구조주의자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라캉에게는 단순히 평가하기는 곤란하게 만드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즉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 형성되는 무의식을 통해, 그 서의 체계 속에 편입됨으로써 개개인은 주체로 구성된다고 한 점에서 레비-스트로스와 동형적입니다. 또한 그 결과 타자라는 이름의 체계가 하는 자리에 결국은 귀착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점에서도 ‘구조주의적’입니다. 편지는 목적지에 배달되리라는 라캉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의미는 기표들의 작용을 통해서 형성됩니다. 의미(signification)이란 기표들의 관계를 통해 기표들이 기호(sign)로서 를 갖게 되는 것 ― 의미화(signification) ― 을 뜻합니다. 기표들 그러한 관계들이 성립되기 이전에 기표들의 의미(기의)는 어느 하나로 정되지 않으며, 이런 점에서 “기표는 기의 밑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속 미끄러지기만 한다면 의미작용은 물론 기호를 한 의사소통도 불가능하게 될 겁니다. 여기서 라캉은 ‘고정점’(point capiton)이란 개념을 도입합니다.
고정점이란 말 그대로 기의를 고정함으로써 기표의 미끄러짐을 시키는 점을 말합니다. 원래는 의자에 불룩하게 튀어나온 쿠션을 capiton이라 하고, 그것이 튀어나오도록 속을 넣고 고정시킨 지점을 point de capiton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말을 하고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그 문장 안에 있는 기표들의 의미는 고정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 고정점입니다. 즉 마지막 기표와 마침표를 통해 기호들의 연쇄가 매듭지어지고 기호의 의미는 고정됩니다. 마치 배가 닻을 내림으로써 잠시나마 그 위치가 고정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를 ‘정박점’(anchoring point)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기호가 의미작용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차라리 의미작용을 통해서 기호의 의미가 고정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고정점의 기능은 잠정적입니다. 그것은 고착된 것이 아니라 잠시 고정된 것이고, 따라서 뜯어서 다시 변경할 수도 있는 것이며, 기표연쇄의 항들을 변경시킴으로써 의미의 흐름이 다른 것으로 고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표의 의미작용이 갖는 이러한 잠정성은, 의미를 언어(랑그) 전체에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는 구조주의의 입장과 매우 상이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라캉은 분명히 말합니다. 언어에 대해, 다양한 기호연쇄들에 대해 하나의 잣대로 작용하는 기준은 없다고 말입니다. 어떤 기호연쇄에도 얽매이지 않으면서 그 기호연쇄의 의미를 결정해 주는 ‘메타언어’(야콥슨)는 없다고 합니다. 이는 야콥슨의 개념을 받아들이면서도, 모든 언어에 공통된 어떤 잣대를 찾아보려는 야콥슨의 시도와 분명하게 구분선을 긋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점들로 인해 라캉은 ‘포스트구조주의자’ ‘탈구조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런 측면들은 구조주의가 가지고 있는 근대적 요소를 의식적으로 탈각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라캉이 타자란 개념을 통해 주체를 구성해내는 방식에 특징적인 것을 간략히 언급하겠습니다. 첫째는 주체를 구성하는 타자란 바로 질서를 의미하며, 이는 언제나 단수/대문자(Other)로 쓰인다는 것, 그리고 이 타자(질서)의 외부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질서를 벗어나 사람을 사고하는 일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무의식의 형성 메커니즘이 질서의 체계에 대한 동일시로만, 즉 타자가 지정한 자리를 자기 걸로 동일시하는 것으로만 이해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의 것과 이를 합하면, 모든 사람이 결국은 기존의 질서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동일시한다는 것, 거기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를 더 추가하자면 주체를 구성하는 타자가, 질서의 체계가 오직 ‘아버지-어머니-나’라는 오이디푸스 삼각형 내부에서만 정의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라캉의 이론은 당시 프랑스의 지식인들에게 매우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알튀세르나 크리스테바(J. Kristeva), 혹은 라클라우(E. Laclau)처럼 라캉의 개념이나 이론적 틀을 직접적으로 원용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보드리야르처럼 사회적 현상을 기호적 현상으로 소급해서 파악하는 흐름 전체가 라캉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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