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6바라밀
그런데 또 많은 사람들이 ‘반야경’이라는 말을 어떤 단일한 책의 이름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반야경이란 단권의 책이 아니요, 반야사상을 표방하는 일군(一群)의 책들에 붙여지는 일반명사인 것이다. 반야경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오는 책들은 한두 권이 아니다(한역漢譯된 것만도 42종). 그런데 반야사상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반야(prajñā)라는 것을 공통으로 표방하는, 기독교의 『신약성경』이 쓰여지기 시작한 1세기, 같은 시기에, 초기 불교승단에서 불꽃같이 타오른 새로운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아주 쉽게 말하면, 반야사상의 성립, 즉 반야경의 성립이 곧 대승불교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출발과 대승불교의 출발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언어문자권(희랍어-산스크리트어) 내에서, 아주 비슷한 혁신적 생각을 표방하면서 인류사에 등장한 일대종교(一大宗敎)운동이었던 것이다【요즈음의 세계사상계에서는 이 양대 종교운동을 같은 문화권 내에서 같은 사상축을 표방한 운동으로 본다】.
소승 아라한(arhan)에게 주어지는 실천덕목으로 원시불교의 팔정도(八正道)를 든다면, 대승보살(bodhisattva)에게 주어지는 실천덕목은 ‘육바라밀(六波羅蜜)’(육도六度)이라는 것이다. 이 6바라밀이란, 1) 보시(布施), 2)지계(持戒), 3)인욕(忍辱), 4)정진(精進), 5) 선정(禪定), 6)지혜(智慧)의 여섯 덕목을 말하는데, 앞의 5바라밀(前五波羅蜜)은 최후의 지혜 바라밀을 얻기 위한 준비수단으로서 요청되는 것이다. 바로 이 최후의 지혜바라밀, 즉 혜지의 완성, 그것을 우리가 반야(‘쁘라기냐’의 음역)라고 부르는 것이다. 바로 반야사상(=반야경의 성립)이란 최후의 바라밀, 즉 지혜바라밀을 통괄(統括)적으로 이해하면서 아주 새로운 혁신적 불교운동을 선포하기에 이른 일련의 흐름 전체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금강경』은 이 반야운동의 초기에 성립한, 반야바라밀사상을 완성(完成)시킨 결정체인 것이다.
1) ‘보시(布施)’란 요새말로 하면 ‘사랑’이요, ‘베품’이다.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눔’이다. 그렇다면 내가 만 원이 있기 때문에 천 원을 남에게 주면, 그것이 보시가 될까? 그럼 이천 원은 어떨까? 그럼 아예 만 원을 다 주면 어떨까? 아니 아예 남에게 꾸어다가 이만 원을 주면 어떨까? 길거리 지나가다 나보다 헐벗은 자가 있으면 내 옷을 다 벗어주고 가야할 텐데! 과연 나는 그러한 보시를 실천하고 있는가? 그럼 추운데 내 옷 다 벗어주고 빨개벗고 간다고 나는 보시를 과연 완성할 것인가?
2) ‘지계(持戒)’란 계율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 삶의 도덕성이요, 일정한 삶의 규율성이다. 그런데 시내에서 모처럼 친구를 만났는데 술 한잔은 어떠할까? 담배 두 가치는 너무해도 한 가치? 아니, 한 모금은 어떠할까? 조갑지에 꽉물리면 곤란해도 살짝 스치는 김에 담구었다 빼면 안될 것도 없다. 아니, 아예 그 물건을 작두로 짤라버리면 어떠할까? 계율을 완벽하게 지키시는 율사님의 사생활에는 과연 흠잡을 구멍이 없을까?
3) ‘인욕(忍辱)’이란 욕됨을 참는 것을 말한다. 욕됨을 참는다는 것은 ‘용서’를 의미한다. 나에게 욕을 퍼붓는 모든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원망이나 복수의 마음을 품어서는 아니 된다. 사실 우리 네 인생이라는 것은, 기독교의 교설을 빌리지 않아도, ‘참음’과 ‘용서함’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까지 참는가? 어디까지 용서하는가? 나를 죽이려 칼을 들고 덤비는 자에게 고스란히 창자를 내어주는 것이 인욕인가? 아니 너무 극단적 비유를 들지 않더라도, 잠결에 따꼼하게 물어대는 모기를 때려 죽여야 할까? 그대로 인욕해야 할까?
4) ‘정진(精進)’이란 올바른 삶의 방향으로 흔들림 없이 매진하는 것을 말한다. 오로지 구부림 없이 불도(佛道)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올바른 삶의 방향이란 말인가? 내가 정진하고 있는 가치관이 과연 최선의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서 받아야 할 것인가? 과연 무엇이 불도이며, 과연 무엇이 올바른 예수님의 가르침인가? 무엇이 과연 내가 정진해야 할 종교적 삶인가?
5) ‘선정(禪定)’이란 명상에 의한 정신의 집중과 통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도인이나 희랍인에게 공통된, 테오리아(theoria, 이론)적 삶의 가치관의 우위를 반영하는 덕목이다. 그러나 구태여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주목(注目)’ 즉 ‘어텐션(attention)’의 능력이 없는 삶은 결국 정신 분열의 삶이 되고 만다.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란 우리가 책을 보거나 대화를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강의를 듣거나 시험을 치거나, 모든 삶의 행위의 순간순간에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훈련을 인도인들은 ‘요가’라는 수행으로 정형화시켰고, 중국인들은 ‘조식(調息)’ ‘도인(導引)’으로 공부화시켰고, 그것은 후대 좌선(坐禪)이라는 갖가지 형태로 발전 정착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승려나 불자들이 ‘선’과 ‘좌선’을 일치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럼 ‘와선’은 어떠하고, ‘행(行)선’은 어떠하며 ‘처처사사(處處事事)선’은 어떠한가? 그렇다면 도대체 ‘선’이란 게 무엇이냐?
나는 동안거ㆍ하안거 결제를 100번이나 거쳤다. 어간에만 앉는 최고참 최상등자다! 그래, 그래서 그대는 성불(成佛)했는가? 뇌리피리 피죄죄한 얼굴이나 하고 앉아 지댓방조실의 소화(笑話)나 경청하고 있는 신세가 되질 않았는가? 과연 선정(禪定)이 성불(成佛)을 보장하는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의 다섯 바라밀은 종교생활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할 덕목임에 틀림없다. 사랑을 실천하며, 계율을 지키고, 참고 온유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진하는 생활을 하며, 고요히 명상하고 기도하는 생활, 불자(佛子)나 야소자(耶蘇子)나 가릴 바가 없는 덕목임에 틀림이 없다. 이 다섯 바라밀은 부파불교시절의 엄격한 많은 계율이 추상화되고 간략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 다섯 바라밀은 마지막 바라밀, 즉 지혜의 바라밀이 없이는 완성될 수가 없는 불완전한 덕목인 것이다. 아무리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을 완벽하게 해도, 그것이 지혜를 결(缺)할 때는, 형식주의적 불완전성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그럼 제육도(第六度), 즉 여섯 번째의 바라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반야 즉 지혜란 무엇인가? 바로 여기에 대한 대답이 곧 『금강경』이란 서물을 구성하는 것이다. 『금강경』은 곧 『금강반야바라밀경』의 약칭이며, 『금강경』이야말로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을 최초로 명료하게 규정한 대승운동의 본고장인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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