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차기까지 간 격전의 스페인전
02년 6월 22일(토)
역사적인 BIG 게임이 있던 토요일이다. 오후 3시 반에 8강전이 진행되기에 벌써부터 기대 반 두려움 반인 상황이다. 4강 진출을 위한 한국과 스페인의 숙명적인 경기가 무등벌 빛고을에서 열리는 것이다. 벌써부터 붉은 물결들은 여기저기 일렁이기 시작한다. 대한민국 5천만의 힘! 그건 절대적인 우위였으며 절대적인 승리의 열쇠였다.
아무래도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혼자라는 고독감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자기에게 천만금이 있고 그에 따른 엄청난 힘이 있을지라도 자기 혼자라는 걸 알게 되면 그 삶은 무의미로 치닫게 된다. 그런 현실에선 결국 자기의 장점은 덮어두고 결점만을 확대시켜 자기 비하로 나가게 된다. 하지만 그 반대여서 함께 하는 이들이 있다면 자기의 역량을 100+x까지 뽑아낼 수 있을 테니 결과야 뻔하지 않은가. 오천만의 힘이 태극전사 11명의 어깨에 고스란히 전해져 그들에게 무한의 신뢰감을 주었고 그것이 바로 한국이 48년간이나 염원했던 1승뿐 아니라 16강과 8강 진출까지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난 태극전사 뿐만 아니라, 5천만의 ‘red devils’에게도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4일의 시간을 기다려온 사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역시 스페인은 강적이었다. 우린 하프라인도 제대로 넘어가질 못했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엄청난 대포알 슛을 연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위협적이었지만 다행히도 한 골도 내어주지 않았다. 그건 승리의 여신이 우리 편임을 증명하는 거였다. 우리 단 한번의 공격만으로 족할 뿐이었다.
암울한 분위기로 후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상태라면 결과는 뻔하디 뻔했다. 하지만 후반전 양상은 전반과는 사뭇 달랐다. 스피드가 많이 떨어진 스페인과는 붙어볼 만했으니 말이다. 체력과 정신력이 뒷받침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등한 경기를 펼쳤지만 볼운이 따라주질 않아 양팀 모두 득점을 하지 못하며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전 때처럼 승리의 역사를 일구어낼 수 있을까하는 기대를 한 채 열심히 관전을 했다. ‘대한민국’(8강에 든 한국을 기리며 소리 높여 외치는 말)의 볼 주도력은 훨씬 앞섰지만 스페인이 한번씩 공격하는 건 날카롭고도 예리했다. 전반에 상대팀 선수가 찬 불이 약간 각도가 비틀어져 나가 골포스트를 맞고 튕겨 나간 건, 승리의 여신이 그들을 외면하고 있다는 증거였고 한국팀에겐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게 들어갔다면 이대로 무너졌을 테니 무지 서러웠을 것이다.
그렇게 어느덧 후반전이 겨우 3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 되었다. 이대로 후반전이 끝나 승부차기를 하면 이번 경기 내내 페널트킥을 한번도 못 넣었기에 질 것이 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가운데 갑자기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전 병력 사열대 앞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개풀 뜯어 먹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 했던 거다. 정말 중요한 이 순간에 관람을 중지시키다니 하도 어이가 없어 서로 민망하게 바라보며 한참을 가만히 있었고 어쩔 수 없이 투덜대며 모두 나가야만 했다. 황급히 소집한 이유를 알고 보니 2중대에서 이병이 탈영했단다. 하필이면 이럴 때ㅠㅠ 눈에 불똥이 튈 정도로 미웠다. 그렇게 소이산 수색 작전이 시행되었고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왔다. 들어와서 알아보니 1중대원들에게 그 아이는 잡혔다고 하더라.
축구는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는 격전 끝에 5:3으로 이겨서 4강에 진출하게 되었다는 거다. 막상 그 역사적인 장면을 볼 수 없었지만 승리의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됐다. 승부차기에서 무려 다섯 골이나 다 넣은 것이다. 이운재는 한 골을 막아냈으며 마지막 주자인 홍명보는 당당히 골을 차넣으며 승부를 결정지었다. 감격스러운 그 장면을 나중에 결과를 알고서 보니 긴장감이 덜해 아쉽긴 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불가능이라 생각했던 것이 현실로 다가오니 어찌나 벅찬 감동이 느껴지던지. 과장해서 말하자면 오늘 이 기쁨으로 죽어도 여한에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여기가 군대가 아닌 밖이었다면 오늘밤은 아는 사람들과 축하파티를 했을 텐데, 그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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