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장
좋은 씨와 가라지의 공존
제57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의 나라는 좋은 씨를 [심은 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도 같다. 2그의 원수가 밤중에 몰래 와서 그 좋은 씨들 사이에 가라지를 덧뿌렸다. 3그러나 그 사람(밭의 주인)은 종들을 시켜 그 가라지를 뽑게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내버려 두어라! 너희가 가서 가라지를 뽑으려 하다가, 가라지와 더불어 좋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4왜냐하면 추수의 그 날에는 가라지는 현저히 드러나게 마련이므로 뽑히어 불사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Jesus said, “The kingdom of the father is like a person who had (good) seed. 2His enemy came at night and sowed weeds among the good seed. 3The person did not let them pull up the weeds, but said to them, ‘No, otherwise you might go intending to pull up the weeds and pull up the wheat along with them.’ 4For on the day of the harvest the weeds will be conspicuous and will be pulled up and burned.”
본 장에서 우리는 마태에만 나오는 그 유명한 ‘가라지의 비유’의 원형을 발견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마태라는 복음서의 저자가 도마의 원자료를 활용하여 어떻게 불리고 어떻게 종말론적 해석을 가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대비적으로 검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 13:24~30)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몰래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라. 26그리하여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 하였나이까? 도대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겨난 것이오니이까?’ 28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곡간에 넣으라 하리라.’”
여기 마태의 기술은 기본적으로 도마의 논리를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도마의 간결한 논리구조를 마태교단의 사정과 관련하여 부풀리고 있다. 26절부터 28절까지의 종들과 주인의 대화양식은 마태의 확대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마태는 이 비유를 해석함으로써 최후의 심판이라는 종말론적 협박을 아주 명료하게 못박아놓고 있다. 제자들이 가라지의 비유를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간청하자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 13:37~43) 37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人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다. 39그리고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0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날에도 그러하리라. 41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추려내어 42모조리 풀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43그때에 의로운 자들은 그들의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과연 마태가 해설하는 그런 시각에서 이 가라지의 비유가 이해되어야만 할 것인가? 마태가 열정적으로 열불을 올리고 있는 것은, 세상이 끝나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선인과 악인이 갈리는 무서운 결말이 도래하리라는 그 결론적 사실에 대한 협박이다. 이러한 협박이야말로 초대교단에는 매우 절실하게 요구되는 종말론적 당위였다. 그러나 과연 긴박한 도래를 전제로 하는 그러한 분위기가 도마에게 있었을까? 여기 우선 도마의 비유에서 감지되는 아버지의 나라의 모습은 ‘시간적 긴박성’이 아니라 ‘여유로움’이다. ‘추수의 그 날’이 마지막 심판의 날이라는 보장도 전혀 없다. 추수는 직선적 시간의 최종극점이 아니라 항상 반복되는 자연의 순환점이다. 여기 도마의 시간관은 직선적(linear)이 아니라 순환적(circular)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선과 악의 공존에 대한 관용이다. 가라지는 ‘지자니아(zizania)’라고 부르는 것인데 레방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독초(毒草)로서 학명이 ‘롤리움 테물렌툼(lolium temulentum)’이라 하는데 보통 ‘다넬(darnel, 毒麥, 독보리)’이라고 부른다. 보리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독성이 있다. 그것을 같이 거두어 빻으면 밀가루가 독성을 지니게 된다. 고도가 1천 피트 이상이면 안 자라는데 낮은 지대의 밀밭에는 아주 잘 자란다.
그런데 천국은 이러한 가라지마저도 포용한다. 그것이 공존하도록 둔다. 선과 악은 반드시 공존할 때만 선과 악일 뿐이다. 그것이 지금 악의 씨라고 해서 미친 듯이 뽑아버리는 그러한 짓을 천국에서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완벽하게 성숙하기 전까지는 그 악함을 다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한 씨와 같이 섞여서 자라나는 끝에 최종적으로 악한 것으로 판명되었을 때(현저하게 드러났을 때) 자연스럽게 제거되는 것이다.
이러한 오리지날한 예수의 사상의 온건한 측면은 후대 기독교에 너무도 전달되지 않았다. 마태의 해설이 강요하고 있는 악마와 천사의 대결만이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4복음서의 과도한 알레고리적 해석의 죄악을 도마 원자료의 성격을 통하여 반추해보는 것도 21세기 기독교의 바른 모습을 위하여 매우 요긴하게 요청되는 일일 것이다. 하늘나라는 성급히 선과 악을 단죄하는 곳이 아니라 선과 악을 포용하면서 그것이 제각기 충분한 모습을 가지고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여유로운 지배의 세계라는 것을 항상 생각할 필요가 있다. 원천봉쇄, 발본색원을 운운하는 기독자들의 성급한 논리가 항상 ‘빨갱이 박멸’을 운운하는 어리석은 우파의 논리와 굳게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현실도 깊게 반성해야 할 당위에 속하는 것이다.
▲ 현재 비블로스의 거리, 아주 정돈된 고풍의 아름다운 도시였다. 좋은 서점과 품격있는 식당이 많았다. 레바논의 맥주 알마자(Almaza)는 중동지역에서 명품으로 꼽힌다.
인용
'고전 >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마복음한글역주, 제59장 - 너희가 죽은 후에는 나를 보지 못한다 (0) | 2023.03.25 |
---|---|
도마복음한글역주, 제58장 - 고통 끝에 생명, 고진감래 (0) | 2023.03.25 |
도마복음한글역주, 제56장 - 세상은 시체와도 같다 (0) | 2023.03.25 |
도마복음한글역주, 제55장 - 부모·형제·자매를 버려라 (0) | 2023.03.25 |
도마복음한글역주, 제54장 - 가난한 자는 버린 자 (1) | 2023.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