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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제86장 - 여우도 굴이 있는데 인간의 자식인 나는 머리 누일 곳도 없다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86장 - 여우도 굴이 있는데 인간의 자식인 나는 머리 누일 곳도 없다

건방진방랑자 2023. 3. 25.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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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여우도 굴이 있는데 인간의 자식인 나는 머리 누일 곳도 없다

 

 

86

1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는데, 2인간의 자식인 나는 머리를 뉘어 안식할 곳조차 없도다.”

1Jesus said, “Foxes have their dens and birds their nests, 2but the child of humankind has no place to lay his head and rest.”

 

 

큐복음서(Q27)와 병행한다.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으되 오직 인자(人子)는 머리를 누일 곳도 없다하시더라.

 

(9: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으되 오직 인자(人子)는 머리를 누일 곳도 없다하시더라.

 

 

마태와 누가가 동일하다. 큐자료를 변형없이 옮긴 것이다.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공관복음서에서 인자(人子)’라는 표현이 부활과 재림을 전제로 하는 종말론적 담론 속에서 많이 쓰였다는 것인데, 이 인자담론에 관한 복잡한 논의는, 신학논쟁에 맡겨놓기로 하고,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인자라는 표현은 공관복음서에 72번 나온다. 대개가 예수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는데, 이 인자담론은 인자의 지상에서의 사역ㆍ운명ㆍ수난예언과 관련된 그룹과 승천, 재림과 관련된 그룹, 두 종류로 나뉜다. 이 인자라는 표현이 메시아적 타이틀인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예수 자신이 쓴 용법인가, 복음서 기자들에게서 구체화된 용법인가 하는 문제가 항상 신학토론의 주제가 된다.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이 그것은 아람어에서 그냥 를 겸허하게 표현하는 말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왕이 자신을 부를 때 ()’, ‘과인(寡人)’이라 하여 자신을 객관화시킨다. 마찬가지로 예수도 경외와 겸허와 겸손을 나타내는 객관화되고 에두른 표현으로서 사람의 자식이라는 어법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부여 조차 불필요한 관용구적 어법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 확고한 사실은 도마의 맥락에는 그러한 공관복음서의 특수한 인자담론적 색채가 전적으로 탈색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자라고 하는 것은 단지 여우나 새와 같은 동물에 대비되는 인간 종자의 자식이라는 의미밖에는 없다. ‘인자는 본시 역사적 예수가 소박하게 자신을 지칭한 말이었을 것이나 후대 복음서 기자들의 종말론적 담론의 구조 속에서 좀 특수한 칭호로서 정형화되어 갔을 가능성이 높다. 여우나 새에 비하면 인간 종자의 자식은 더 고귀한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여우에게도 안락한 동굴이 있고 공중의 새에게도 쉴 수 있는 안온한 보금자리가 있는데 반하여 사람의 자식인 나에게는 머리 누일 곳조차 없다는 탄식은 예수의 실존적 현황에 관한 강렬한 대비의 언사이다. 이것은 42방랑하는 자와 관련된다.

 

그리고 큐자료와 비교해보면 도마에는 안식한다라는 말이 더 있다. 50, 60 등에서 보아왔듯이 도마에서 안식은 진리추구와 더불어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불교로 말하면 해탈에 가까운 종국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안식할 곳조차도 없다고 하는 예수의 독백 속에는 예수라는 존재의 특수성이 고백되어 있다. 이것은 해탈을 거부하는 보살적인 대승정신과도 상통한다. 예수에게는 끊임없는 방랑이 있을 뿐이며, 종국적인 안식도 없다. 그것이 예수의 실존이다.

 

노자는 말한다:

 

뭇 사람들은 희희낙락하여 衆人熙熙,
큰 소를 잡아 큰 잔치를 벌이는 것 같고, 如享太牢,
화사한 봄날에 누각에 오르는 것 같네. 如春登臺.
나 홀로 담담하도다! 我獨泊兮其未兆,
그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아니 함이
웃음 아직 터지지 않은 如嬰兒之未孩,
갓난아기 같네.
지치고 또 지쳤도다! 儽儽兮若無所歸.
돌아갈 곳조차 없도다!
뭇사람은 모두 남음이 있는데, 衆人皆有餘,
왜 나 홀로 이다지도 부족한 것 같은가? 而我獨若遺. 老子道德經二十章

 

그리고 숫타니파타속의 싯달타는 이와 같이 말한다.

 

 

소치는 사람 다니야가 말했다:

밥도 이미 다 지었고 우유도 다 짜놓았습니다.

마치강 언덕 부근에서 나는 처자와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나의 작은 집 지붕에는 이엉을 얹었고 불도 이미 지펴놓았습니다.

하늘이시여! 비를 내리고 싶으시면 내리소서.”

스승이 답하셨다:

나는 분노하는 적이 없고 마음의 끈질긴 미혹으로부터 벗어났소이다.

마치강 언덕 부근에서 하룻밤 길손이 되었구려.

나의 작은 집 지붕에는 이엇도 없혀져 있질 않고,

욕정의 불길도 남김없이 꺼져버렸소,

하늘이시여! 비를 내리고 싶으시면 내리소서.”

 

 

여기 밥을 지어놓았다(pakkodano)’분노하는 적이 없다(akkodano)’는 운이 맞는다. 그리고 우유를 짜놓았다(duddhakhīo)’마음의 끈질긴 미혹으로부터 벗어났다(vigatakhīo)’도 운을 타고 있다. 싯달타가 말하는 나의 작은 집은 싯달타의 을 상징한다. 여기 소치는 사람은 한 군데에서 정착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방랑하는 사람이다. 도마복음 42의 방랑자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안온한 보금자리가 있고 그 속에는 처자가 오순도순 불을 쬐고 있다. 그러나 싯달타는 하룻밤 길손일 뿐이다. 그의 집에는 지붕도 없다. 그래서 불도 다 꺼져버렸다. 지붕이 새니까 그 집 속에 있는 불길이 다 꺼져버린다는 것은 니르바나(nirvāṇam)’의 상징이다. ‘니르바나는 본시 번뇌의 불길이 다 꺼졌다[滅]는 뜻이다. 여기 예수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는데 나는 머리를 뉠 곳조차 없다고 말한 독백이나 마히강변의 싯달타의 독송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예수도 안식을 거부했고, 싯달타도 안식을 거부했다. 둘 다 욕정의 불길이 꺼진 방랑자였던 것이다.

 

 

 으흐랄라 당나귀 탄 일가족, 어린 예수와 엄마 마리아의 모습이 이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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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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