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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58장 - 고통 끝에 생명, 고진감래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58장 - 고통 끝에 생명, 고진감래

건방진방랑자 2023. 3. 25.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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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끝에 생명, 고진감래(苦盡甘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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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수께서 가라사대, “고통을 겪기에 생명을 발견하는 자여! 복이 있도다.”

1Jesus said, “Blessed is the person who has labored and has found life.”

 

 

이와 같은 계열의 공관복음서 로기온을 들라면 역시 큐복음서에 속하는(Q13) 다음의 구절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5:10~1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6:22) 인자(人子)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누가만 해도 어떤 정치적 핍박의 상황이 노골적으로 전제되어 있지 않다. 마태보다는 큐자료 원문에 더 가깝다고 사료되고 있다. 그러나 마태는 매우 노골적으로 크리스챤이 집단으로 당하는 정치적 박해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핍박(persecution)’이라는 단어는 큐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마태에서는 주요한 주제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실상 마태의 시대에 그토록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예수로 인하여 박해를 받았는지에 관해서는, 실제적 역사상황과는 달리 과장된 표현이라는 것이 주석가들의 중론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영락한 자들은 쉽게 박해를 당할 수 있는 조건에 노출된 사람들이었다. ‘가난한 자야말로 복이 있다고 외쳐대는 견유학파의 방랑자들(wandering charismatics)이야말로 증오와 험담의 대상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 도마의 로기온은 전혀 그러한 박해상황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여기 고통을 겪는다는 표현은 생명을 발견한다라는 목적과 관련된 내면적 과정일 뿐이다. 나는 이 로기온을 읽을 때, 이런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 “해산의 고통을 치르고 있는 그대여 복이 있도다! 그대는 곧 생명을 잉태할 것이기 때문이로다!”(영어의 ‘labor’해산의 수고라는 뜻이 있다).

 

여기 고통수고로움이다. 이 수고로움은 자기의 내면을 트랜스폼시키는 수고로움이다. 자기 내면을 어둠에서 빛으로, 분열에서 통합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수고로움이다. 콥트어의 고통일을 많이 한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내면의 변화라는 것은 참으로 수고로운 과정인 것이다. 박해를 운운한다면 여기서는 어둠과 분열과 사망의 자기가 박해를 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의 논리가 바울의 부활의 신화적 논리와 결합하였고 그것이 결국에는 초대교회의 박해상황에 대한 축복으로 둔갑되는 과정이 일세기 후반의 기독교의 역사였다고 말해도 대차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고통을 겪는다’ ‘수고롭다’ ‘일을 많이 한다는 의미를 문자 그대로 독립적 삶을 유지하면서 방랑하는 추구자, 예수 도반들의 엄청난 노동의 양(hard work)과 관련하여 해석할 수도 있다. 당나라의 회창(會昌) 박해(AD 842) 이후 여러 법난의 상황에도 유독 선종(禪宗)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승려들의 자급자족의 노동 때문이었다. 모든 금욕주의적 삶의 배면에는 실제적인 생존을 위한 수고로운 노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노동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노동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순결한 내면을 발견케 하는 것이다: “노동하는 자여 복이 있으라! 그대는 그대 내면의 진정한 생명을 발견하리로다!”

 

 

여기 석관은 비블로스의 왕실 지하묘지에 있었던 것인데 지금은 베이루트 레바논 국립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이 석관의 뚜껑에 쓰여진 문자야말로 희랍 로마 알파벳문자의 원조로 간주되는 페니키아 문자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22자 체계), BC 1250~100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비블로스의 왕 아히람(Ahiram)의 석관인데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위해 도움을 요청한 두로의 히람왕(왕상 5:1)과는 다른 사람이다. 히람과 아히람은 모두 페니키아어로 내 형제가 기뻐한다는 뜻인데, 왕 이름으로 널리 쓰였다. 이 석관 뚜껑의 글씨는 그의 아들 이토바알(Ittobaal)이 이 석관을 안치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석관은 아히람의 아들 이토바알의 명에 의하여 안치되었다. 그는 그의 무덤안에 있는 그의 아버지를 건드리는 누구에게든지 저주를 내린다.” 혹자는 뚜껑과 관 몸체가 시대를 달리하는 작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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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본문

성경

주제상관도표

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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