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
01년 9월 16일(일) 매우 더움
오늘 교회에 가서 잠언 4장 20~23절 말씀으로 설교를 들었다.
내 아들아,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주의 깊게 들어라. 그것을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네 마음에 깊이 간직하라. 내 말은 깨닫는 자에게 생명이 되고 온 몸에 건강이 된다. 그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여기서부터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 현대인의 성경
이 구절의 핵심은 ‘모든 관념적 생각은 다 마음에서 나온다’라는 거였다. 원효대사의 명언, 그건 당연하다는 생각에 기반한 이야기다. 해골 바가지에 담겨진 물(썩은 육수)과 바가지에 담겨진 물(이슬), 둘 사이엔 엄청난 괴리가 숨어 있다. 썩은 육수는 감히 먹으려는 사람이 없을 테지만, 이슬은 감히 안 먹으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그 당시의 이슬은 일급 청정수였다). 하지만 해골바가지의 썩은 물을 바가지의 물로 오인해 버린다면 다 마시고 말 것이다. 그건 이를테면 굳어진 관념이고 그렇게 받아들인 주관이다. 그런 관념과 주관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맛있게 마실 수 있다. 그건 그 물이 진짜 맛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기인된 맛이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 그 관념과 주관이 잘못된 것을 알아버린 순간, 그렇게 맛있게 달았던 물은 사라지고 썩은 물만이 남기에 토해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 물의 나쁨이 일으킨 구토증상이 아니라 이미 소화가 다 되어버렸을 그 물을 마음이 그제야 수용할 수 없는 물질로 인식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도 모든 건 마음의 문제이다. 현실은 분명 한 가지 사실만을 내포하고 있지만 내 자신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한 가지 물에 대한 관념이 어떠냐에 따라 맑은 샘물일 수도, 썩은 물일 수도 있으니까.
군대의 현실, 그건 좋으나 싫으나 한가지다. 많이 버겁게 느껴져 힘들어 하든, 손쉽게 느껴져 편하게 생활하든, 다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지 결코 현실이 결정해주는 건 아니다. 마음을 다스려라 그러면 행복한 현실이 보인다, 생활이 즐거워진다.
하늘이 파랗고 땅은 노랗고 방벽은 연녹색이고 사람은 다들 이렇고 하는 것들, 현실적으로 규정지어진 것이 아닌 마음으로 정의된 것일 뿐이다(이건 헛소리……). 난 현실을 비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나 되물어보자. 이젠 모든 현실이 나에게 긍정적이다. 후임병들도 매우 많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내 생활이 한층 편해졌고 그로 인해 내 군관(軍觀)이 많이 정착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선임병들도 나에게 그렇게 많은 터치를 안 할 뿐 아니라 사수까지 서다 보니 근무 여건까지 개선되었다. 그럼에도 그냥 군에 대한 불만의 감정 때문에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
군관(軍觀): 사회와는 다른 이곳, 하지만 나는 이곳을 사회의 그곳처럼 만들고 싶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줄 수 있고, 윽박지르거나 갈구지 않는 곳으로……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다. 이곳은 계급과 계급이 존재하는 냉혹한 군대이지 이성이 존재하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11월에 대공근무를 현호와 명철이와 서고. 벌써 동계 외피를 입은 게 보인다.
철원의 가을
01년 9월 23일(일) 맑음
가을, 하늘이 드높은 천고마비의 계절. 모든 만물이 성숙의 절정에 이르는 계절. 그런 완숙미를 자랑하는 가을이 철원에도 오고 말았다. 그 추운, 매섭게 추운 겨울 뒤에 봄이 안 올 것만 같았는데, 모르는 사이에 녹색창연의 봄이 찾아왔듯이, 그 무덥고 짜증 나는 여름이 어느덧 흘러가고 가을이 오고야 말았다. 비록 이주일 정도 밖에 안 되지만 말이다.
대공 후방, 그러니까 우리 중대 뒤쪽으로 보이는 벌판에 녹색의 새싹들이 피어나는 걸 본 게 어제 같은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진짜 눈으로 미처 확인하지 못한 사이에 녹색 벌판이 황금물결 일렁이는 바다로 변해버린 것이다. 황금의 바다, 그건 작년 대학교 가는 길 벌판에 황금물결 일렁이는 것을 보고서 ‘자연은 어쨌든 이치를 따라 가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세월이 흘렀구나 하고 느끼기도 했고, 그렇게 순응해갈 수 있는 자연이 부럽기도 했다.
철원의 가을, 하늘은 무지 높고 철새의 끼룩끼룩 거리며 날아가는 소리와 함께 투입을 하고 근무를 선다. 그리고 밤이면 무수한 별과 별똥별이 있기에 자연의 새삼스런 놀라움을 하염없이 느끼기도 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철원은 생활하기엔 전혀 아니올시다 이지만 그냥 관광하거나 바람 쐬러 오기엔 딱 좋은 곳이 아닌가 싶다.
철새들의 대이동, 살기 위해 그 무거운, 어쩌면 부담스러울지도 모르는 그 무한의 날갯짓을 해가며 자기의 삶을 이어간다. 그건 흡사 훈련 중 행군을 해야만 하는 상황과 같지 않을까? 행군, 아픔이 오더라도 포기하고 싶더라도 그 한순간의 고통으로 쓰러질 순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를 이겨나가야만 결국 자기의 만족으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하게 되는 거지만, 고통과 아픔은 순간이란 거다. 요즘 연대종합전술훈련 평가로 계속 되는 준비태세로 힘겹고 짜증이 많이 났었다. 하지만 그땐 정말 죽을 맛이었지만, 지나고 보면 내가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니 말이다. 순간, 그 한 순간으로 내 인생을 망친다면 얼마나 어이 없는 행동이란 말인가? 마찬가지다. 그땐 쓰러지고 싶을지라도 지나고 보면 내가 해냈구나 하는 자기 만족이고 자기 위안이 될 뿐이다. 그러나 쓰러지게 된다면 한참을 두고 자기 자신을 탓할 것이며, 그 단체에서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로 낙인 찍힐 것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철새가 아득바득 그렇게 날아가려 하는 행동성을 본받자. 그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방식이다.
가을이 되면 모든 만물이 그 색을 달리하고 곧 있으면 다가올, 아니 철원엔 성큼 다가온 겨울의 기미를 느끼며 겨울을 준비한다. 가을을 나타내주는 온 대지에 쌓인 만색엽(萬色葉)들이 서서히 저물어가는 가을을 알려준다. 어느덧 다가올 겨울이겠지만 준비만 확실히 되면 무엇이 두려울까? 가을을 보며 난 이런 생각에 빠져봤다.
천고마비의 계절에
01년 9월 27일(목) 맑음
하늘이 드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 한마디로 자연이 가장 보기 좋게, 아름답게 변하고 모든 게 너무나 풍성한 계절이다. 그건 누가 뭐라 해도 가을의 이미지이자 가을의 모습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의 대자연의 변화는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누구의 노력 없이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무더위에 지쳤던 여름이 어느덧 지나고 이젠 대자연의 아미(雅美)를 느끼게 하는 가을이 온 것이다.
녹색으로 짙게 물들었던 들판이 어느덧 황금색으로 변하여 황금물결 일렁이는 좀 사치스러울 수도 있는 부미(富美)를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드높은 하늘에 새까맣게 물들인 철새들의 행렬은 자유롭고 싶은 우리들에게 대리만족을 제공한다. 누런 벼와 같이 그렇게 순수히 자연을 따를 수 있다면, 철새들의 그 떼 지은 행렬과 같이 공동체에 잘 융화되고 그렇게 열외도미 없이 날아갈 수 있다면 지금의 이 군 생활 뿐아니라 사회생활 또한 얼마나 활기차고 재미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들이다. 기계 부수러기 속에 꼭 끼여 사는 우리로서는 자연의 그 순종적이며 능동적인 모습을 알기 힘들고, 그런 기계부수러기 속에서 기계 속에 갇혀 산 우리로서는 공동체의 진정한 파워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굳이 알려하지도 않기에 고립되어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나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살아가는 것이고 나와는 좀 생활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는 곳이 세상인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기계적인 원클릭(One Click)에 의해 자기의 필요가 충족된다 해도 그걸 충족시켜주는 이는 기계가 아닌 인간이며 또한 그 기계를 만드는 이도 인간이란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을 혼자서 살아갈 순 없다. 그게 진리다. 혼자는 미흡하다. 혼자임에도 완벽하다면 그걸 누가 인간이라 보겠는가! 인간은 실수투성이 존재로 인식되기에 실수가 없는 존재란 당연히 신이라는 새로운 개체로 분류되는 것이다. 부족, 실수투성이기에 그 부족함을 메워주기 위해선 자기 혼자가 아닌 여럿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상보적일 때, 결국은 완벽한 모습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같이 오순도순 살아가자. 나 하나의 이기성(나만의 배려)만을 의식하며 그렇게 살아가려 하지 말자. 배려, 그건 분명 좋은 말이다. 하지만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호의적일 수 있으며 악의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져선 안 된다. 나만을 배려한다면, 좀 더 쉽게 말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그건 이기성이기 때문에 악의적인 배려가 되며, 다른 사람을 생각해주고 자기에 대한 일시적인 배려를 줄인다면, 그건 아까와는 정반대로 이타성이기 때문에 호의적인 배려가 된다. 아주 간단한 진리이다. 하지만 간단하다 해서 꼭 실천으로 옮기기에 편하다는 얘긴 아니다. 왜냐하면 진리 속에 삶의 통찰(쌓이고 쌓인 살아가는 방법이랄지, 연륜 말이다)이 담겨 있기에 간단히 표현되었다손 치더라도 그 안에 수만, 수천의 삶의 양태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진리처럼 말은 쉽지만, 의식적으로 행동하기엔 어려운 것들…… 하지만 조금이라도 그렇게 되려 한다면, 그 본의적인 실천을 못할 진 모르지만 적어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그런 존재는 되지 않을 것이다. 배려하며 살자, 나보다 남을……
요즘 자주 생각하게 되는 게, 절제와 솔직의 그 차이가 뭘까 하는 거다. 간혹 어떤 것을 무지 가지고 싶다. 하지만 그걸 남에게 양보해야만 될 입장이다. 솔직함이 최고의 선인양 받아들여지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회성에 의거하여서 솔직하게 보이려고 ‘가지고 싶습니다’라고 솔직히 말해야 하나? 전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러한 상황에 자기의 기본적인 관념의 솔직성을 중요시 여긴 나머지 그렇게 말해 버린다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로 낙인 찍힐 것이다. 그렇다면 양보해야 하는가? 그건 또 다른 측면으로 말하면 가지고자 하는 솔직성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식적인 모습이지 않을까? 솔직ㆍ이기 그리고 절제ㆍ가식 참으로 미묘한 감정이며 생각의 차이이다.
그럼 사회에서 말하는 솔직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회에서 말하는 솔직성은 자기 감정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만이 아님을 위에서 살펴보았듯 알 수 있다. 그렇다. 사회에 있어서의 솔직성은 누가 뭐라 해도 절제를 기본으로 자기 맘을 드러낼 떄일 것이다. 말이 너무 어렵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아까와 같은 상황으로 ‘그걸 가지고 싶다’고 한다면, 그 진짜 마음을 기본으로 가져야 하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을 절제시켜 다른 사람이 가지게 되면 이래이래 좋은 점들이 있겠지라고 생각하여서 그 새로운 진짜 마음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맞게 그렇게 이루어진다면 그것 자체가 자기의 이기도 충족되고 솔직한 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더욱 좋은 일이 있다면, 그 다른 사람이, 그걸 갖는 걸 미안해한 나머지 다시 가지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그건 일석이조의 이상향일 테니 더욱 좋지 않겠는가! 이러한 솔직성이 가식과 다른 까닭은, 그렇게 행동하고자하는 근본성에 있다. 악의적이냐 진정 호의적이냐 하는 근본성 말이다. 솔직해질 필욘 있다. 하지만 자기의 이기성적인 면에서 솔직하라는 게 아니라, 그저 드는 감정에 솔직해지려는 것이다. 그런 건 절대 가식이 아니니깐. 지금까지 말한 솔직과 절제의 가치 탐구는 내 의식 속에 전혀 명확화되지 않은 개념이었기에 과연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정도의 허황된 논리전개였음을 자각하며 나중에 다시 거론토록 하겟다.
천고마비의 계절에 가장 중요한 절기는 뭐니 뭐니 해도 추석(仲秋節, 한가위)일 것이다. 민족대명절로 온 국민의 의식 속에 이 날만큼은 자기의 일터(타지에 일터를 정한 이들)를 떠나 그 먼 길을 재촉하여서라도 가족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의식이 들어서 이다. 그건 또 하나의 의무감 같은 것이며 책임감 같은 것이기에 부담으로 작용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찌 되었건 추석이라는 명절이 우리에겐 크나큰 의미의 날임에 틀림 없다. 떨어져 살던 가족 친지들이(어쩌면 혈연으로 연결되었다손 치더라도 진짜 멀리 살아서 가족과의 소통이 없다면 늘 가까이서 애정을 통하는 친구나 애인보다도 못한 존재일 터이니깐) 한 자리에 모여 오랜만에 서로의 친근감을 느껴가며 혈연의 정을 새삼 되새겨 볼 테니깐.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던가? 서로 서로 한 조상을 가졌다는 동질감을 불태우며 그간 단 한번이라도 못 본 사이일지라도 그 모종의 친근감으로 인해 쉽게 친해질 것이다. 그렇게 추석은 준비되었고 오곡백과 풍성한 가을에 그런 풍요를 나누며 함께 하자고 있는 걸 거다. 군에 와서 첫 추석을 맞는다. 왠지 집에 있을 때 맞이했던 추석도 그다지 별다른 게 없는 그러 평이한 날과도 같았지만, 이곳에서 이렇게 보내고 있으니 문득 집에서 보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우리집엔 이제 모이는 사람도 없고(예전엔 소위 친척이라는 사람들 몇 명이 왔었는데) 그다지 별다르게 하는 일도 없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우리 가족만이 모여 맛난 음식을 먹으며 덕담을 나누며 서로의 외로움을 가족이라는 동질감으로 위로해주곤 했다. 삼은 완벽형 아니던가! 하나는 부족하고 둘은 불안하며 셋은 완벽하다고 그 누가 말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셋이고 내 친한 친구들도 셋인가?^^;; 소수정예라 너무 좋다. 앞으로 이곳에서 추석을 한 번 더 보내야 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좋은 추석을 보내자~ 참고 이겨내자~ 할 수 있다.
돌아가고 싶다. 아주 가끔은 자연의 그 백치미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이러한 생각이 든다. 자연스러움, 어떤 것과 함께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런 것일 게다. 자연스러움 속에 부자연스러움 그건 용인할 수 없는 폐해이다. 하나의 자연 속에 인공미 가득 담긴 부자연을 늘 대하며 살고 있다 보니, 언제나 동떨어지려 하고 잘 어울리지 않으려는 게 은연 중 몸에 배어버린 느낌이다. 더욱이 컴퓨터와 TV 등의 부자연미의 극치는 더욱이 인간을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난 자연스럽고 싶다. 누구와 어울리든, 어느 곳에 어떻게 있든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자연스러움이란 자연스러움이기도 하니깐…… 이젠 자유롭고도 싶다. 사고라는 굴레와 현실이란 둘레를 벗어나 물 따라 산 따라 구름 따라 계절 따라 그렇게 자유롭게 살고 싶다. 자유엔 책임이 수반된다지만 아주 자연스러운 자유를 만끽한다면, 과연 그것 자체가 방종으로까지 흘러갈까 하는 생각도 드니깐. 옛 성현인 공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법적 제재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 게 진정한 자연스러움이며 자유일 테니까. 나도 그런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조금이라도 자기를 억제하려는 마음 다잡음의 부자연스러움이 있다면 그건 자연스러움에 반하는 게 될 테니깐. 자연이 지닌 자연스러움과 자유미를 꼭 체득하며 그렇게 살게 되길 바란다. 천고마비의 계절에 난 이렇게 의식의 풍성함을 가져본다.
‘자연엔 자연스러움과 자유스러움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01년 10월 2일(화) 4시 25분,
강원도 철원에서 천겸(賤謙) 건빵
인용
'연재 > 여행 속에 답이 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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