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현장의 신역
다음으로 내가 ‘논리적 이유’라 말한 뜻은 무엇인가? 논리적 이유라 함은, 비록 『금강경』의 성립과 선종(禪宗)의 성립 사이에 5ㆍ6세기의 시간이 가로놓여 있지만, 그리고 선종의 불립문자적 정신으로 볼 때, 『금강경』은 부정되어야 할 문자로 이루어진 초기경전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선종이 ‘불립문자(不立文字)ㆍ직지인심(直指人心)ㆍ견성성불(見性成佛)’등의 말을 통하여 표방하고자 하는 모든 논리적 가능성이, 아니, 정확하게는 논리 이전의 가능성이, 이미 『금강경』이라는 대승불교의 초기경전 속에 모두 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이라는 대승교학의 바이블은 비록 그것이 교학불교의 남상(濫觴)을 이루는 원천적인 권위경전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하나의 선(禪)이요, 가장 ‘선적인’ 경전으로 선사들에게 비추어졌던 것이다(The Diamond Sūtra is considered the Sanskrit work closest in spirit to the Zen approach, EB). 그러므로 이 『금강경』이야말로 대승불교의 최초의 운동이면서 최후의 말미적 가능성을 포섭하는 포괄적인 내용의 위대한 경전인 것이다. 『금강경』이야말로 대승불교 전사(全史)의 알파요 오메가다. 선종이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는 것은, 곧 선의 가능성이 초기불교운동 내에 이미 구조적으로 내장되어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며, 동시에 역으로 선(禪)이 반불교적(反佛敎的)임에도 불구하고, 대승운동의 초기 정신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역사적 정황을 잘 대변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처럼 사상의 폭이 넓은 불교경전이 없으며,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전불교사를 통하여 가장 많이 암송되고 낭송되고 독송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이 내재하는 것이다. 『금강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대승불교정신의 알파-오메가를 다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 경전이 소략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불교 전사(全史)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없이는 그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반야사상을 집대성한 기념비적 반야경으로서 우리는 현장(玄奘)이 칙명을 받들어 조역(詔譯)한 『대반야경(大般若經)』을 꼽는다【이것은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과는 별도의 책이므로 혼동치 말것】. 이 기념비적 반야경의 스케일은 대장경을 뒤적거리는 우리의 눈길을 경악으로 이끈다. 그것은 16회(十六會) 600권에 이르는 참으로 방대한 분량의 서물인 것이다. 이 방대한 분량의 『대반야경(大般若經)』을 뒤적거리다 보면, 제9회(第九會) 권제 577(卷第五百七十七)에서 「능단금강분(能斷金剛分)」이라는 한 챕터를 만나게 된다. 이 챕터에 실린 「능단금강분(能斷金剛分)」의 내용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금강경』과 일치하는 것이다. 『금강경』에 해당되는 「능단금강분(能斷金剛分)」은 지금 『대정대장경(大正大藏經)』의 편집체제로 불과 6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7/980~985). 그런데 『대반야경(大般若經)』 전체의 분량은 『대정(大正)』으로 세 책(5~7)에 해당되며, 그 페이지수는 자그만치 3,221쪽이나 되는 것이다. 3,221쪽의 분량의 방대한 서물【오늘날의 작은 활자본, 큰 판형의 서물기준이니까 이것을 한번 목판으로 계산해보라! 이 책 한 종만 해도 몇 만 장이 되겠는가?】의 6쪽에 해당되는, 즉 600권 중의 577권에 자리잡고 있는 서물이 바로 우리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이 『금강경』이라는 것이다. 그럼 『금강경』은 본시 『대반야경』의 한 권(卷)을 분립시킨 것인가?
그렇게는 말할 수 없다. 현장(玄奘)의 『대반야경』은 당(唐)나라 때, 660~663년 사이에 성립한 것으로, 그 내용은 실로 600년 이상에 걸친 반야사상운동의 표방경전들을 한 종으로 묶어 낸 것이며, 따라서 그 내용은 이전에 독립경전으로 존립(存立)하고 있었던 것이 대부분인 것이다. 그러면 현장의 『대반야경』 이전에 독립경전으로써 한역된 『금강경』이 있었는가? 물론 있다! 그럼 왜 현장(玄奘)은 그것을 구태여 다시 번역했는가?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쉬앤짱(玄奘, 602~664)이라고 하는 역사적 인물의, 『대반야경』을 위시하여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섭대승론(攝大乘論), 유식론(唯識論), 구사론(俱舍論) 76부(部) 1,347권(卷)에 이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 개인의 방대한 역경사업(62세밖에 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에 걸쳐 논의되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쉬앤짱의 문제의식은 중국한역불교(中國漢譯佛敎)의 격의적(格義的) 특색에 관한 비판적 검토로부터 출발한다. 한마디로 그의 문제의식은 한역불교의 모호함과 애매함에 대한 답답함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이런 종류의 고민과 비슷하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일본교사, 내지 그들에게 배운 사람들을 통하여 이해된 ‘서양철학’, 데카르트가 어떻구 칸트가 어쩌구 쇼펜하우어가 저쩌구하는데 도무지 모호하다. 그러지 말구, 직접 서양에 가서 그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사상 체계가 발생한 문화적 분위기를 익히고, 그 사람들을 알아보자! 그래서 유학을 간다! 직접 가서 알아보자! 그는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사람! 그가 살았던 시기는 수당교체의 난세(亂世)였다. 장안(長安)ㆍ성도(成都) 각지에서 스승을 구하고, 『열반경(涅樂經)』, 『섭대승론(攝大乘論)』, 소승(小乘)의 제론(諸論)에 통달(通達)했으나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몸소 직접 산스크리트 원전에 기초하여 그 뜻을 철저히 고구(考究)하고 싶은 학문적 열망으로 가득찬 27세의 청년, 독력(獨力)으로 만난(萬難)을 각오하고 장안(長安)을 출발하여 구도행(求道行)의 걸음을 내친 것이 정관(貞觀) 3년(629)! 간난신고를 무릅쓰며 신강성 북로를 뚫고, 서(西)투르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북(北)인도로 들어가 중(中)인도의 나란타사(那爛陀寺)에까지 이르렀다. 그곳에서 계현(戒賢, Śīlabhadra, 529~645)을 스승으로 모시고, 무착(無着)ㆍ세친계(世親系)의 유가유식(瑜伽唯識)의 교학(敎學)을 배웠다. 인도 각지의 불적(佛跡)을 방문하고, 불상(佛像)ㆍ불사리(佛舍利)를 비롯하여 범본(梵本)불경 657부(部)를 수집하여, 파미르고원을 넘고 천산남로남도(天山南路南道)를 통하여 장안(長安)에 도착한 것이 정관(貞觀) 19년(645)! 그의 나이 43세! 당태종(唐太宗)은 너무 기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62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19년 동안 홍복사(弘福寺), 자은사(慈恩寺), 옥화궁(玉華宮)에서 번역한 그 방대한 사업이 오늘 『대장경의 위용의 골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의 여행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가 명대(明代)에 희곡화(戱曲化)된 것이 바로 『서유기(西遊記)』!
배불(排佛)의 유교국가임을 자처하는 조선의 궁궐의 용마루 처마에도 그의 서유(西遊)의 소상(塑像)들이 나란히 서있고, 한때 우리 코메디 입담에도 ‘사오정’이 판을 치고 있는 실정, 그 위대한 법력을 어찌 내가 새삼 논구할 필요가 있으랴!
현장(玄奘)의 번역의 특징은 가급적인 한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충실하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음역도 가급적이면 원래의 발음에 충실하려 한다. 예를 들면, ‘samādhi’를 ‘삼매(三昧)’라 하고, ‘yojana’를 ‘유순(由旬)’으로, ‘sattva’를 ‘중생(衆生)’으로 번역하는 것으로 묵약되어 있었지만, 현장(玄奘)은 이를 모두 와류(訛謬)로 간주하고 ‘삼마지(三摩地)’, ‘유도나(踰闍那)’, ‘유정(有情)’으로 고친다. 발음과 의미를 모두 원어에 충실케 하려는 자세인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자수(字數)나 리듬에 얽매인 번역을 산문화시켜 상세히 연술(衍述)한다. 『금강경』의 경우 그 유명한 사상(四相)의 번역에 있어서도, ‘중생상(衆生相)’(sattva-samjñā)은 ‘유정상(有情想)’(정이 있는 자라는 생각)이 되어 버리고, 마지막의 ‘pudgala-samjñā’는 아예 ‘보특가라상(補特伽羅想)’으로 음역해버린다.
이러한 식의 현장(玄奘)의 번역을 우리는 중국역경사(中國譯經史)의 특수용어로서 ‘신역(新譯)’이라고 부르고, 현장 이전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고 부른다. ‘구역’의 대표로서 우리는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350~409년경)과 진체(眞諦, Paramārtha, 499~569)를 꼽는다. 그렇다면 대체적으로 신역이 구역보다 더 정확하고 우수한가? 반드시 그렇게 일괄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사계의 정론이다. 나 역시 신역이 구역의 아름다움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현장의 번역은 당나라 때의 국제적인 문화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 해야 할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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