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장
성령에 대한 모독만은 용서받지 못한다
제44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누구든지 아버지에 대해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다. 2그리고 누구든지 아들에 대해 모독하는 자도 용서받을 수 있다. 3그러나 누구든지 성령에 대해 모독하는 자는, 이 땅에서도 저 하늘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다.”
1Jesus said,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father will be forgiven, 2and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son will be forgiven, 3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ot be forgiven, either on earth or in heaven.”
언뜻 보기에 이 장의 내용은 우리에게 현기증을 일으킨다.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고 하는 삼위일체론의 세 항목들이 너무도 명료하게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도마복음을 공관복음서보다 앞서는 자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삼위일체론이 문제시되는 4세기경의 작품으로 내려잡아야 할 것이 아닐까? 그러나 여기 그러한 우려는 존재할 여지가 없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개념은 전혀 삼위일체논쟁에서 개념화되고 있는 성부·성자ㆍ성신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상투적인 소박한 언어이고, 더구나 그 내용으로 들어가보면 경악할 만한 내용인 것이다. 전혀, ‘아버지’와 ‘아들’의 중요성이 부각되지 않는다. 세 항목 중의 대등한 항목들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공관복음서가 성립하기 이전에 활약한 바울의 사상에는 매우 명료하게 아버지, 아들, 성령의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까 이 세 개념은 이미 AD 50년대 원시기독교 교계에 있어서 익숙한 개념이었다(쿰란공동체에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사상의 핵심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오직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만 인식할 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에 의하여 이 세상으로 인간의 육신의 탈을 쓰고 태어난 것이다. 이 아버지는 과거부터 유대인들이 생각해왔던 진정한 유일신(the monotheistic God)이다. 이 유일한 하나님은 아들을 파견함과 동시에 또 하나님의 영을 아들의 영으로서 파견한다. 이 하나님의 영은 아들의 영인 동시에 인간과 하나님을 매개시킬 수 있는 영이다. 따라서 아들의 영은 우리 믿는 자들의 영이 되는 것이다. 고전 12장을 펴보라!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는 저주받을 놈이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다. 또 성령에 의거하지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主)이시다’라고 말할 수 없나니라.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하나이며,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主)는 하나이다”(고전 12:3~5). 성령(Holy Spirit)이야말로 인간을 묶는 공통분모인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pneuma)을 단수로서만 쓴다. 그것은 인간에로의 하나님의 임재이다. 그것은 나에게 깃들인 아버지의 증표이며 아들의 증표이다. 바울의 가장 리얼한 서신 중의 하나인 갈라디아서 4장을 펴보라!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바울은 동정녀 마리아 탄생설화도 몰랐다), 또 율법의 지배 속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은(*즉 예수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관념이 바울에게는 있다),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the Spirit of his Son)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고 외칠 수 있게 하셨나니라(갈 4:4~6),
이 문장에서 우리는 이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개념이 명료하게 구원론적 차원에서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버지 - 아들 – 성령’의 소통된 일체야말로 진정한 유일신의 진정한 계시가 되는 것이다. 이 때 성령은 어떤 의인화된 실체는 아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역사적 예수를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과 결합시키는 어떤 추상적 힘이다. 역사적 예수의 썩을 수 있는 육체성과 부활하여 하늘로 들리우신 예수의 소원함을 극복케 하는 생명력이며, 그 생명력은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모든 인간들의 일상성 속에 임재하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들에게로 임재케 하는 네트워크 같은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성립시기를 AD 51년 전후로 추정한다면(*성립시기에 관한 다양한 설이 있다) 여기 도마복음서에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더구나 이 장의 병행구가 큐복음서 자료와 마가자료에 명료하게 나타나고 있다.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에 대하여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다.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人子)를 거역하면 용서받을 수 있으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에서도, 앞으로 올 세상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다.
(막 3:28~2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저지르는 죄와, 또 (하나님에 대하여) 말로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성령에 대하여 모독하는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나니, 그것은 영원한 죄에 처하여지느니라.
(눅 12:10) 누구든지 말로 인자(人子)를 거역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성령에 대해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 4개의 파편을 비교해보면 눅 12:10과 마 12:32는 큐자료(Q48)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개의 자료 중 누가자료가 큐자료의 원모습에 가깝게 간다. 그러나 마태에는 도마의 원형을 간직하는 삽입구가 종말론적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땅에서도 저 하늘에서도’가 ‘이 세상에서도 앞으로 올 세상에서도’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그러니까 마태는 누가자료(큐자료) 이외의 어떤 도마와 같은 원형자료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 12:31은 마가자료에서 옮아간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마가자료에는 ‘인자(아들)에 대한 모독’이 빠져있다. 그러니까 마태는 큐자료와 마가자료를 같이 참고했으나, 그외로도 어떤 원자료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자료를 비교해볼 때 아버지, 아들, 성령, 이 세 항목이 모두 구비된, 그리고 문장의 명료한 파라렐리즘이 유지되고 있는 자료는 도마자료이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모든 자료에서 공통점을 뽑아서 말끔하게 정리한 것이 도마자료이다 라고, 과연 그럴까? 그것은 정말 억지춘향에 불과한 것이다. 도마가 원자료이고, 이 원자료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들쑥날쑥한 인용방식이 생겨났다고 보아야 한다. 원래 도마의 소박한 사상에는 후대교회에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괴로운 측면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절에서 2절, 2절에서 3절로 진행하는 문장들 사이에는 모종의 느낌의 크레센도(crescendo)가 있다. 그러니까 시시한 것으로 말하자면 아버지가 제일 시시한 것이고, 그 다음으로 시시한 것이 아들이다. 그러나 엄청나게 중요한 최후의 사태는 성령이다. ‘아버지’에 대해서 모독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말로써 이루어지는 허구적 사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인간이 모독한다고 해서 모독되는 존재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크게 보면 용서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다. 여기 도마가 사용한 단어가 ‘하나님’이 아니고 ‘아버지’라는 사실에 우리는 좀 충격을 느낄 수도 있다. ‘아버지’야말로 도마에게 있어선 ‘하나님’처럼 객화될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마는 인간의 언어에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아버지도 실체화된다면 그 아버지에 대한 모독이 대역죄일 수는 없다.
그리고 나 예수에 관하여 모독하는 것도 용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모독하는 예수는 어디까지나 그들에게서 외재화되어 있는 예수이며, 인간의 탈을 쓴 예수이며, 예수의 본질로부터도 외면화되어 있는 예수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자기 인간 예수를 못알아보고 모독한다고 모독하는 자들을 다 벌한다면 그러한 예수는 날강도 같은 예수일 것이다. 자기를 싫어한다고 그들을 다 벌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들에 대해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성령에 대해 모독하는 자는, 이 땅에서도 저 하늘에서도,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 왜냐?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대한 기만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모독할 수는 있으나 나 살아있는 예수의 은밀한 말씀 속에 내재하는 성령을 모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 도올을 모독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나 도올이 말하는 말씀에 내재하는 성령, 그 진실을 모독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실존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본 장의 예수의 외침은 전혀 삼위일체론적 발상과는 별개의 것이다. 도마의 예수는 삼위일체를 말하기 이전에 삼위를 체화(體化: 실체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성령은 체화(體化)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예수에게 있어서 ‘성령’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을 때 부여받은 권능이라고 말하지만, 그러한 성령은 메시아의 시대(Messianic Era)의 도래를 예견하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며 수난드라마의 결구 속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며 도마의 예수와는 별 관련이 없다.
▲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파우 키블리 동네 한복판의 파코미우스 수도원 본부 터. 우람찬 화강암 기둥이 뒹굴고 있다.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이 기나긴 인간세의 성쇠의 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사진=임진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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