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명제: 종교는 제도가 아니다.
(고정불변의 실체)
그런데 사실 이러한 논의는 좀 피상적이다. 아직 우리의 논의가 ‘제도’라고 하는 것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질 못하기 때문이다. 제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유위적(有爲的) 세계의 총칭이다. 무위(無爲)란 스스로 그러한[자연(自然)] 것임에 반해 유위(有爲)란 인간이 만든다(man-made)고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도라는 것은 대개 약속(convention)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제도란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방편적으로 만들어 내는 모든 약속체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도 약속이고, 가정도 약속이고, 집도 하나의 약속이다. 그리고 학교도 약속이고, 입시도 약속이고, 선거도 약속이고, 정부부처조직도 약속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유지하기 위한 규율이나 규칙, 법률이나 율법 이 모두가 다 약속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의 체계에 있어서 우리가 흔히 사회제도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가장 본질적인 제도가 인간존재 그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 그 제도란 바로 ‘언어(言語)’라는 것이다. 언어야말로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본질적인 약속체계인 것이다. 언어는 분명, 인간이 만든 것이며, 인간존재의 내재적 절대적 조건이 아닌 외재적 사회적 규약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한에 있어서는 언어를 부정할 수가 없다. 오로지 홀로의 해탈을 추구하는 자에 있어서는 언어는 부정될 수 있지만, 사회적 삶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에게 언어는 필요불가결한 존재의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언어가 제도인 이상, 인간의 언어 또한 그것이 곧 종교가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제도가 곧 종교가 아니라면, 언어 또한 곧 종교가 아닌 것이다.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의 말씀이나, 불타의 말씀이 곧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나 절깐이 곧 종교가 아니라면 마찬가지로 예수의 말씀을 적어놓은 『성경』이나, 불타의 말씀을 적어놓은 불경이 곧 종교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결국 종교의 제도적 측면의 유지를 위해서 요구된 언어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의 설법시기와 장소를 AD 30~33년 갈릴리의 어느 시골로 잡는다고 한다면, 예수의 말씀은 그 순간에 듣는 사람의 고막을 울리고 허공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너무도 상식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그 말씀을 문서로, 언어로 기록했다는 것은 이미 그것을 그렇게 가시적 형태로 보존했어야 할 어떤 제도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한 제도적 요구가 없었다면 『성경』이라는 언어체계는 존속했을 이유가 없다. 물론 『불경』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교회가 요구한 것이고, 『불경』은 절깐이 요구한 것이지, 교회가 있기 전에 『성경』이 있었고, 절깐이 있기 전에 『불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다. 교회ㆍ사찰이라는 종교제도의 발생 이전에는 오직 예수와 불타의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은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그 말씀대로 어떤 고정불변한 절대적 실체적 사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성경』이나 『불경』이야말로 종교의 가장 깊은 본질이라고 생각해온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이러한 논리는 너무도 급작스레 짧은 지면에서 직언(直言)되기 때문에, 의아스럽거나 충격으로 와 닿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다.
『원불교교전』이 20세기 초를 산 전라도인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이라는 각자(覺者)의 말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또 『원불교교전』의 성립이 원불교라는 종단의 성립 이후의 사건이라는 사실 또한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원불교교전의 성립은 원불교라는 사회적 제도의 자내적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교전』 편찬내용이 역사적 제도적 요구의 변천에 따라 변천되어가는 것 또한 아주 평범하고 진실한 사실이다. 불교나 기독교나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교전』 이전에는 오로지 초기집단을 구성한 인간들의 행위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행위는 말로 다 나타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의 언어적(제도적) 측면을 총칭하여 ‘교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교리가 곧 종교는 아니다. 불교의 교리가 곧 종교(불교)가 아니며, 기독교의 교리가 곧 종교(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교리(敎理)란 곧 교(敎)의 리(理)요, 교의 리란 곧 교회조직이 요구한 리인 것이다. 교회가 없다면 교리가 필요할 이치가 없는 것이다. 교리는 어느 경우에도 종교가 아닌 것이다. 교리는 종교가 요구하는 제도가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는 반드시 종교조직이라는 이해관계와 얽혀있다. 인간의 사회조직이라는 것은 이해가 발생시키는 배타관계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리는 인간세의 이해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여 온 인류의 종교사는 바로 이 교리간의 충돌과 분쟁의 역사인 것이다. 그것은 제도적 이해 관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도 화평한 듯이 보이는 깊은 종교심성의 인도인들이건만 항상 종교분쟁으로 나라가 갈라지고 지도자의 암살과 전쟁과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모두 이 교리간의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종교를 곧바로 교리라고 이해한다면 종교는 중상, 모략, 전쟁, 질투, 암살, 음모, 살상, 등등의 단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죄악을 저질러온 것이 바로 종교요, 종교간의 분쟁인 것이다. 인간세의 전쟁의 대부분의 명분이 바로 이 종교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종교란 곧 교리인 것이다. 그것은 제도화된 종교(institutionalized religion)를 말하는 것이다. 종교는 분명 교리와 더불어 존립(存立)한다. 그러나 종교는 분명 교리 이전의 그 무엇이다. 종교는 교리 이전의 그 무엇이 아니면 아니 되는 것이다.
종교를 교리라고 이해하게 되면 다른 종교를 가진 아버지와 아들이 싸움을 하게 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반목하게 될 뿐이요, 더 크게는 나라와 나라가 전쟁하게 될 뿐인 것이다. 종교는 분명 교리가 아니다. 이것은 제도가 곧 종교일 수가 없다고 하는 나의 논의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다. 『성경』도 『불경』도 거시적으로는 모두 교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경(經)에서 종교를 찾는다고 하는 생각은 가장 진실된 생각 같지만 실상 그것은 종교의 본질을 영원히 꿰뚫어볼 수 없는 우매한 자들의 유치한 소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경(經)의 그릇된 절대성을 유포한 민족이 바로 유대민족이요, 유대민족의 그러한 종교문화는 그들의 민족사적 특수 상황과 운명에서 기인된 것일 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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