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디아테사론과 몬타니즘
콘스탄티누스 이후와 한 무제 이후
문명의 여로에 동ㆍ서를 막론하고 항상 종교는 있어 왔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말하는 데 있어서 최소한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예수를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공자(孔子)를 말하는 데 있어서도 우리는 한 무제 이후의 공자를 말해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도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예수나 한 무제 이후의 공자에 집착한다. 사실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예수는 예수가 아닌 로마 황제의 변형태다.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하나님 또한 하나님이 아닌 로마 황제의 변형태인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말대로,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하나님은 갈릴리지평을 완전히 상실하고 세 가지 이미지로 발전해나갔던 것이다.
그 첫째는 제국의 통치자로서의 이미지(God in the image of an imperial ruler)이며, 그 둘째는 도덕적 에너지의 구현체로서의 이미지(God in the image of a personification of moral energy)이며, 그 셋째는 궁극적 철학원리의 이미지(God in the image of an ultimate philosophical principle)이다. 첫째는 로마의 가이사이며, 둘째는 잔인한 도덕주의자이며, 셋째는 사동(使動)의 부동자(不動者)이다. 우리가 지금 논구하려는 하나님 예수의 갈릴리 지평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갈릴리 지평의 하나님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일까? 그것을 나는 사랑(Love)이라 부른다. 이 사랑이라는 주제는 본서의 자매편인 『요한복음강해』에서 자세히 설파될 것이다.
콘스탄틴 이후 발전해나간 예수의 이미지 | 제국의 통치자로서의 이미지(God in the image of an imperial ruler) | 로마의 가이사 |
도덕적 에너지의 구현체로서의 이미지(God in the image of a personification of moral energy) | 잔인한 도덕주의자 | |
궁극적 철학원리의 이미지(God in the image of an ultimate philosophical principle) | 사동(使動)의 부동자(不動者) |
단지 내가 오늘날의 기독교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신학의 성과가 일반신도들의 상식으로서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기독교교계는 황제적인 하나님-예수님의 권위에 의존하여 절대복종을 강요하거나, 성령을 빙자하여 일체의 건강한 합리적 사유를 차단시키는 졸렬한 행태에 의존하는 경향성이 있다. 그러한 성령은 이단의 발호만을 조장한다.
교황과 황제
아직도 가톨릭 교황청이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콘스탄티누스 이래로 축적된 로마 황제의 권위가 교황의 이미지와 오버랩되어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이미지는 우리 한민족에게 더욱 리얼하다. 불과 왕정에서 벗어난 것이 1세기도 안 되는 일천한 체험의 구조 속에서는 그러한 구속적 황제의 이미지에 대한 아이러니칼한 향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사회가 매우 급속히 민주화되고 개인주의화되고 자본주의화되고 강력한 지배자에 대한 향수가 근원적으로 붕괴되어가게 되면, 더구나 정보사회화의 급격한 진전이 수직적 사유를 근원적으로 해체시키는 경향성을 보이게 되면, 자연히 조선 왕조말기와 일제식민지하의 절박한 상황에서 요청되었던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정서가 같이 해체되는 위기상황이 초래될 것은 너무도 뻔한 이치이다.
그럴수록 종교의 역할이 증대될 수도 있다는 모든 역설적 논리는 자기위안의 마스터베이션밖에는 되지 않는다. 끓는 물 속에서 해체되어가는 얼음덩어리가 자신을 추스리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21세기에는, 인류의 불행한 과거 때문에 거저 먹었던 교황청의 수직적 하이어라키(Hierachy, 계층)의 권위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권위를 스스로 모색하지 않는 한, 급속히 해체되어갈 것이다. 21세기말의 바티칸이 현 영국왕실의 느낌 정도라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프로테스탄트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경향성에서 면제된다고 안도의 숨을 내쉴지 모르지만 기독교의 대세를 운운하자면 신교의 성세는 아직도 구교의 백본(backbone)에 의존하고 있다. 구교의 권위가 해체되면 신교도 오늘날의 성세를 유지하기 어렵다. 벌써 우리나라의 신교의 경우 그 숫자가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물리적 팽창이 과도했던 20세기에 비추어볼 때, 21세기의 전망은 결코 밝지만은 않다. 신ㆍ구를 막론하고 기독교가 21세기에 이 땅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복음의 본래적 지평으로 회귀하는 것이며, 교회사의 모든 권위로부터 성서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누가 해방시키고 안 시키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대세일 뿐이다.
디아테사론
4복음서의 체제는 언제 출현했는가? 요한복음만 해도 AD 150년 이전에는 그것이 존재했다는 확증을 던져주는 물리적 근거는 없다. 요한복음 18장의 몇 줄을 포함하고 있는 라일랜드 파피루스(Rylands Papyrus 457)나 요한복음을 참고했다고 사료되는 어떤 복음서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에게르톤 파피루스(Egerton Papyrus 2)가 모두 AD 15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AD 172년 경에는 디아테사론(Diatessaron)이라고 하는 4복음서체제가 출현하기에 이른다. 디아(dia)라는 말은 ‘통하여’(through)라는 말이다. 테사론(tessaron)이란 ‘넷’(four)이라는 뜻이다(속격), 마가복음 2:3의 ‘네 사람에게’라 할 때 쓰였던 단어다(요 11:17 등), 당시 디아테사론이란 음악용어였는데 네개의 다른 음부(音符)가 합쳐서 하나의 하모니를 이룬다는 뜻이었다. 사실 이 디아테사론이야말로 마르시온(Marcion, ?~160) 정경의 출현이래 기독교의 미래를 결정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2세기 중엽에 존재하는 성서콜렉션으로서는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정교하고 가장 정통적인 최고(最古)의 텍스트였다.
그리고 이 4복음서를 같이 모아서 하나의 화음을 낸다고 하는 발상 속에는 이미 깊은 성서신학적 철학이 들어있다. 서로 충돌되는 모순되고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4복음서를 한 데 묶었다는 데 기독교가 영원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정경화(canonization)의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다름(difference)이 없이는 조화(harmony)란 있을 수 없다. 다름이 없이는 같아짐도 있을 수 없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유앙겔리온을 한군데 모아 정경화 작업의 최초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데 디아테사론의 위대성이 있다.
20세기 성서신학의 최대성과 중의 하나인 양식사학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의 동일한 자료가 계속 다른 양식(form), 다른 삶의 자리(life setting)에서 출현한다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는 4복음서의 비교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이룩했다. 만약 기독교성서가 1복음서체제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은 악몽이었을 것이다. 4복음서의 충돌과 조화야말로 영원히 기독교를 가톨릭교회 도그마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성서적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타티안
디아테사론의 창출자는 타티안(Tatian, fl. 160~175)이라는 인물인데 나중에 결국 영지주의 이단으로 몰렸기 때문에 그의 활동에 관한 자료가 별로 없다. 우리에게 4복음서를 선사한 것도 영지주의적 선견지명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앗시리아의 땅, 유프라테스강의 동쪽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여지고 있는데 그는 시리아 사람이었을 것이다.
타티안의 여타 저술로서 『오라티오 아드 그라에코스(Oratio ad Graecos)』라는 책이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는데 그 속에는 그의 전기자료가 꽤 상세하게 들어있다. (참고서는 Molly Whittaker, ed., Oratio ad Graecos and Fragments, Oxford Early Christian Texts, Oxford: Clarendon, 1982.) 그는 세속적 권력이나 부, 모험, 그리고 성욕의 탐닉으로부터 초탈한 사람이었다. 동방에 있었던 그의 가정을 떠나(당시는 인도풍의 출가관습이 있었다), 서방으로 방황하면서 그는 다양한 철학학파 문하에서 공독하였다. 그러다 어느날, 그는 어떤 ‘야만적 저술’(barbarian writings)을 읽게 되었는데 그것은 ‘희랍철학의 이론들보다 더 오래된 것이고 더 성스러운 것’이었다. 그 야만적 저술이란 바로 셉츄아진트를 두고 한 말이었다. 타티안은 곧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로마로 가서 순교자 유스틴(Justin Martyr, AD 100~c.165)의 제자가 되었다.
스승 유스틴의 주장
유스틴은 150년경에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 161~180 재위) 황제에게 호소하는 『제1 아폴로지(First Apology)』를 저술하였는데 기독교를 옹호하는 호교론적 논문이었다. 그는 『제1 아폴로지』의 첫 부분에서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가 아니며, 로마 당국에 하등의 적대감정이 없다는 것을 웅변하였다. 기독교나 전통적 플라톤의 철학이나 모두 초월적이고 불변하는 하나님에 대한 열망의 산물일 뿐이며, 기독교신앙의 지적 언표는 로마사회의 모든 이성과 조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앙과 이성이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the divine mind)과 인간의 이성(human reason)이 하나로 상통되기 때문이다. 양자는 모두 로고스(Logos)라는 정체성(identity)을 가지고 있으며, 그 로고스성으로 인하여 사람은 우주, 시간, 창조, 자유, 인간의 영(human soul)과 하나님의 영(divine spirit)의 상통성, 그리고 선ㆍ악의 분별에 관한 매우 기본적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 로고스의 전체가 온전하게 육화된 사례이다. 그러나 이 신적 로고스는 예수 이전에도 이방인의 철학자들에게도 부분적으로 육화되어 나타났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이토스나 소크라테스도 동일한 로고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미 ‘크리스챤’(Christian)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세계로 오심은 그를 믿는 자에게 부분적 진리가 아닌 온전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함이며 인간을 악마의 권능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함이다.
유스틴은 또 바르 코크바 반란(132~135)을 겪고 피난해온 트리포라는 유대인과 쟁론한 것을 기록한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라는 논문을 저술하였는데, 그 속에서 자신의 개종의 내면적 스토리를 길게 서술한 후에, 기독교인들이 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기독교야말로 새로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참다운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한다. 이 새로운 약속, 즉 신약(新約)은 가슴의 종교(religion of the heart)이며, 제사, 안식일의 준수, 단식, 금식, 할례를 요구하는 낡은 종교를 이미 대체시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영원한 도덕적 율법을 지킬 뿐이며, 마음이 완악해지고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처방내려진 유대민족의 제식적 형식적 율법을 이제 따를 필요가 없어졌다고 주장한다.
이성과 신앙의 이분법은 이단이요 오류다
이러한 유스틴의 주장 속에서 우리는 이미 유스틴이 요한의 제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얼마나 요한복음의 사상이 2세기의 교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지를 쉽게 감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유스틴의 제자인 타티안이 디아테사론, 즉 4복음서체제를 구상하게 된 것도 요한복음의 구도와 사상체계 속에서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쟁론 속에서 2세기 초기기독교의 자유로운 사유의 건강성을 감지할 수가 있다. 즉 신앙과 이성을 근원적으로 이원화시키지 않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신앙과 이성을 이원화시키고 암암리 이성을 신앙에 종속시키고, 은총의 빛(lumen grātiae)을 이성의 빛의 상위에 두는 것은 모두 중세 스콜라철학의 장난이다. 기독교의 복음의 진리로써 인간의 이성을 발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 신앙의 질곡 속에 인간의 이성을 질식시키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편리한 이론적 장치로서 그러한 대립적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영ㆍ육의 대립이란 도덕적으로 의미있을 수 있을지라도,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심령 속에 이성과 신앙의 이분이 허락될 수 있단 말인가?
21세기의 기독교는 이성과 신앙의 이분법을 완벽하게 타파해버려야 한다. 이성의 훈련이 심화되면 될수록 심오한 신앙이 발현될 수 있는 종교로서 다시(re-) 형성되어야(formed) 한다. 그것은 복음의 본래적 지평 위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는 그 본래적(本來的) 지평을 애써 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신앙의 모든 요소는 이성적으로 설명가능하다. 결단의 벼랑까지 인간을 몰고가는 것은 이성이지 맹목적 신앙이 아니다. 결단의 벼랑까지 우리는 장님처럼 끌려가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끄는 놈이나 끌리는 자나 다같이 자멸할 뿐이다. 우리나라의 신학대학교의 커리큐럼들이 전면 개편되어야 한다. 뜻있는 신학자, 신학대학교수들, 학생들 모두 그러한 개혁을 요구해야 한다. 모든 교단도 끊임없이 자기쇄신의 용단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은 이단의 용인이 아니라, 정통신학을 어떻게 보다 개방적 정보의 공간 속에서 확보하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다.
유스틴(저스틴으로도 읽음)은 당대 견유학파(Cynicism)의 크레센스(the Cynic Crescens)와 쟁론을 벌이곤 했는데 크레센스가 그를 배반하여 죽음으로 휘몰았다. 율법이 요구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을 강요당하자 그는 이렇게 외쳤다. “어떻게 올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경건에서 불경으로 변절할 수 있겠는가?” 그의 목에는 칼날이 떨어졌다.
▲ <토마스 아퀴나스의 승리>라는 그림. 중앙에 앉은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이고, 밑에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이슬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아베로에스이다.
몬타니즘과 평창동 휴거파
유스틴이 죽고난 후 타티안은 로마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고 축출되었다(AD 172), 그 이유는 그가 엔크라타이트의 멤버이며, 영지주의 사상가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추종자라는 것이었다. 엔크라타이트(Encratite)란 시리아의 금욕주의 크리스챤종단(an ascetic Christian sect)을 말하는데 ‘극기’ ‘절제’ ‘금욕’을 의미하는 희랍어 엔크라테이아(enkrateia)에서 종단 이름이 생겨났다. 이 종파 사람들은 결혼을 피했으며(독신주의), 육식을 금했고, 술이나 취기를 불러일으키는 어떠한 음료도 거부했다. 그들은 성찬식에서도 술을 쓰지 않고 우유나 물로 대치했다.
타티안은 로마에서 축출된 후 고향인 시리아로 돌아갔다. 그의 가르침은 동방세계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디아테사론은 5세기까지 시리아 교회에서 널리 쓰였다.
2세기 중엽 마르시온(Marcion, ?~160) 정경이 성립하고 디아테사론이 만들어지는 그 시기에 우리가 또 기억해야 할 매우 광렬하게 영적인 운동이 있다. 그 운동의 시조 몬타누스(Montanus)의 이름을 따서 몬타니즘(Montanism)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몇 년 몇 월 몇 일에 휴거가 일어나리라고 선포하면서 광렬하게 목청이 찢어지라고 방언을 외치는 가운데 세계 매스컴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평창동의 휴거파들을 연상하면 대강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소아시아에서 AD 156/7년경에 시작했지만, 그 유명한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us, c. 155/160~220 후)가 한때 몬타니즘의 열렬한 대변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몬타니즘도 그 비방자들에 의하여 그려지는 그림처럼 그렇게 저열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초기 기독교 교단이 이스태블리쉬(establishment, 질서) 되어가면서 사도시대의 뜨거운 성령과 열렬한 파루시아에의 기대와 번뜩이던 광채를 상실하고, 도덕적인 해이감에 지배당하는 현상을 거부하고, 강렬한 예언과 방언과 재림과 성령과 도덕적 엄격주의(moral rigorism)을 제창하면서 그 나름대로 일대 타격을 가하고 나온 성령부흥운동이었던 것이다.
리고리즘(rigorism)
테르툴리아누스가 이들에게 매력을 느낀 것도 당대 교회의 도덕적 해이를 비판하는 엄격주의였다. 이들의 주장이 사실상 초대교회의 오리지날한 성격에서 이탈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기가 매우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위험한 운동이었다. 몬타누스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자기 운동의 근거로 삼았다. 그리고 외쳤다. “나는 아버지요, 나는 아들이요, 나는 보혜사이다.”(I am the Father and I am the Son and I am the Paraclete.) 몬타누스운동에 또 두 여자 선지자 프리스킬라(Priscilla)와 막시밀라(Maximilla)가 가담했다. 이들은 남편을 떠났고 금욕주의를 실천하면서 황홀경에 이르면서 방언과 예언을 일삼았으며 자기들이 사람으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셔서 자기들의 혓바닥을 놀리게 만든다고 했다. 그들은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으며 곧 소아시아 프리기아(Phrygia) 지방의 페푸자(Pepuza) 마을에 하늘의 예루살렘이 강림할 것이니 그리로 모이라고 예언했다.
성령주의, 재림주의, 금욕주의의 야만성
실제로 동방교회의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페푸자로 모여들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결혼을 금지시켰고(독신생활), 육식을 폐지했으며, 세상의 모든 것과 절연하고 몸을 정화시킬 것을 명했으며, 그리고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정교하게 단식하는 법식을 가르쳤다. 그리고 성찬식에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한돌 짜리 아이를 희생으로 썼다. 1살 아기의 몸에 수없이 바늘을 찔러 거기에서 나오는 핏방울들을 모아 빵과 함께 먹었다. 문자 그대로 그것이 예수의 로고스(Logos)가 성찬 참여자의 몸에 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순교를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으로 장려했고, 몬타누스 자신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매달아 자살했다. 세 지도자 중에서 막시밀라라는 여자 예언자가 마지막으로 179년에 죽었는데 다음과 같은 신탁의 예언을 남겼다.
나 이후로는 더 이상의 선지자가 없을 것이며, 오로지 이 세상의 끝날만 있을 것이다.
After me there will be no further prophet but only the end.
그러나 끝날은 오지 않았다. 몬타니즘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에까지도 5세기까지 강력한 세력으로 존속했다. 몬타니즘은 광렬한 성령주의, 끊임없이 재발하는 재림주의, 그리고 강렬한 금욕주의라고 하는 기독교의 감출 수 없는 한 단면을 보여주는 야만성의 영원한 상징이다.
몬타니즘의 부작용으로 정통로마교회에서는 요한복음에 대한 경각심이 생겨났다. 몬타누스의 모든 광란이 로고스 기독론의 문자적 해석으로 일어난 것이며, 그들의 광포한 성령주의가 요한복음이 말하는 보혜사(= 파라클레토스 = 성령)의 파견에 대한 예수의 예언의 실현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보혜사 문제에 관해서는 『요한복음강해』 389, 402, 407을 볼 것.)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4:26)
반몬타누스주의자들(anti-Montanists)은 로고스를 말하는 복음을 거부했다. 3세기초의 정통로마교회 장로인 가이우스(Gaius)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영지주의자들의 작품이라고 배척했다. 정통주의 신학자 이레나에우스(Irenaeus, 120/140~200/203 c.)도 그의 유명한 작품, 『반이단론(Adversus haereses, Against Heresiess)』(180년경 작품) 속에서 몬타니즘을 저주하는 사람들이 너무 과격하여 요한복음까지 배척하는 것은 매우 유감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하여튼 요한복음이 결국 영적인 복음(euanggelion pneumatikon)으로서 이레나에우스, 테르툴리아누스, 클레멘트 등 주요한 교부들의 노력에 의하여 정경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긴 했지만, 그 복음 자체의 수난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부록: 초대교회의 상상력
▲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소장의 AD 3세기 로마동전. 터키의 프리기아 지방의 도시인 아파메이아 키보토스(Apameia Kibotos)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커뮤니티에서 사용되었던 동전이다. ‘키보토스’라는 말 자체가 희랍어로 ‘방주’(ark)라는 뜻이다. 고대의 노아방주의 그림은 방주모양이 성냥갑같은 박스로 나타난다. 박스의 한 가운데 희랍어로 NΩE(노아)라고 쓰여져 있다. 밑바닥의 갈비살이 드러난 것은 물이 빠진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방주 앞으로 노아와 노아부인이 땅을 디디고 나와서 손을 들어 야훼께 경배하고 있다. 방주 위에는 감람산에서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날아온 비둘기가 앉아 있다.
▲ 로마, 베드로 마르첼리누스 카타콤(the catacombs of Saints Peter and Marcellinus)의 벽에 있는 프레스코 그림이다. 이것도 역시 위에 있는 동전과도 같은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노아의 방주가 우리나라 뒤주나 큰 함처럼 생겼다. 위로 뚜껑을 열고 사람이 나온다. 위에 비둘기가 올리브가지를 부리에 물고 나타난 것으로 보아 물이 빠진 후 노아가 기쁨을 나타내는 그림임이 분명하다(창 8:11), 그러나 여기의 이미지는 실상 노아가 아닌 예수다. 궤짝 밑에 뭉게구름 같이 그린 이미지는 홍수의 격렬함을 상징한다. 홍수에 쓸리는 이미지는 초대교회의 핍박받는 상황을 나타낸다. 카타콤에서 이것을 그린 사람들은 이 핍박의 물결이다 지나가고 예수가 노아처럼 나타나서 구원의 기쁨을 선포해주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예수와 노아의 연상은 복음서에도 명료하게 제시되었다.(마 24:37~39, 눅 17:26~27)
이 그림으로 우리는 초대교회 크리스챤들의 절망과 희망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죄악의 세계가 홍수처럼 휩쓸려 지나가버릴 것이라는 종말론적 기대도 읽어낼 수 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의 상상력은 자유롭고 소박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바로 이러한 상상력이 그들의 실제적 성경이었던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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