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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제43장 - 나의 말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느냐?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43장 - 나의 말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느냐?

건방진방랑자 2023. 3. 23.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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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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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여쭈었다. “당신이 도대체 뉘시길래 이 같은 일들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나이까?” 2(예수께서 대답하시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으로부터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도다. 3차라리 너희는 유대사람들처럼 되어버렸구나. 그들은 나무를 사랑하면서 그 열매를 증오하기도 하고, 열매를 사랑하면서 그 나무를 증오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1His followers said to him, “Who are you to say these things to us?” 2(Jesus said to them,)“You do not know who I am from what I say to you. 3Rather, you have become like the Jewish people, for they love the tree but hate its fruit, or they love the fruit but hate the tree.”

 

 

이 장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예수의 상황은 무슨 대단한 하늘의 비밀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항상 평범하게 부닥치는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이런 로기온을 대할 때, 인간 예수의 고뇌를 읽어야 한다. 도마복음서에는 기적도 없고, 처녀탄생의 내러티브도 없고, 십자가도 없고, 부활도 없다. 오직 예수의 말씀이 있을 뿐이다.

 

우리도 항상 예수와 동일한 상황에 부닥치게 마련이다: “니가 도대체 뭐길래, 이런 말을 우리에게 하고 있는 거냐?” 나 도올이 이런 비판에 봉착(逢着)했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경우에 이런 비판에 봉착하게 될까? 우선 내가 하는 말이 듣는 자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내용을 전하거나, 그들의 능력에 부치는 아주 탁월한 견해를 전하거나, 또는 그들의 양심을 자극하는 날카로운 비판의 언사이거나, 보편적 선을 위하여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위대한 말이지만 그것이 기존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독소를 내포하고 있거나, 또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것일 때, 그들은 그 말씀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말씀의 주체와 말씀의 내용간에 어떤 메울 수 없는 갭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인간에게 작용하는 것은 권위주의이다. 자신의 권위가 무너진다고 여겨질 때, 사람은 타인의 권위의 근거를 묻는다. 도대체 그대는 무슨 권위의 근거 위에서 이런 말을 하는가? 말씀의 주체의 배후에 어떤 또다른 권위의 주체가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4복음서의 예수는 이런 상황에 봉착하게 되면 반드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권위를 물고 들어온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의 예수의 자의식을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상호내거(相互內居)의 논리에 의하여 매우 치열하게 물고 늘어진다그러면 당신은 누구요?’하고 유대인들이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처음부터 내가 누구라는 것을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에 대해서 할 말도 많고 판단할 것도 많지만,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기에 나는 그 분에게서 들은 것을 그대로 이 세상에 선포할 뿐이로다8:25~26. 그리고 또 요 8:19, 14:8~11을 참고할 것.

 

그러나 도마의 예수는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상대방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사실 4복음서의 내러티브 속의 예수는 이미 바울의 신학의 필터를 거친 후의 예수일 뿐이다. 도마의 예수는 과감하다. 그리고 진실하다. 예수 본인의 실존으로부터 절대적인 명제를 끄집어낸다. 왜 나의 배후를 캐는가? 왜 내가 말한 것으로부터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하느냐? 나의 말씀 그 자체로부터 나의 위인(爲人), 나의 아이덴티티를 판단하라! 내가 말한 것으로부터 내가 누구인지를 판단해야만 할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에 의하여 평가되고 입증되지 않는다. 내 말 그 자체를 평가하라! 그 얼마나 진솔하고 자신있는 위대한 언사인가? 나에게서 그대 도반들이 진리를 추구하려고 한다면, 나의 말씀그 자체의 논리에 의하여 나의 진리를 판단하라!

 

여기 유다이오스(loudaios)’란 말은 오늘날의 유대인(Jews)’의 개념인지, ‘유대지방에 사는 사람들(the Judeans)’이라는 로칼한 개념인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단지 유다이오스라는 하나의 개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여기 역사적 예수의 자기인식에 있어서, 예수는 유대지방의 사람이 아닌 갈릴리지방의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유다이오스가 아니라 예수의 도반들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내가 말하는 것으로부터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너희 놈들은 이미 유대사람들이 다 되어버렸다. 유대놈들은, 우리 갈릴리사람들과 달라서, 나무와 열매를 갈라서 생각하는 놈들이기 때문이다. 나무와 열매는 결코 둘이 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일 뿐이다. 나무를 좋아하고 열매를 싫어할 수 없으며, 열매를 좋아하고 나무를 싫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 예수의 아이덴티티를 나무라고 한다면 예수의 말씀은 열매이다. 그 나무와 열매가 따로따로 놀 수가 없는 것이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가 있고, 나무를 보면 그 열매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뺀질뺀질하게 사는 시골 향원(鄕原)들을갈릴리 사람 예수에게는 예루살렘이 오히려 촌동네이다 보고 주둥아리만 나불거리고 사람됨은 딴 판이라고 말한다면, 갈릴리사람 예수는 유대인들(유대 지방의 사람들)을 그런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성서의 배면에 깔려있는 리얼한 풍속사적 시각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인 아이덴티티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예수는 갈릴리 사람이었기에 그토록 용감하게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그 판을 뒤엎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성전뒤엎음이 만약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면), 나무와 열매에 관한 이야기는 7:16~20, 6:43~45, 그리고 12:33~34를 참고하라, 팔레스타인 언어에 내장되어 있는 흔한 속담류의 비유법일 것이다. 공관복음서는 이 비유법이 위선자들, 거짓 예언자들의 언행불일치나, 그들 위인(a person)과 행동(his actions)의 괴리를 비판하는데 동원되고 있으나, 여기서는 예수 도반들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통합적 사고의 반증일 뿐이다.

 

 

시리아 라스 샴라에서 발견된 문서 중의 하나. BC 12세기 초반의 문서인데, 이집트 파라오의 호위대장인 베야(Beya)가 우가리트왕 암무라피(Ammurapi)에게 보낸 편지이다(아카드어), 세로 6.2cm, 가로 7.2cm, 두께 2.3cm, 다마스쿠스 박물관.

 

우가리트 설형 알파벳문자 판독의 열쇠를 제공한 30개 글자형상, 우가리트 문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가로쓰기 방식의 원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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