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須菩堤! 於意云何? 阿那含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아나함능작시념, 아득아나함과불?”
9-6.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 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아나함을 이름하여 ‘이제 다시 아니 올 자’라 하지만, 실제로 온다 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만 아나함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입니다.”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名爲不來, 而實无來. 是故名阿那含.”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아나함명위불래, 이실무래. 시고명아나함.”
우리 해인사본(本)에 ‘실무래(實无來)’로 되어 있는 부분이 명본(明本)에는 ‘실무불래(實無不來)’로 되어 있고, 세조본도 명본(明本)을 따랐다. 우리나라 시중 통용본도 한결같이 ‘무불래(無不來)’로 되어 있다.
언뜻 보기에는 아나함(阿那含)이 불래(不來)의 뜻이므로 그것의 부정은 ‘무불래(無不來)’가 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문에서 ‘무불래(無不來)’라고 하면 그것은 이중부정이 되어, ‘오지 않음이 없다.’ 즉 ‘언제고 온다’가 된다. 근본적으로 ‘불래(不來)’라는 개념의 부정이라는 맥락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라집(羅什)은 ‘무래(無來)’ 즉 온다고 하는 것 그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다시 아니 올 자’라고 하는 개념을 파기시켜 버린 것이다. 이러한 깊은 뜻을 모르고 그것을 ‘무불래(無不來)’로 고치는 것은 옛사람들, 특히 교정을 좋아하는 소학가(小學家)들의 천박함에 지나지 않는다. 육조(六祖)의 주석에도 ‘고명불래(故名不來), 이실무래(而實無來)’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육조(六祖)가 본 『금강경』판본에는 ‘무래(無來)’로 되어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 해인사판본의 우수성이 이런 데서 입증되는 것이다. 『대정(大正)』본은 바로 우리 고려본을 따랐다. 따라서 나카무라도 이 부분을 ‘무래(無來)’로 바르게 번역했는데(來ること無ければなり), 이기영은 또 이 부분만 ‘무불래(無不來)’로 원문도 고치고 번역도 그에 따라 했으니 도무지 그 일관성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별 생각 없이 통용본을 따르신 것 같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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