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⑤강: 증여의 교육론
그렇다면 증여의 마인드를 교육에 대입시킨다는 어떤 모습이 될까? 지금부턴 증여의 시각으로 본 교육론에 대해 알아보며 길고 길었던 5강의 마지막 후기를 써보도록 하겠다.
가르치고 싶은 게 있기에 가르친다
첫째, 최초에 물건을 전해주는 사람처럼 교사는 ‘나는 가르치고 싶은 게 있다’는 생각으로 가르치려 한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가르침에 대한 수요가 있어서, 또는 그런 가르침을 원해서 교사가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답례에 대한 생각은 없이 물건을 부족과 부족 간의 경계지점에 놓고 오듯,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고 싶은 것을 학생이 없음에도 가르칠 뿐이다. 왜냐 하면 ‘잣대 혹은 도량형으로 계측할 수 있는 가치만 배우겠다’와 같이 등가교환의 가치는 아무리 많이 쌓여도 사람은 성숙해지지 않지만, ‘계측할 수 없는 가치’를 교사로부터 증여받을 때 아이는 비로소 ‘성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하지만 그 후 강진엔 배움의 기풍이 일어난다. 가르칠 것이 있어서 가르칠 뿐인데 말이다.
다양한 교사가 다양한 가치관에 따라 교육하는 게 허용되어야 한다
둘째, 교사는 개인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어야만 한다. 교사 개인마다 성향도 다르고, 가르치고 싶은 것도 다르며, 가르치는 방식도 다르다. 그러니 어떤 교사가 학생에게 ‘엄청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반대급부 의무를 지니게 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교사는 완벽한 개인이 아닌,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는 다양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치다쌤은 “자기 자신이 혼자서 모든 교육기능을 맡는 완전한 교사가 되려고 바라는 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좋은 교사’가 되려고 바라는 것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좋은 교사’ 같은 것은 단품單品으로는 존재하지 않아서 ‘좋은 교사’가 있을 수 있다고 하면 다른 교사들과 원만한 협력이 가능한가, 좀 더 파고들어가서 말하자면 ‘다른 교사가 결코 하지 않는 일을 하는 혹은 다른 교사가 결코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다른 사람과 대체 불가능한’ 교사가 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교사는 교사단敎師團으로만 존재한다’는 이 말에 대해 한 선생님은 “예전에 혁신학교에서 근무할 때 교장은 ‘아침에 오는 학생들은 포옹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어 모든 교사들이 아침마다 교문 앞에서 오는 학생들을 의무적으로 포옹해야 했다. 그랬더니 아이들 중엔 뒷문으로 돌아서 들어오기도 하더라”고 말하며 혁신적이지 않은 혁신학교의 모습을 비판했고, 교사단을 허용하지 않는 학교의 풍토를 비판했다.
▲ 혁신학교라면, 이 그림처럼 교사단을 인정해주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교육의 성과는 공동체 전체가 누려야 한다
셋째, 교육의 목적은 ‘사람을 성숙으로 이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껏 교육을 받는 이유를 일신의 영달을 위해, 나 자신을 위해서라고 설명해왔다. 그래서 학교교육의 목적은 ‘학습자가 충분히 노력하였기 때문에 노력에 걸맞은 보상을 얻었다는 합리적인 달성감을 느끼게 하는 것’에 주안점을 뒀다. 바로 이런 생각 자체가 교환을 기반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동섭쌤은 “교육의 성과를 개인이 혼자 독차지 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함께 누리는 것이다”고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성숙해져야만 증여의 감각을 터득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고려한 배움의 역동적인 과정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때 ‘모르기에 배운다’며 배움의 즐거움에 몸을 맡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성숙으로 이끌기 위해 교육해야 하고, 그런 교육을 받기 때문에 성숙해지는 것이다.
▲ 글로벌 인재야말로 성숙과는 반대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개인주의적인 생각으로 언제든 명령 하나면 떠날 수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동섭레스트 정상에서 외치다
드디어 우린 동섭레스트의 정상에 도착했다. 올라오는 과정 속에 힘들었고, 포기하고도 싶었으며, ‘내가 왜 이런 미친 짓을 시작한 걸까?’라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하지만 ‘뭔지는 모르지만 배우고 싶다’는 생각으로 순간순간 드는 감정들을 이겨내며 오르니, 결국 이곳에 도착했다.
정상에서 보는 세상은 여태껏 옥신각신하며 살아왔던 치열하고 매정한 곳이 아닌, 무수한 생명체가 어우러져 엄청난 비경을 펼쳐내는 곳이었다. 이처럼 높은 시좌로 이륙하여 달라진 세상을 봤기에 더 이상 디자인된 세계에 갇혀 관성적으로 살아갈 필요성은 느끼지 않는다. 물론 이번 한 번 오른 것만으로 완벽하게 바뀌거나 행동의 패턴이 변화하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재디자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봤고, 그 힘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등반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청량감과 뿌듯함을 맘껏 누려보자.
이것으로 트위스트 교육학 5강의 후기는 끝났다. 다음 편은 트위스트 교육학 후기의 마지막 편으로 53편의 후기를 쓰면서 느낀 소감을 담으며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 5강의 강의 동안 열심히 오르고 올라, 동섭레스트의 정상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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