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장
방랑하는 자
제42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방랑하는 자들이 되어라.”
1Jesus said, “Be passersby.”
도마복음 전체를 통틀어 가장 대표적인 구절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많은 주석가들이 이 장의 로기온을 꼽을 것이다. 나 도올 역시 이 한마디를 도마복음 예수의 사상을 대변하는 아포리즘으로서 내세우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도마복음이 이 42장의 짧은 경구로 인하여 유명하여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짧기 때문에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또 많은 담론을 포용한다. 이 말이 어떠한 맥락에서 언제 누구에게 한 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이러한 말들을 구체적 사태의 맥락 속에 집어넣어 예수 생애의 내러티브를 만들었지만, 그러한 내러티브가 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도마 예수의 말씀은 훨씬 더 포괄적이고 순결한 감동을 준다.
여러분들은 이미 제27장에서 ‘이 세상으로부터 금식한다(to fast from the World),’ ‘안식일을 안식일으로서 지킨다(to observe the Sabbath as a Sabbath)’는 표현의 포괄적 함의를 접했으며, 제36장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의 메시지를 접했다. 여기 ‘방랑하는 자가 되라’는 명제는 구체적으로 예수운동에 참여한 도반들이, 예수 자신을 포함하여, 끊임없이 갈릴리지역의 이 동네 저 동네로 다니면서 방랑하던 견유학파적인 카리스마들(Cynic itinerants)이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이들의 삶의 방식에 관한 율장(律藏)적인 훈계들은 누가복음 9:57~10:16에 잘 기록 되어있다(Q28, 29, 30, 31),
불교에도 ‘만행(卍行)’이라는 것이 있다. 스님들의 삶을 특징지우는 것도 ‘무소유(無所有)’와 ‘무소주(無所住)’라 할 것이다. 세속적 가치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집착을 버림은 끊임없는 ‘이동’으로 나타난다. 안주하는 보금자리를 만들지 아니 하는 것이다. 예수운동 도반들에게도 무소유(재산 포기), 무주택(집 없음), 무가정(가정 포기)은 필수의 요건이었으며, 그들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여행을 위하여 지갑이나, 배낭이나, 신발(샌달)을 가지고 다닐 수도 없었으며, 여벌의 속옷도, 지팡이도 가져올 수 없었다. 뱀이 많은 이 지역에서 지팡이나 신발조차도 없이 걸어다닌다는 것은 극도의 자기부정의 고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 ‘방랑하는 사람이 되라’는 메시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추구하는 도반들의 아이덴티티가 그룹 아이덴티티가 아닌, 개인의 내면적 주체성을 그 핵심으로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방랑’이란 세계로부터의 떠남(departure)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사(世事)에 연루되지 않는 탈(脫)앙가쥬망(disengagement)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탈앙가쥬망은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다른 방식의 앙가쥬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탈앙가쥬망을 통하여 새로운 앙가쥬망으로 진입하는 가장 결정적 이유는 ‘자유의 획득’을 위한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자유의 신학을 ‘십자가’와 ‘부활’의 테마로서 발전시켰다. 그러나 여기 예수는 바울과 같은 그러한 종말론적인 십자가나 부활의 전제를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나의 육신을 포함하는 모든 세속적 가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림으로써 새로운 부활의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지 않다. 여기 ‘파라게(parage)’라는 의미를 연상시키는 바울의 말이 있다.
세상과 거래를 하고 살아가는 자들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깊게 연루되지 않고)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의 형적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라(고전 7:31).
이 말만 떼어놓고 보면 매우 동방적 가치를 나타내는 메시지처럼 보이지만 여기 바울의 메시지는 세속적 가치로부터의 탈앙가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재림이 다가오고 있어서 이 세계의 형적이 곧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집착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긴박한 종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 무굴제국의 제3대 황제인 ‘위대한 자’ 아크바르(Akbar, 1556~1605년 재위)【무굴제국을 번영시킨 가장 위대한 지도자. 무슬림이었지만 모든 종교를 포용하고 학문, 예술, 문학을 사랑하였다】가 건립한, 아그라 지역 파테푸르 시크리(Fatehpur-Sikri)의 모스크 성문 아치에 아랍어로 전하는 예수의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너에게 축복이 있을지어다. 예수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세상은 하나의 다리일 뿐. 건너가거라. 거기에 네 거처를 짓지는 말아라.”
나는 도마복음 42장의 로기온을 생각할 때마다, 이 로기온보다 약 400년 정도 앞서서 성립한 원시불교경전으로서 살아있는 붓다의 생생한 말씀을 전하고 있는 『숫타니파타』【팔리어 남전대장경 소부(Khuddaka-nikāya)의 다섯 번째 경전: 숫타(Sutta)는 경(經)의 뜻이고 니파타(nipāta)는 집성(集成)의 뜻】의 ‘코뿔소의 외뿔(khaggavisāṇasutta)’이 생각난다.
여기 코뿔소(khagga)는 ‘혼자서 걸어가는 수행자,’ ‘혼자서 깨달은 사람(paccekabuddha)’을 의미한다. 뿔이 두 개로 짝지어 있지 않고 하나로 되어있기 때문에, 명예나 치욕, 사랑과 저주, 칭찬과 폄하, 선과 악 등 인간세의 이분적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확신에 따라 깨닫고 생활하는, 이른바 후대의 불교 교학에서 말하는 ‘기린(麒麟)의 뿔에 비유되는 생활을 하는 독각(獨覺)’을 의미한다. 중국사람들은 ‘코뿔소(rhinoceros)’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들의 신화적 상서로운 동물인 기린으로 번역했던 것이다. 그리고 기린을 외뿔의 동물로 만들어버렸다. 독각(獨覺)에도 두 종류가 있는데 부행독각(部行獨覺)과 인각유독각(麟角喩獨覺)이 있다. 부행독각은 수행자의 그룹을 짜서 같이 수행하는 독각이다. 인각유독각은 여기서 말하는 홀로 방랑하는 수행자이다. 이 인각유독각이야말로 홀로 깨닫는 사람(paccekasambuddha)이며, 최초기 불교와 최초기 기독교의 공통된 이상이었다.
재미난 사실은 『숫타니파타』에는 절깐에 앉아있는 수행자의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나무 아래, 동굴 속에서 사는 수행자들의 자연스러운 풍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원이 생겨나기 이전의 불교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비구니, 즉 여승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승제도가 생겨나기 이전의 불교의 모습인 것이다【BC 300년경 희랍인 메가스테네스가 인도에 와서 비구니를 본 것을 기록해놓고 있으므로 BC 300년 이전의 불교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스투파(塔)의 숭배, 그리고 챠이티야(塔院)의 숭배가 전혀 언급되질 않는다. 탑숭배 이전의 불교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원시불교의 핵심교리라고 말하여지는 사성제(四聖諦)의 설이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우파니샤드의 전통을 잇는 그냥 ‘진실’ 정도의 의미를 전하는 ‘사짜(Sacca)’라는 용어만 쓰여지고 있는데, 이 말은 ‘사제(四諦)’의 설과는 별 관련이 없다. 그리고 『숫타니파타』 속의 싯달타는 어떠한 특수한 종교의 개조(開祖)라는 자의식이 전혀 없다. 그냥 사람으로서 걸어야 할 길을 진솔하게 말하는 한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불교 특유의 전문용어가 거의 전무하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도마복음서가 바울에 의하여 교리화되고 에클레시아가 조직화되기 이전의 ‘예수운동’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고 한다면, 『숫타니파타』는 불교가 승단의 조직을 구비하게 되고 교리화되고 권위화되기 이전의 ‘싯달타운동’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내가 인용하는 구절들의 놀라운 상통점을 통하여 헬레니즘 문명권 속의 인도적 사유와 팔레스타인적 사유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52.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목마름, 바람과 태양의 뜨거움, 모기떼와 독사들, 이런 모든 것들을 참고 견디며,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53. 어깨가 딱 벌어져 연꽃처럼 늠름한 거대한 코끼리가 그의 무리를 떠나가고 싶은 대로 숲속을 노닐 듯,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54. 연회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잠시 동안의 해탈에조차 이를 겨를이 없다. 태양의 후예(홀로 깨달은 자)인 나 싯달타가 하는 이 말을 명심하고, 거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55. 서로 다투는 철학자들의 논쟁을 초월하여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발견한 수행자는, “나에게는 지혜가 생겼다. 이제 누구에게도 다시 이끌려가지 않으리라”고 자신을 다지면서,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56. 탐내지 말라. 속이지 말라. 갈망하지 말라. 잘 보이기 위하여 자신을 가리지 말라. 혼탁과 미망을 벗어던지고, 세상의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57.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그릇되고 굵은 것에 사로잡힌 나쁜 친구를 멀리하라. 탐욕에 적 개을러빠진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고, 거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쇠뿔처럼 홀로 가거라.
58. 배운 것이 풍비하며 진리를 분별할 줄 아는, 그런 고매하고 명민한 친구를 가까이 하라. 그러한 사귐은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나니, 모든 의혹을 잘라버리고,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59. 세상의 유희나 오락, 또는 쾌락에 것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이끌리지 말라. 몸의 장식을 벗어버리고 꾸밈없는 진실을 말하며, 거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60.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재산도 곡식도, 친척이나 그 외의 모든 욕망까지도 다 버리고,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71. 큰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73. 자비와 평것과 연민과 해탈과 기쁨을 적당한 때를 따라 익히고, 세간(世間) 모든 것을 저버림이 없이,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74. 탐욕과 혐오와 미망을 버리고, 마음의 속박을 다 끊어버려라.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말고,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 안토니 성화 안토니수도원 교회 오른쪽 벽면. 안토니가 생활한 장소에 그려져 있는 성화. 사진=임진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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