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장
너희는 하늘과 땅의 표정을 읽을 줄 알면서 너희 앞에 서있는 나를 모르느냐?
제91장
1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을 믿고자 하오니, 당신이 과연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말하여 주소서.” 2그께서 그들에게 가라사대, “너희는 하늘과 땅의 표정을 읽을 줄 알면서 너희 면전에 서있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러니까 너희는 바로 이 순간을 읽을 줄을 알지 못하는도다.”
1They said to him, “Tell us who you are so that we may believe in you.” 2He said to them, “You read the face of heaven and earth, but you have not come to recognize the one who is in your presence, and you do not know how to read this moment.”
본 장도 큐복음서(Q59)에 병행한다.
(마 16:1~3)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징표를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는도다. 너희가 하늘의 현상은 분변할 줄 알면서 어찌하여 이 시대의 징표는 분변할 줄 모르느냐?”
(눅 12:54~56)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너희 외식하는 자들이여! 너희가 하늘과 땅의 기상(氣象)은 분변(分辨)할 줄을 알면서 어찌하여 지금 이 시대를 분변하는 것은 알지 못하느냐?”
도마와 누가-마태자료를 비교해보면 도마의 의미도 선명하게 드러남과 동시에, 얼마나 정경복음서들이 도마자료를 종말론적으로 변형시켜갔는가 하는 것을 역력하게 관찰할 수 있다. 마태와 누가를 비교해보면 큐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은 누가쪽이다. 그리고 도마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도 누가자료이다.
하늘과 땅에서 나타나는 기상학적 현상으로써 미래에 일어날 일을 판단하는 것은 일종의 과학적 사유의 원형이다. 반복되는 경험의 사례를 귀납하여 일반화된 판단에 도달하고, 그러한 판단으로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다. 그러한 예측을 할 수 있는 이성의 소유자가 어찌 물리적인 사태만을 추론하고 어찌 가장 중요한 ‘이 시대의 징표’를 분변치 못하는가? 도마의 ‘이 순간을 읽다’가 누가에서는 ‘이 시대를 분변하다’로 변했고, 그것이 또다시 마태에서는 ‘이 시대의 징표를 분변하다’로 변했다. 누가만 해도 ‘이 시대를 분변한다’는 것이 명백하게 종말의 때를 알아차린다는 뜻으로 해석될 필요까지는 없다. 큐자료의 원형이 꼭 종말론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명백하게 종말론적 함의의 맥락 속에서 이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
도마에서는 질문자들이 불특정의 다수로 나타난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라는 특정화는 마태의 첨가일 뿐이다. 군중들은 항상 예수의 아이덴티티에 관심이 있다. 예수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예수 자신의 계시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군중들의 질문 속에 이미 예수의 대답의 구조가 들어있다. 군중들은 예수의 계시를 통하여 예수에 대한 신앙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군중의 소망은 ‘타력신앙’적인 발상이다. ‘우리가 당신을 믿고자 하오니, 당신이 과연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말하여 주소서.’ 예수는 계시도 거부하고 신앙도 거부한다. 예수가 말하는 계시는 예수의 입을 통하여 올 수가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예수처럼 자기 스스로의 입을 통하여 계시하는 모습은 저차원적 예수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예수의 자기계시는 독단이며 신앙의 강요이다. 자기계시는 오도(誤導)를 유발한다.
계시는 ‘하늘과 땅의 표정을 읽을 줄 아는 것’과도 같이 평범한 객관적 사태를 파악할 줄 아는 범인들의 이성적 능력 속에 이미 내재하는 것이다. ‘읽는다(peirao)’는 것은 시험하고, 조사하고, 탐구하고, 체험하는 것이다【메이어는 ‘to examine’이라는 동사를 썼다】. 그러니까 하늘과 땅의 기상과도 같은 사태를 파악하여 일반화된 명제에 도달할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한 인간이라면, 당연히 너희 면전에 서있는 그 사람, 나 살아있는 예수를 인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하늘과 땅의 표정을 읽을 줄 알면서 너희 면전에 서있는 나 예수를 읽지 못한다. 그리고 나에게 나의 아이덴티티를 계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얼마나 슬픈 일인가!
여기 우리는 도마복음의 출발점이 ‘살아있는 예수의 은밀한 말씀들’이었다는 사실을(Th.서장)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여기의 예수는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살아있는 예수다. 부활한 예수가 아니라 오늘 여기 현존하는 예수다. ‘살아있음’은 ‘현존성’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 살아있는 예수는 바로 우리 추구하는 자들의 면전에 서있는 현재 그 시점의 예수이다. 그 예수는 예수의 입을 통하여서도 규정될 수 없는 예수이다. ‘너희는 바로 이 순간을 읽을 줄을 알지 못하는도다!’ 이 순간의 대상은 마태가 말하는 ‘시대의 징표’가 아니라 예수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아이덴티티는 오직 추구하는 자들 내면의 아이덴티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 예수의 로기온에 깊게 배어있는 사상은 바로 참된 앎은 ‘현존의 즉각성’에 있다는 것이다. 그 즉각성은 언어적 규정이 아니라 직감이며 당장의 총체적 깨달음이다. 그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언어를 통하여서는 오묘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선적 사상】의 세계이며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의 세계이다. 도를 도라고 언어적으로 규정하면 바로 이 순간의 현존하는 살아 생동하는 도는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본 장의 로기온을 서구의 주석가들은 해석하지 못한다. 역사적 예수의 동방적 사유의 본체를 꿰뚫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 장은 누가 봐도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아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읽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너희 면전에 서있는 그 사람을 아는 것이다. ‘그 사람’이 꼭 역사적 한 개체였던 갈릴리의 예수라는 사나이일 필요는 없다. 나의 실존의 면전에 서있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예수를 알 수 있는 길은 영원히 열리지 않는다. 모든 계시는 우리를 신앙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내재하는 현존의 직관으로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 직관은 우리에게 확신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의문 속에 엄존하는 살아있는 그 사람이다. 회의의 차단은 모든 사교(邪敎)의 특징이다.
예수는 자기에게로의 신앙을 거부한다. 예수는 믿음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오로지 예수의 말씀만이 해석과 깨달음의 대상이다. 이러한 예수를 바울은 철저히 믿음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예수라는 존재를 우리 죄의 대속의 주체로 규정해놓고, 그 존재의 규정성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권유한다. 이렇게 예수에 대한 믿음이 기독교의 핵심테마가 되면 실제로 예수의 말씀은 사라지게 된다. 말씀은 신앙을 촉매하는 부수적 위치로 전락하게 된다. 도마전통은 이러한 바울전통과 대립하는 강력한 사상줄기를 형성했다. 그래서 믿음을 거부하고 말씀의 일차적 중요성을 말한다. 그런데 말씀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예수의 살아있는 말씀이었다. 이러한 도마전통에 대하여 바울전통을 강력히 리클레임한 새로운 운동이 바로 요한공동체의 로고스기독론이었다. 요한은 말씀 자체를 역사적 예수로부터 분리하여 하나님의 화신으로 만들었고, 그 말씀을 바울이 말하는 전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실체화시킴으로써 기독론의 최종적 근거를 창출하였던 것이다.
▲ 나는 찾으러 가고 있었다. 히타이트제국의 지하도시 데린쿠유로 가는 길. 해발 1,150m 고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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