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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89장 - 어찌하여 너희는 잔의 겉만을 씻으려 하느뇨?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89장 - 어찌하여 너희는 잔의 겉만을 씻으려 하느뇨?

건방진방랑자 2023. 3. 2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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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

 

 

어찌하여 너희는 잔의 겉만을 씻으려 하느뇨?

 

 

89

1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너희는 잔의 겉만을 씻으려 하느뇨? 2안을 만드신 이가 또한 겉을 만드신 이라는 것을 너희는 알지 못하느뇨?”

1Jesus said, “Why do you wash the outside of the cup? 2Do you not understand that the one who made the inside is also the one who made the outside?”

 

 

이 장도 큐복음서(Q43)와 병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병행문을 비교검토하기 이전에 이 장의 일반적 주제와 관련되는 재미있는 고사를 하나 마가복음에서 인용하여 보자!

 

 

(7:1~5) 바리새인과 또 서기관 중 몇 명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 한 손으로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 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로 몸을 정화하지 않으면 먹지 아니 하니라. 또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 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내가 생각하기에 이 고사는 아주 리얼한 역사적 예수의 한 삶의 실제정황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역사적 정황의 진실은 알 길이 없으나, 하여튼 예수운동을 조사하기 위하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몇 명이 예루살렘으로부터 갈릴리에로 파견되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유대지방의 정통파 이스라엘사람들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장로들의 유구한 전통을 고수하는 전통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문서화된 토라 외로도 구전으로 내려오는 자질구레한 토라규정을 정확히 지키는 사람들이다. 이 구전은 AD 200년경에나 내려와서 미쉬나(Mishnah)로서 기록되었지만, 예수시대에도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아주 생생하게 살아있던 율법이었다. 이 미쉬나의 주요한 테마 중의 하나가 바로 정결(Tohoroth, ‘cleannesses’)이었다.

 

예수는 갈릴리 사람이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갈릴리사람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유대지방 사람들(=유대인)처럼 이스라엘 장로들의 유구한 전통을 고수하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는 당대 헬레니즘사회를 방랑하던 견유학파의 사람과도 같은 별난사람이다. 예수는 탐식가요, 술주정뱅이요, 세리들과 부랑자들의 친구’(7:34, 11:19; Q26) 라는 소리를 들었던 매우 격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천국운동은 인간의 내면의 혁명이었지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것과도 같은 율법운동이 아니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율법이 강요하는 생활의 세세한 준칙에 관해서 별다른 관심이 있을 수 없었다.

 

당대 팔레스타인 전체 문명권에 있어서도 유대인들은 별종에 속했다. 그들의 행동은 유별나게 무엇이든지 씻는다는 것이었다. 여기 마가 7장의 기술에서 당대의 문명의 상식으로 볼 때, 실상 이상한 측은 갈릴리사람들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 그들의 유별나게 씻어대는 습관은 예수나 예수 도반들에게 오히려 매우 낯선 것이었다. 여기 씻음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위생(hygiene)’의 행위가 아니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세균감염의 문제가 아니라, ‘제식적 정결(ceremonial purity)’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떠한 행위를 하든지 나의 몸과 내 몸이 닿는 제기들을 하나님 앞에서 정화(purification)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관점에서 보면 몸의 정화는 근원적으로 인간 내면의 문제였으며, 외면적인 씻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예수와 같은 거친 방랑자ㆍ고행자들에게 그러한 씻음’(일종의 시킴굿’)은 불필요한 사치였다. 이러한 전체적 문화충격 속에서 본 장을 료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병행하는 큐자료를 살펴보자!

 

 

(23:25~26) 화 있을진저! 외식(外飾)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들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11:37~41)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만찬 드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 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 하셨느냐? 41오직 그 그릇들 안에 있는 것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면, 보라,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병행은 39~40)

 

 

마태와 누가를 비교해보면 누가가 큐복음서의 원형을 더 잘 보존하고 있다.(I. Howard Marshall, NIGTC:Luke 491~2). 그리고 놀라웁게도 누가는 마태에 없는 도마의 제2절을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와 마태는 이 로기온의 전체적 성격을 바리새인과 율법사(서기관)에 대한 저주의 맥락에서 규정하고 있다. 큐 자료만 해도 그러한 성격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도마에는 그러한 맥락이 전혀 없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라는 복음서의 대립적 맥락은 예수시대에 예수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라기보다는 후대의 복음서 기자들의 드라마적 장치의 요소로서 강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앞서 76의 진주를 매입한 상인의 비유의 상황과 매우 비슷한 패턴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마태는 이라는 이원론적 요소를 당초부터 매우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외면의 위선적 수식에만 힘쓸 뿐, 내면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저주의 포커스를 선명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마태는 이미 매우 선명하게 해석된 언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비하면 누가는 그렇게 철저하게 이원적인 언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도마의 애매한 성격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76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누가는 구제라는 강렬한 테마를 도입시키고 있다. 그리고 도마에서는 안을 만드신 이겉을 만드신 이에 선행하고 있는데, 누가에는 그 순서가 역으로 되어 있다.

 

도마와 마태-누가의 가장 큰 차이는, 외면과 내면을 이원적으로 대비시키고, 내면에 충실하면 외면의 외식은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만다는 단순한 논리(마태-누가의 경우)를 도마는 취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1절의 비판은 겉만을 씻으려 하는제식적 행위의 피상성(superficiality)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내면의 성실함을 대안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는 유대인들의 제식적 정화습관 전체를 본질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2절에서는 그 본질적 거부에 상응하는 본질적 인식, 즉 안과 밖의 이원성이 근원적으로 해소되는 어떤 다른 차원의 인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2에서 무어라 말했던가?: “너희들이 속을 겉과 같이 만들고, 또 겉을 속과 같이 만들고안을 만드신 이가 곧 겉을 만드신 이이다. 인간의 내면과 외면은 결코 분리가 되거나, 서로 소외될 수가 없는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근원적으로 하나된 박()을 인식하지 못하면 모든 정화와 관련된 제식은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

 

그러나 방랑하는 예수는 인간의 외면적 치장이나 제식에 관심이 극소했던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의 율법에 대한 거부는 바울의 경우와 같은 연역적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 이러한 라이프 스타일의 자연스러운 취향이었을 것이다. 구약이여 안녕!

 

 

으흐랄라 성 다니엘교회(the Church of St. Daniel)의 벽화.

예수는 엄마 마리아가 애통해하며 지켜보는 중에 십자가에 매달려 운명하였고, 엄마 마리아는 예수가 승천한 후에도 앞서 보낸 아들을 생각하면서 슬프게 살았다. 이제 기나긴 슬픔의 세월을 보낸 엄마 마리아가 이 땅의 삶을 마감하려 하고 있다. 오른쪽에 남편 요셉이 호곡하고 있고, 승천한 예수가 이번에는 땅에 내려와 상주(喪主)로서 엄마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다. 예수 왼쪽에 서있는 오라와 날개가 그려진 상은 가브리엘 천사의 모습이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예수의 수태를 고지했던 장본인이다. 지금은 예수가 엄마 마리아의 영혼을 가브리엘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옛 설화에도 일찍 죽은 아들이 엄마가 죽었을 때 다시 빈소에 나타나 통곡하는 것을 동네 사람들이 보았다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엄마 마리아에게는 가슴에 못을 박는 불효었다. 예수는 불효자로서 다시 나타나 어머니에게 마지막 효도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얼마나 눈물겨운 모습인가? 기독교는 우리가 알고있는 기독교가 전부가 아니다. 서구전통 속에서도 무한히 다양한 민간전승이 있었다. 그것을 다 묵살하고 오직 편협한 27서 정경전통만 살아남은 것이다. 초기기독교인들에게도 효()는 삶의 중요한 테마였다.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아나톨리아 하산다그 만년설 고원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벽화의 성스러운 이미지의 전율 속에서 나의 존재의 심연에 있는 엄마라는 절대자의 느낌이 떨림(미스테리움 트레멘둠)으로서 다가왔다. 오랜 시간 동안 멍하게 서서 이 성화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나의 눈시울에는 뜨거운 감격이 고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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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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