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90장 -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다스림은 부드럽다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90장 -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다스림은 부드럽다

건방진방랑자 2023. 3. 25. 17:04
728x90
반응형

 90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다스림은 부드럽다

 

 

90

1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에게로 오라!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다스림은 부드럽기 때문이니라. 2그리고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안식을 발견하리라.”

1Jesus said, “Come to me, for my yoke is easy and my reign is gentle, 2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selves.”

 

 

본 자료는 마태에만 있는 M자료와 병행한다. 마태는 도마를 매우 설명적으로 확대시켰다.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모든 자들아!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안식케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안식을 발견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니라.

 

 

마태자료는 도마자료에 비하여, 우선 수고하는 자들, 그리고 무거운 짐을 지는 모든 자들이라는 대상을 명료하게 지칭하고 있다. ‘수고하는 자들이란, 지친 자들이며 무거운 짐을 지는 자들또한 사회적으로 핍박받는 소외된 자들이다. ‘나에게로 오라는 외침은 마태에 있어서는 산상수훈과도 같은 천국 선포의 강렬한 언사이다. ‘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나에게로라는 표현은 1인칭 화자의 입술에서 밖에는 떨어질 수 없는 말이다. 의 초대를 받는 사람은 지혜롭고 학식이 높은 자들(the wise and learned)’이 아니라 지치고 무거운 짐진 자들(the weary and burdened)’이다. 나의 초대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거만한 자들의 만족감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에서도 멍에라는 개념은 어떤 권위에의 복속이라는 맥락에서 자주 쓰인다. 그것은 두 마리의 소 위에 얹어지는 것이며, , 복종, 비굴을 상징한다. 특히 나의 쉽고 가벼운 멍에라는 개념은 암암리 바리새인 율법의 어렵고 무거운 멍에라는 개념을 반사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의미맥락 구조 속에서는 안식이라는 의미는 결국 종말론적 안식(eschatological rest)’ 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도마에 있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안식을 발견하리라라는 구문이 마태에서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안식을 발견하리라라는 구문으로 바뀌어 있다. 역시 마태의 의미맥락은 종말론적 안식과 더불어 모든 개념들이 영성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의 의미맥락은 이러한 마태의 색깔 속에서 규정될 수 없다. 우선 나에게로 오라는 초대(invitation)는 특정한 대상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지치고 무거운 짐을 지는 영락한 소외계층에게만 발하는 초대장이 아닌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받을 수 있는 초대이다. 그것은 매우 보편주의적인 명제인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초대를 정당화할 수 있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다스림은 부드럽다.”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 지치고 무거운 짐지는 자들에게는 그 급선무가 멍에를 벗겨주는일일 것 같은데, 나의 멍에를 메라고 말하는 것일까? 여기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이 깃들어 있다.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멍에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불교에서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의 구분이 존재하지만,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는 한은 멍에를 멜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노자도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몸이 없다면, 도대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及吾無身, 音有何患]?” 멍에는 소가 밭가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삶 자체가 노동의 과정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멍에는 두 마리의 소가 같이 끌기 위한 것이다. 멍에는 더불어 같이 하는 노동을 상징한다.

 

여기 나의 다스림(reign)’으로 번역된 말은 나의 주인됨의미한다. 메이어는 ‘my mastery’라고 했고, 람브딘은 ‘my lordship’이라 했다. 멍에와 마찬가지로 주인이라는 말은, 인간은 어디엔가 소속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본 장은 매우 간결하지만 그 전체구조가 3단계의 논리적 맥락을 따라 이루어져 있다. 1단계는 나에게로의 초대이다. 2단계는 그 초대의 필연성을 입증하는 두 가지 이유이다. 그리고 제3단계는 그 초대를 수락했을 때 그 수락자들에게 수반되는 결과이다. 그 결과는 곧 안식이다.

 

여태까지 우리는 도마에 있어서 안식이라는 말의 특수한 의미를 탐구해왔다. 50에서는 아버지께서 나 속에 존재한다는 증표가 곧 운동이요, 안식이다라고 말했다. 안식은 운동의 계기인 동시에 운동의 목표이다. 여기 멍에와 안식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멍에를 지니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근원적으로 멍에를 메지 아니 하는 자에게는 안식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멍에가 인간을 죽음과 파멸로 이끄는 구약적 세계관, 질투와 징벌과 율법, 용서없는 권위주의에로의 복속을 강요하는 멍에라면 인간은 그러한 멍에를 메서는 아니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제시하는 멍에는 쉽고 편안하고 가벼운 멍에이다. 인간에게 날로 노동의 기쁨을 선사하는 멍에이다. 이러한 멍에를 진 자에게만 안식은 찾아온다. 그리고 그 안식은 예수를 위한 것도 아니요,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다. 바로 너 자신을 위한안식인 것이다. 이러한 안식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과 비슷한 개념이다. 이것을 종말론적 안식, 천당에서의 안식으로 해석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예수의 말은 어떠한 종교나 권위나 조직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오직 예수 도반들의 자각을 위한, 도반들 스스로를 위한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종말론적 맥락을 지니게 되면서 모두 어떤 권위주의에로의 복속을 의미하는 말로서 변질되었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다. 우리는 도마에서 항상 그 종말론에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진주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카파도키아 고원의 모습을 만들어 놓은 하산다그(hasandağ, 3268m)의 웅장한 모습, 새벽에 나는 발길을 재촉했다. 이 화산이 폭발하면서 넘친 용암이 부식하면서 기암군과 다양한 지형이 생겨난 것이다.

 

 

인용

목차

본문

성경

주제상관도표

기독교성서의 이해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