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크리스마스
01년 12월 24일(월)~25일(화) 구름 껴있다가 폭설
어느덧 올해 마지막 대축제인 크리스마스가 내일로 다가왔다. 이건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며 새해 또한 며칠 후에 다가올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이렇게 눈 깜빡할 사이에 다가오고 나니깐 내 군 생활도 일년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에 새삼 신기함이 느껴진다. 과연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시간이 흐르긴 흐르나 보다.
오늘도 여전히 후반야다. 그것도 B블록 말대기인 B5조이고 부사수는 안전조장에서 벗어나 투입한 지 얼마 안 되는 현호이다. 잘 근무설 수 있을까라는 기대를 가지고 어김없이 11시 30분에 기상했다. 역시 매우 일상적인 평일이요, 그저 의식화된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맞이할 참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상성에 조금이라도 특이성을 줄 만한 일이 생긴 것이다. 첫 대기를 마치고 오신 분대장님이 밖에 눈이 온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수은등 쪽을 바라보니 새하얀 눈들이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현호와 난, 계속 어둠 속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눈이라는 특이 현상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역시 인간의 시각이란 모든 것을 다볼 수 있을 것 같이 하지만 어떤 것 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것은 미처 눈치 채지 못하는 편협성을 가지고 잇다. 그렇게 내리던 눈은 금세 함박눈이 되었고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인 셈이다. 만약 우리가 사회인이었다면 끊이지 않게 전화했을 것이며 전화를 받음으로 벅찬 기쁨을 서로 나누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내리는 눈을 보면서 현호와 난 한숨을 연거푸 내쉬기 시작했으며 괴로워질 오늘에 대해 한탄을 했던 것이다. 어떻게 같은 날, 같은 현상을 보면서 처한 배경에 따라 전혀 상반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인가?
감정의 희비극이 왜 생기는지 역시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래도 같은 현실과 현상에 대해 너무 극단의 감정이 드는 게 난 더 흥미롭고 신기하다. 민간인들은 눈을 눈으로서 즐길 뿐이고 군인들은 눈을 전투방해물 정도로 느낄 뿐이다. 이 차이가 결과적으로 민간인들에겐 재미있는 놀잇감 정도로 생각하게 하는데 반해, 군인들에겐 금세 치워야 할 버거운 방해물 정도로만 생각하게 하기에 군인들은 그게 미쳐 쌓일 겨를도 없이 치워야만 한다. 그러한 생각과 행동의 차이로 인해 서로의 극단의 감정이 드는 것이다.
난 열심히 눈을 쓸었다. 첫 대기는 포기할 정도로 열심히 쓸었고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새벽을 그렇게 연 것이다. 그렇게 계속 두 시간 가량 눈이 내렸고 초소에 투입해서까지 눈을 쓸어야만 했다. 하지만 신기한 일이 여기서 발생한 것이다. 눈이 내리는 것에 따른 감정의 희비극, 그리고 눈을 치움에 따른 힘듦.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생동력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눈이 내릴 때, 이게 내 삶에 얼마나 큰 방해물이 될지 정말 많이 답답해하고 짜증나라 했지만, 막상 이게 내 현실이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열심히 쓸어보자라고 의식을 바꿔 눈과 대면한 결과 눈이 휩쓸려 뿌듯함을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회피와 대면, 그건 크나큰 행동성향의 차이이면서도 커다란 격차의 의식을, 감정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나름대로 뜻깊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맞이한 것만 같아 너무나 행복했고 그저 일상성에 절어버릴 대로 절어버린 그런 평이한 크리스마스가 아닌 뭔가 나에게 의미 깊고 뜻깊었던 오늘이었기에 기분이 좋았다.
오늘 겪게 된 일련의 감정 변화, 그건 오늘이 적어도 내 의식 속에서 오늘이 얼마나 큰 날인지를 새삼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으며 직접 대면했을 때의 그 쾌감이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군에서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에 이렇게 뜻깊게 보낼 수 있어 무지 좋았다.
인용
'연재 > 여행 속에 답이 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대 수양록, 일병 - 01.12.31(월) 제설 중 맞이한 새해 (0) | 2022.06.30 |
---|---|
군대 수양록, 일병 - 01.12.28(금) 선임병의 상 (0) | 2022.06.30 |
군대 수양록, 일병 - 01.12.17(월) 그저 이루어지는 건 없다 (0) | 2022.06.30 |
군대 수양록, 일병 - 01.12.14(금) 영하시대 개막과 다짐 (0) | 2022.06.30 |
군대 수양록, 일병 - 01.12.01(토) 첫 폭설에 바뀐 감정 (0) | 2022.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