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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스트 교육학 - 55. 닫는 글: 트위스트 교육학이란 씨앗 키우기 본문

연재/배움과 삶

트위스트 교육학 - 55. 닫는 글: 트위스트 교육학이란 씨앗 키우기

건방진방랑자 2019. 10. 2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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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닫는 글: 트위스트 교육학이란 씨앗 키우기

 

 

솔직히 후기를 마무리 짓는 지금 그런 세 가지 도전은 만용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어지는 5번의 강의를 듣고 그 강의들을 한 편으로 압축하는 형태의 후기가 아닌, 한 강의 당 6~10편 이상의 후기로 써나가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으니 말이다. 강의는 매주 꼬박꼬박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강의가 시작하기 전에 지난 주 강의 후기는 모두 마쳐야만 한다. 하지만 학교 업무도 있고, 글도 써지지 않을 때가 있으니, 시간이 촉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늘 시간에 쫓기듯 좌불안석해야만 했고, 강의를 들을 때조차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냐?’라는 부담에 집중이 방해되기도 했다.

 

 

매 강의를 들으러 갈 때 피크닉을 간다는 느낌으로 편하게 가려 했지만, 마음 한 구석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도전은 반절의 실패, 반절의 성공

 

더욱이 이런 식으로 강의를 듣고 연재하는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더욱 긴장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썼던 연재글은 모두 여행기(도보여행, 사람여행, 지리산 여행, 카자흐스탄 여행, 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뿐이었다. 그런 글을 쓰며 나도 이젠 어떤 것이든 연재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나 보다는 자만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건 완벽한 착각이었다.

여행은 모든 여행이 끝난 후 차후적으로 그 상황을 되돌아보며 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이기에, 의식의 흐름을 따라 써나가면 된다. 하지만 강의는 의식의 흐름을 따르되, 이해한 내용을 나의 생각과 버무려 써나가야 한다. 의식만 따르다간 사변적인 후기가 되고, 강의내용만 서술하다간 딱딱한 전문서가 된다. 그 둘을 어떻게 조화시키며 나의 생각으로 버무려 내는가가 중요하다 보니, 긴장도는 높아지고,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열정은 사그라지고 체력은 달렸으며, 이해력은 현저히 떨어져 갔다. 그러니 쓰면 쓸수록 글의 퀄리티는 떨어졌고, 그럴수록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은 더욱 크게 나를 짓눌렀다.

여는 글은 첫 강의가 있던 418일에 썼고, 닫는 글은 이미 강의가 끝나고 2주나 흐른 시점인 64일에 마무리를 짓게 됐으니, 꼬박 46일 동안 트위스트 교육학에 갇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깜냥도 안 되는 사람이 만용을 부리다가 제 꾀에 넘어간 꼴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깜냥이 되는 줄 알고 무작정 도전했다가, 엄청 데였다.

 

 

 

다섯 번의 트위스트 교육학은 신명나는 한 판 춤

 

이런 고뇌를 7주 가까운 시간 동안 느끼며 보낸 후에, 마침내 닫는 글을 쓰고 있으니 지금의 감회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

그렇다고 다섯 번의 강의를 듣는 내내 괴롭고 힘들기만 했냐 하면 전혀 그렇진 않다. 강의 후기를 써야 한다는 부담을 전혀 느끼지 않고 강의를 들었다면, 이 강의는 트위스트를 추듯 경쾌하고 유쾌했을 테니 말이다.

첫째 강의의 제목은 하품수련의 역설이다. 이 강의는 하품을 배우러 온 학생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껏 우리가 지녀왔던 공부에 대한 생각 자체를 완전히 붕괴시켜 버린다. 누군가 망치로 철학하기란 말을 했다시피, 동섭쌤은 이 이야기를 통해 망치로 교육하기를 재창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강의를 들으며 공부란 여행이고, 그 여행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하고 싶은 그 마음 하나로 시작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둘째 강의의 제목은 신발 떨어트리는 사람과 신발 줍는 사람이다. 첫 강의에서 말한 수업이란 역동의 장이며, 활발발한 교류의 장이란 생각을 한 단계 더 나가게 함으로, 배움에 대한 지평을 넓혔다. ‘배움의 기본은 오해다라는 말과 함께 배우는 자는 욕망하는 자라는 말은, ‘성공하기 위해 배운다와 같은 상식을 비상식으로 만들며 여러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러니 이땐 학생 시절엔 미처 느껴보지 못한 알아간다는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셋째 강의의 제목은 지금 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필요한가?’이다. 당연하게도 수업을 잘하는 교사’, ‘학생의 눈높이에 맞추는 교사’, ‘수업 도중에 질문을 많이 하는 교사’, ‘학생들과 함께 무언가 만들어가는 교사가 좋은 교사라 생각했고, 그런 교사들이 칭송받는 학교가 좋은 학교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강의에선 그런 교사를 좋은 교사로, 그런 학교를 좋은 학교로 생각하는 사회가 얼마나 이상한 사회인지 알려주며,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의 숨겨진 매력을 알려줬다. 아마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의실에 있던 교사들은 충격에 휩싸였겠지만, 그럼에도 , 나도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넷째 강의의 제목은 학교를 학교적이지 않은 곳으로 하기 위해서는?’이다. 우린 너무도 학교에 익숙해져 있고, 아무런 생각 없이 지금껏 그래왔듯 행동을 하면서 교육적인 행동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강의에선 그런 지극히 학교적인 모습이야말로 오히려 가장 큰 문제일 수 있음을 알려줬다. 상대평가를 통해 상위 등급인 학생을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여 우대하는 학교 시스템에 대해, 학교의 대화법인 ‘I-R-E 대화법이 얼마나 학생들을 옥죄는 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했다.

다섯째 강의의 제목은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메시지이다.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가치관은 등가교환이다. 얼마를 지불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바라며, 얼마를 공부했으니 그에 대한 성취를 바란다. 하지만 공부란 애초에 등가교환의 마인드론 할 수 없는 거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며, 증여의 마인드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드디어 배울 수 있고, 삶은 풍요로워지며, 관계는 깊어진다. 그리고 증여의 마인드를 지닌 사람만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에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트위스트 교육학이란 씨앗, 키워내기

 

이제 우린 드디어 트위스트 교육학의 길고 긴 여정의 끝자락에 서 있다.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쉼 없이 이어졌고, 그건 나에게 깊은 고민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 강의를 한 번 들은 것만으로,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한 번 읽어본 것만으로 우리의 삶이 엄청나게 바뀔 리는 없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들어보려 했고 고민하려 했으니, 기본적인 생각에서 미세한 차이라도 생겼을 것이다. 좋다, 그처럼 아주 보이지도 않는 작은 차이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그리고 그 씨앗을 키워보자. 그러면 그 씨앗은 자라고 또 자라, 어느 순간에 미처 의식하지 못했지만 삶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무릇 책을 읽는 자는 반드시 단정히 손을 모으고 무릎을 끊고 앉아서, 공경히 책을 대하여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고 뜻을 다하며, 자세히 생각하고 함영(익숙히 읽고 깊이 생각함)하여, 깊이 뜻을 이해하고, 구절마다 실천할 방법을 구해야 한다.

만일 입으로만 읽어서 마음에 체득하지 않고 몸으로 실행하지 않는다면 책은 책대로이고 나는 나대로일 것이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凡讀書者, 必端拱危坐, 敬對方冊, 專心致志, 精思涵泳, 深解義趣, 而每句必求踐履之方.

若口讀而心不體, 身不行則, 書自書我自我, 何益之有? -擊蒙要訣』 「讀書章

 

 

▲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 강의는 강의대로, 나는 나대로.

 

 

예전이라 해서 많이 다르진 않았나 보다. 그래서 책을 읽어 과거시험에 통과하고 입신양명하여 위세 높은 권세가가 되었지만, 시험을 위한 공부만을 했을 뿐 고민해보거나 그걸 행동해야겠다고 생각도 하지 않으니, 책은 책이고 나는 나일뿐이다. 그런 식으로 공부해서 무엇이 좋겠는가?

그처럼 트위스트 교육학 강의도 하나의 강의일 뿐이다. 다섯 번의 강의를 듣고 나면 시간은 흐르고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간다. 그럴 때 다시 한 번 곱씹어 보고 어떤 생각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그저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고 아무런 생각의 변화조차 없다면, 역시나 강의는 강의일 뿐이고, 나는 나일뿐이다. 그런 강의는 들어서 무엇 하겠는가?

그러니 이 강의를 들으며 미세한 차이란 씨앗을 품었다면, 이제 거침없이 그 씨앗에 물을 주고 햇살을 비춰주고 맘으로 응원하며 키워갈 일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 트위스트 교육학 강의의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대여, 이제 씨앗을 키울 때다.

 

 

다시 길에 놓였다. 하지만 이 길은 더 이상 혼란을 안겨주는 장소, 미지의 불안만이 넘실거리는 곳도 아니다. 다시 그 길을 간다.

 

 

 

인용

목차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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