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명제: 종교는 제도가 아니다.
(제도 속 종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가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절깐에 다니면 부처를 믿는다 하고, 나처럼 일요일날 교회도 아니 가고 절에도 아니 가면 예수도 안 믿고, 부처도 안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교회나 절깐에 가는 것을 예수 믿고 부처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극장 가면서 영화 믿는다고 하고, 식당 가면서 음식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근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영화야말로 나의 삶의 구원이요, 영화를 보는 행위 그 자체가 나의 삶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믿는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의 영화에 대한 특수한 믿음과 그의 극장 가는 행위가 전적으로 일치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한 일이다.
대강 ‘제도적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 개인 홀로만의 행위가 아니라, 개인들의 집단으로서의 행위를 전제로 한다. 대강 인간의 제도라는 것은 인간집단의 어떤 기능의 유지를 위하여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는 원래 인간 개인의 내면의 요구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고 또 궁극적으로 나의 내면의 구원이라든가 평온이라든가 해탈이라든가 고통의 벗어남이라든가 하는 매우 사적(私的)인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종교의 기능이 사회적 집단을 통한 대중적 행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원숭이나 고릴라도 꼭 떼지어 같이 살고, 나도 생각해보면, 혼자 있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 분명 인간은 사회적 군집생활을 하게 되어 있는 종자인 것 같다. 그러니 종교생활이라는 것도 자연히 군집생활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 같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인간의 사회생활의 제 형태 속에 내재하며, 그러한 사회적 형태의 존속을 위하여 필요하게 되는 제 요소, 예를 들면, 건물, 조직, 규약, 경제 등등의 요소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를 생각할 때 종교적 제도를 부인할 수는 없다. 불교를 생각할 때 절깐을 부인할 수 없고, 기독교를 생각할 때 교회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종교가 제도와 공존하고, 종교가 제도 속에 내재한다고 해서, 그 제도가 곧 종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에 있어서 희한한 인물이 한명 있다. 캄보디아라는 나라의 크메르혁명을 주도한 폴 포트(Pol Pot, 1925~98)라는 인물이다. 폴 포트라고 하면 흔히 ‘킬링필드’를 생각하고, 대규모의 인민학살과 잔혹하고 끔찍한 혁명극을 연상케 된다. 따라서 폴 포트하면 매우 냉혹하고 잔악하게 생긴 혁명가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폴 포트라는 인물은 개인적으로 만나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매우 인자하고 조용하고 온화하고 과묵하고 설득력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성장배경도 아주 유복한,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불란서유학을 했고, 사상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지식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1975년 4월에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정권을 장악하여 1979년 1월에 다시 월남군에 의하여 축출될 때까지, 자그마치 150만 명 이상의 자국민이 살상되었으며 20만 명 이상이 공식처형된 인류사에 그 유례를 보기 힘든 피의 역사를 남겼던 것이다.
그의 오류는 바로 이 인간세의 제도의 부정에 있었던 것이다. 『노자(老子)』 80장에 보면 ‘소국과민(小國寡民)’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그 곳에 ‘이웃 나라간에 닭소리ㆍ개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함이 없다’[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不相往來]라는 매우 목가적인 표현이 있는데, 아마도 폴 포트야말로 노자(老子)가 80장에서 설파한 ‘소국과민’의 농업주의적 평등사회(agrarian egalitarianism)를 극단적으로 실현하려 했던 과격한 이상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는 근본적으로 도시를 철폐해버렸다. 화폐를 없애버리고, 시장을 없애버리고, 학교를 없애버리고, 신문을 없애버리고, 종교를 없애버리고, 모든 사유재산을 없애버렸다. 그의 사고는 극단적인 반문명론적 해탈주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을 순박하고 무지한 원시적 농경사회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만이, 가장 원천적으로, 구조적으로 서양의 제국주의의 손길을 벗어나고 오염되지 않은 정결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판단이 원칙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원칙의 급격한 실현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요구를 위배한 것이다. 도시문명이라는 제도 그 자체가 인간이 수천 년을 걸쳐 구축해온 자연스러운 업(業)이었다. 그 업(業)의 부정이 폴 포트 자신의 해탈을 이루었을지는 몰라도, 수많은 국민을 기아와 질병과 공포의 아수라 속으로 몰아넣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교는 분명 제도 속에 있다. 그리고 제도 역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요구이다. 그러나 제도가 요청된다 해서, 제도가 곧 종교는 아니다. 제도는 종교를 질식시킨다. 제도는 어디까지나 종교의 방편일 뿐이다. 내가 절깐에 앉아있다고 곧 불교인일 수는 없으며, 내가 교회에 앉아있다고 곧 기독교인일 수는 없다. 제도가 곧 그 종교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기실 모든 종교의 역사는 제도와 반제도의 투쟁의 역사였던 것이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기존의 카톨릭 제도와 투쟁하는 새로운 반제도적 성령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주의의 승리는 또 새로운 제도로 고착된다. 그러면 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제도를 부정하는 새로운 성령주의가 탄생케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제도와 반제도의 변증법은 모든 종교사에 공통으로 구가되는 리듬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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