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金剛經)』에 대하여
1. 선종의 대표경전으로 착각된 역사적 이유
조선의 불교는 『금강경(金剛經)』을 적통으로 한다라고 말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대장경(大藏經)』이라고 하는 거대한 바구니 속에 삼장(三藏)의 호한(浩瀚)한 경전이 즐비하지만, 우리 민중이 실제로 불교를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독송하고 암송하고 낭송하고 인용하는 소의경전을 꼽으라 하면 그 첫째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꼽히고, 그 둘째로 『금강경』이 꼽힌다.
우리나라 불교, 특히 우리에게서 가까운 조선왕조시대의 불교사, 그리고 오늘날의 한국불교를 이야기하면 임제(臨濟) 류의 선(禪)을 적통으로 하는 선종(禪宗)중심의 역사이고 보면, 선종에서 거의 유일하게 소의경전으로 삼는 것이 『금강경」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금강경』이야말로 선종의 기초경전인 것인 양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건대, 『금강경』과 선종은 역사적으로 일푼어치의 직접적 관련도 없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이 선종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금강경』에서 선종이 나온 것도 아니다. 선(禪)이란 본시, 중국의 당대(唐代)에나 내려와서, 이전의 일체(一切)의 교학불교를 부정하는 데서 생겨난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아주 래디칼한 토착적 운동이고 보면, 선(禪)은 문자(文字)로 쓰인 모든 경전을 부정하는 일종의 반불교(反佛敎)운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선은 불교라고 말하기보다는 중국인들의 어떤 시적(詩的) 영감(靈感, poetic inspiration)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선은 그 근본이 아나키스틱(무정부주의적)한 것이요, 따라서 물론 『금강경(金剛經)』도 선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되어야 할 교학불교의 대표경전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금강경』이 항상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마치 『금강경』이 선종의 대표경전인 양 착각되어온 소이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역사적 이유(historical reason)요, 그 하나는 논리적 이유(logical reason)다.
첫째로, 역사적 이유라 함은 중국선(中國禪)의 실제 개조(開祖)라 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인 혜능(慧能, 638~713)의 삶의 이야기와 『금강경』이 얽혀있다 함이다. 혜능의 전기적 자료로서 으뜸이라 할 『육조단경(六祖壇經)』과 『전등록(傳燈錄)』, 『지월록(指月錄)』등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성립한다.
혜능의 속성은 원래 노(盧)씨요, 그 본관은 범양(范陽)이었다. 그의 부친(父親), 행도(行瑫)는 무덕(武德) 연간에 좌천되어 영남(嶺南)으로 유배되어 신주(광동성廣東省, 신흥현新興縣)의 백성이 되었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3세 때에 그 부친이 돌아가신 것이다. 후에 혜능은 노모와 함께 남해(南海)로 이사갔고 거기서 밑창이 째지라 가난한 살림을 이끌게 되었다. 혜능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시장에 지게짐을 놓고 팔아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공부할 겨를이 없는 일자무식의 나무꾼 노동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어느 손님이 나무를 한 짐 사더니, 그 나무를 자기가 묵고 있는 여관까지 배달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혜능은 그 여관까지 다 배달을 해주고 그 손님에게서 돈을 받았다. 그리고 여관 문밖을 나서려는데 바로 문깐 방에 묵고 있던 어느 손님이 경(經)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 경전의 내용이 귀에 쏘옥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 경(經)이 바로 문제의 『금강경』이었고, 문제의 구절은 현금의 텍스트 제십분(第十分)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제오절(第五節)에 있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반드시 머무는 곳이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이라는 구절이었던 것이다. 나무꾼 혜능은 그 구절을 듣자마자 마음이 활짝 개이는 것 같았다.
“그 경(經)이 무슨 경이오?”
“『금강경(金剛經)』 이외다.”
“선생은 어디서 오셨길래 그런 훌륭한 경전을 가지고 계시오?”
“나는 기주(蘄州) 황매현(黃梅縣) 동풍모산(東馮母山=동산) 동선사(東禪寺)에서 왔소. 그곳에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께서 주석하고 계시면서 많은 사람을 감화하고 계신데, 그 문인(門人)이 일천 명이나 넘소, 내가 그 산에 가서 홍인대사님께 절을 하고 이 경을 받았소이다. 대사님께서는 항상 승속(僧俗)에 권하시기를 이 『금강경』만 몸에 지니고 있어도, 곧 스스로 견성(見性)할 것이요, 단박에 성불(成佛)하리라 하시었소.”
이 말을 들은 혜능은 그 자리에서 발연(勃然)하여 출가구법(出家求法)의 결심이 스는지라, 어느 손님에게 구걸하여 은십냥(銀十兩)을 얻었다. 그 돈으로 노모의 의복과 식량을 충당하고 노모에게 엎드려 하직하고 발길을 황매(黃梅)로 재촉하였던 것이다. 삼십여일(三十餘日)이 못되어 황매(黃梅)에 도착, 곧 오조(五祖) 홍인(弘忍)을 뵈올 수 있었다. 운운(云云) ……
이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사실인가 아닌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선가(禪家)의 개조(開祖)들이 소의경전으로서, 이 『금강경』이라는 경전을 중시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오조(五祖) 홍인(弘忍)이 『금강경(金剛經)』을 강설하였고,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출가(出家)의 동기가 바로 이 『금강경』에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혜능(慧能)이 득도성불(得道成佛)한 후에도 이 『금강경(金剛經)』을 계속 설파(說破)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금강경』과 선종은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혜능의 수제자인 하택신회(荷澤神會)는 아예, 오조(五祖)ㆍ육조(六祖)부터가 아니라 초조(初祖)인 달마(達磨)로부터 이 『금강경』을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서 전승하여 왔다고 못 박았다. 따라서 하택신회 이래, 신수계(神秀系)의 북종(北宗)이 『능가경(楞伽經)』【AD 400년경 성립한 대승경전, ‘능가’는 스리랑카의 ‘랑카"를 의미한다. 불타가 랑카섬에 강하하여 설파한 내용이라 함. 여래장과 아라야식을 통합】을 중시한데 비하여, 혜능계(慧能系)의 남종(南宗)에서는 『금강경(金剛經)』이 그 소의경(所依經)으로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 것이다.
둘째로, 논리적 이유라 함은 뭔 말인가? 선종의 출발이 역사적으로 8세기 초 중국에서라고 한다면, 『금강경』은 인도에서 대승불교의 초기에 성립한 산스크리트원전(범본梵本)의 존재가 확실한 경전으로, 그 성립시기를 학계에서 대강 AD 150~200년경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과 선(禪)은 최소한 500년 이상의 시간거리와, 인도와 중국이라는 문화적ㆍ지리적(공간적) 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금강경』을 그 자체로 독립된 단일 경전으로 흔히 오해할 수도 있지만, 『금강경』이란 원래 ‘반야경(般若經)’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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