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명제: 종교는 제도가 아니다.
(유일교에로의 해답)
자아! 한번 다시 생각해보자! 종교란 믿음이 아니요, 종교란 하느님이 아니요, 종교란 제도도 아니다. 종교란 성경도 아니요, 말씀도 아니요, 교리도 아니요, 인간의 언어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종교란 무엇이란 말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바로 나는 여기에 대답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입을 열어서는 아니된다. 입을 여는 순간, 나는 ‘아닌’ 또 하나의 종교를 말해버리거나, 나 자신이 하나의 종교를 만들거나, 또 하나의 제도를 만드는 죄업(罪業)을 쌓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침묵한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여기 바로 내가 『금강경(金剛經)』을 설(說)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금강경』은 내가 발견한 유일한 종교에로의 해답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침묵할지어다. 구태여 나의 구업(口業)을 빌리지 않아도 『금강경』이 그 질문에 답할 것이다. 내가 말하면 그것은 나 김용옥의 소견(所見)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금강경』이란, 어떤 종교조직의 교리경전이라기보다는, 두 밀레니엄 동안 한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한강들에 가득찬 모래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여 온 진리체계인 것이다. 나의 설법은 나 개인의 독단이 되기 쉽다. 그러나 『금강경』의 설법은 그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역사의 축적된 진리의 기회가 설법하는 것이다. ‘나’는 침묵하지만, 『금강경』은 침묵하지 아니한다.
나는 불교의 교리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금강경(金剛經)』을 설(說)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키로 『금강경(金剛經)』은 불교를 말하는 경전이 아니다. 경(經)에 종교의 본질이 있지 아니하다고 말한 내가 어찌 『금강경』이 불교의 구극적 진리라 말할손가? 『금강경(金剛經)』은 불교를 말하지 아니한다. 그것은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유교든, 도교든, 모든 교(敎, 제도)를 통틀어 그 이전에 교(敎)가 소기했던 바의 가장 궁극적 진리에 대한 몇 가지 통찰을 설(說)하고 있을 뿐이다. 『금강경』은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통찰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나는 독자들이 『금강경』에서 그 해답을 발견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 나는 독자들이 『금강경』이 설(說)하는 몇몇의 통찰에 감입(感入)됨으로서, 불교도든, 기독교도이든, 이슬람교도이든, 유교도이든, 자기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성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답의 구성을 위하여 나는 『금강경(金剛經)』 이상의 좋은 레퍼런스(참고서)는 없다고 단언한다.
새로운 21세기의 인류의 과제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나는 말한다. 그 첫째가 자연과 인간의 슬기로운 공존(ecological concern)이요, 그 둘째가 모든 종교ㆍ이념간의 배타의 해소(religious coexistence)요, 그 세째가 학문의 생활화(The decompartmentalization of human intelligence)이다. 인간세의 화평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이 ‘종교’라는 문화현상이었다. 종교가 제각기 인류를 구원한다고 선포하면서, 종교야말로 인간의 죄악에 대한 평화로운 해결이라고 선전하면서, 종교야말로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원천이라고 선언하면서, 종교야말로 인류를 억압하고 대규모의 잔악한 살상을 자행하는 명분이 되었으며,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무지하게 만드는 모든 끔찍한 죄악의 온상이 되었으며, 질투와 배타와 저주의 원천이 되어왔다는 이 인류사의 파라독스야말로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무명(無明)의 소치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종교라는 제도를 말해서는 아니 된다. 이제 우리는 종교 그 자체를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다. 종교를 나의 주관적 믿음의 체계로서 접근하거나, 신의 권위나 이름으로 접근하거나, 제도나 규약의 이해로서 접근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서로 알목하고 배타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기만 할 수밖에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한다고 하는 종교가, 나의 마음에 화평을 가져온다고 하는 종교가, 나의 고통을 덜어준다고 하는 종교가 어찌하여 서로 알목하고 배타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해야만 하는가?
종교간의 배타의 문제에 오면, 우리는 대체적으로 불교도들보다는 기독교도들에게서 매우 강렬한 배타의식을 직면하게 된다. 나의 긍정이 타의 부정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생각이 그들의 ‘전도주의(Evangelism)’의 본질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기독교의 교리의 진정한 본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유대민족의 선민의식(Chosen People)의 연장태일 뿐이요, 유대민족의 선민의식이란 팔레스타인이나 이방민족과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유랑하는 유목민족의 역사적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후천적ㆍ문화적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파기되어야 할 ‘구약’, 즉 ‘옛 약속’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약’ 즉 ‘새로운 약속’이 아닌 것이다. 새로운 약속이란 나만 잘났다고 하는 선민의식의 파기에서 성립하는 보편주의적 사랑의 약속인 것이다. 신약의 약속은 유대인만을 위한 사도가 아닌 이방인을 위한 사도(Apostle for Gentiles), 바울을 통하여 만방에 전파된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더욱 희한한 사태는 만교(萬敎)를 통섭(統攝)해야 할 불교가 매우 배타적인 의식에 사로잡혀 간다는 것이다. 많은 스님들이 불교만이 구원과 해탈의 유일한 길이라고 아집상을 틀고 앉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배타주의적 환경과의 접촉에서 반사적으로 형성되어간 병폐라 할 수 있다. 내가 원광대학교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원불교도들과 많은 접촉을 가지게 되었고 또 깊은 이해를 하게 되었는데, 원불교도 애초에는 조선의 땅의 고유한 환경속에서 피어난 혁신불교운동이었다. 그런데 원불교에서 내가 가장 상찬(賞讚)하는 것은, 바로 그 핵심교리에 있어서 모든 교리의 포용, 인간세의 모든 종교와의 화해를 적극적으로 표방하고 또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잠(鯷岑)의 시골구석에서 태어났건만 그 생각의 포용성이 소박하면서도 세계의 여타 종교의 편협성을 뛰어넘는 면이 있다고 할 것이다.
배타(排他)는 결국 배자(排自)이다. 남을 배척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배척하는 것이요, 나를 배척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옹졸하고 졸렬하고 치졸하게 오그려 붙이는 것이다. 배타를 통해 나를 확장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성과를 거둘지 몰라도 결국은 나의 축소와 소멸을 초래할 뿐인 것이다. 20세기 동안 기독교는 조선땅에서 놀라운 확대의 일로를 걸었다. 그러한 확대는 ‘배타적 전도주의(exclusive evangelism)’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확산이 이제 축소의 일로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유기체의 법칙이다. 21세기 조선의 기독교는 결코 20세기의 팽창주의 추세를 유지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팽창주의적 확대만을 모색한다면 기독교는 이 땅에서 불운한 역방향의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배타에 배타로 맞서서는 아니 된다. 배타는 자기논리에 의하여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역사의 정칙이다. 배타에는, 수모가 따를지라도, 끊임없는 포용의 자세로 임할 것이다. 나는 이 나의 『금강경』 강해를 불교도가 듣기보다는, 기독교집안에서 자라난 편견 없는 많은 젊은이들이 들어주기를 바란다. 종교간의 갈등의 해소라는, 21세기 문명사적 과제상황의 근원적인 해결의 열쇠가 이 『금강경(金剛經)』, 속에 다소곳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만난 인도의 한 현자(賢者)의 말을 나는 생각한다:
‘종교란 본시 사람의 수만큼 각기 다른 종교가 필요한 것이지요. 종교에 대해 일원적인 논의를 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훌륭한 종교의 교사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제각기 다른 종교의 형태를 발견해주는 것입니다. 마치 옷이 사람마다 그 취향과 색감과 크기가 모두 다르듯이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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