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서 일어서기
02년 1월 27일(월) 매우 맑음
지난 날, 지나버린 그 곳에서의 암울하며 처량하기까지 했던 과거 편린(片鱗)들이(그 편리들로 인해 삶이라는 것이 버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하나의 기억 조각 정도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2주 정도의 시간만으로도 아무렇지 않아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 이유에서 아무리 생각하고 아무리 달리 바라보려 해봐도 시간만한 만사(萬事) 해결사(解決士)는 없는 것 같다. 정말 견디기 힘든 순간들을 꿋꿋이 견뎌낸 내 자신이 지금은 너무나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느껴질 뿐이다. 지금은 모든 게 시간 속에 파묻혀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의 의식 저편에서 여전히 꿈틀꿈틀 거리고 있는 나 자신의 잠재적 올무이며 얽매임이다. 그래서 지금 그저 태연한 척 웃으며 지내려 하지만 그 속은 못내 찝찝한 그 강한 찌푸림 같은 계 은연 중 존재하고 있고 여전히 나를 옥죄고 있다. 그 일 당시, 난 모든 걸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됐었다. 어쩌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되지 않았고 될 수 없었기에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 결국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보는 나의 관점은 이제 사뭇 달라졌다. 아무래도 『가시고기』를 읽으면서 느꼈던 다종다양한 삶의 자세를 이제야 새로 체득하게 된 것이며 ‘산에는 꽃이 피네’에서 주장한 한 공동체 속의 무소유의 가치관들을 대하면서 아무래도 나의 의식이 많이 변화하게 된 것이겠지.
이러한 일이 나에게 일어난 까닭은 욥을 시험한 것 같은 주님의 사험이 아니라(왜냐하면 나는 의인이 아니니까) 그저 나의 거만함에 대한 징계였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일 전의 나를 생각해봐도 난 너무 거만했었다. 그런 거만이 주님이 주신 능력이라는 확신 하에 하는 거만이라면 그나마 꼴불견은 아니었을지 모르는데, 다분히 나 잘났다는 데에서 나오는 오만이요, 거만이었기에 크나큰 문제였을 뿐이었다. 언제나 늘 생각하는 거지만, 주님이 이루어주신 은혜를 한 순간이라도 잊어버리고 자기가 모두 이루어냈다고 자만해 버리는 날엔 모든 게 다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성경 구절에 보면 ‘돈 많이 비축해두면 뭐 할래? 오늘 밤이라도 주님이 니 목숨 달하면 우얄라고?’라는 말이 써 있고 장자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이 말은 돈을 모으고 비축하지 말고 다 모이는 즉시 써버려라 뭐 그런 말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다 주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심지어 목숨까지도 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건데 딴 거에 눈 팔려 있느라고 설마 그 중요한 요소이자 부분을 잊고 살지 않겠지’하는 말들이 곧 전해주고자 하는 핵심이겠지. 하지만 나 그런 중요한 걸 잊고 살았다. 그저 내가 잘 나서 이런 자리에 올라섰거니 하는 것 정도 뿐이겠지.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기고만장함에 익숙해져 있다. 비단 나라고 안 그럴 줄 알았다. 난 잊을 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와 같기를 은근히 바랐다. 아니 난 그런 사람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소대장님이 좋은 말을 해주고 나를 칭찬해줄수록 자만심만 켜져갔던 거 같다. 그래서 누군가 날 다그칠 때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바로 든든한 소대장님의 신임이 나의 등 뒤에서 늘 함께 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보 같지만 그땐 그랬다. 그런 것 만한 나에게 하나님은 당연한 진리를 체득케 한 것이다. 사실 그 순간에 나에게만 왜 이런 일이 닥쳤을까 비분강개해 했지만 그건 결코 그 하나의 요소만이 아니었다는 게 지금에 이르러 내린 결론이다. 더 큰 인물로 키워주시려는 주님의 계획 정도이라고나 할까.
그 일을 계기로 내 주위에 현상적인 변화와 의식적인 변화가 있었다. 현상적인 변화는 소대장님의 나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추락했기 때문에 후반야 사수 말뚝에서 전반야 부사수로 지위와 책임이 깎였다는 것이다. 후반야에 선다는 것은 소대장님에게 근무를 잘 선다고 인정 받았다는 뜻이며 사수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계급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 두 번의 실수도 이렇게 폭삭 내려앉게 된 것은, 비극적인 일이며 참혹한 일이다. 그래서 한순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기에 그런 현상적 자괴감은 나를 강하게 짓눌렀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런 것에 덧붙여진 것은 고참들의 후유증이라고나 할까? 물론 후유증은 며칠 간 계속 될거라 예측하고 있었지만 역시 현실이 되고 나니 예측한 것 이상이어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었다. 물론 말로 갈구는 경우는 없었지만, 간혹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 후유증을 끄집어낼 때쯤이면 그 사람이 원망스러우면서 나 자신이 너무나 미워질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나 할까. 소대장님과 선임병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이야말로 형상적인 변화 중 최고이다
하지만 이어서 그런 현상적인 변화에 뒤따라 내 의식적 변화가 일어났다. 오히려 긍정적인 쪽이었기에 난 이 변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고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순식간에 긍정적으로 바뀐다는 건 신기하고도 대단한 일이다. 난 여기서 전화위복(轉禍爲福),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속담이 새삼 놀라운 삶의 깨달음임을 알게 됐다. 우선은 내가 부사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비감어린 일이고 동기들이 다 사수를 서고 있는 이 시점에서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리라. 물론 처음엔 그런 현실이 짜증나기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부사수를 선다는 거 오랜만에 느껴보는 입장의 뒤바꿈이기에 그간 사수의 관점으로 얼룩져 부사수를 억압하려 들었던 나의 태도가 엄청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내가 부사수 시절에 느꼈던 ‘내가 사수가 된다면 이래저래 해야지’라는 생각들이 그제야 나를 휩쓸기 시작했고 앞으로의 비젼을 그렇게 제시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건 그래서 무척이나 중요한 것 같다.
두 번째 나의 의식 안에서의 변화는 위에서 언급을 했듯이, 내가 얼마나 기고만장 했는지이다. 물론 주님이 주신 축복이라는 걸 잊은 기고만장 말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던 나는 이걸 계기로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도 하찮은 존재인 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느끼게 된 것은 굴곡 있는 삶이 주는 유쾌성이였다. 이래저래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지루하기에 늘 시간이 안 간다며 하품을 쉬기 일쑤였고 그렇기에 지겨운 군 생활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삶 속에서 드디어 지향하고 좀 더 즐길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있고 보니 정말 정신 없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그에 비례하여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다. ‘내가 이렇게 살아있구나’하고 느끼는 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고 삶의 활기였다. 지금도 그 일의 연장선 상에 서있지만 그로 인해 나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기에 정말 좋기만 하다.
다양성의 삶, 다분법적인 삶의 전개. 뭐 이런 것은 『가시고기』라는 소설을 통해서 이미 익혀본 적 있다. 하나의 현실이 초래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현실과 반응들. 그건 삶을 살아볼 만하다는 것 쯤이랄까. 그대여! 눈앞의 현실. 지금의 현실에만 국한되지 말지어다. 그게 결국 너에게 끼칠 좋은 현실들을 기대하며 그저 다분법적인 삶을 나름대로 즐길지어다. 난 주님의 힘으로 소생할 것이다. 주님을 잃음으로 해서 난 바닥으로 내팽개쳐 졌으니, 다시 주님을 되찾으므로 하늘로 치솟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주님만이 나의 힘이요, 반석이라! 그걸 잊지 말지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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