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시오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23-1.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있지 아니하니, 그래서 이를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 것이다.
“復次須菩堤! 是法平等無有高下,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堤.
“복차수보리! 시법평등무유고하,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23-2.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는 것으로써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以无我無人無衆生无壽者, 修一切善法, 則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수일체선법,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23-3.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라 하는 것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여래가 설하였으니 이를 이름하여 선한 법이라 한 것이다.”
須菩堤! 所言善法者, 如來說非善法, 是名善法.”
수보리! 소언선법자, 여래설비선법, 시명선법.”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보슬비와도 같은 잠언이다. 2절에서 ‘선한 법’을 이야기하고, 또 사람들이 ‘선한 법’이라는 말을 실체적으로 받아들일까봐 무서워서 제3절에서 친절하게도 그 ‘선한 법’을 다시 해설한 것이다. 그 논리의 간곡함이 실로 정연하다 하겠다.
불교는 초윤리적이라고 말한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파계를 했다 해도 윤리적인 흠이 되지 않는다. 중광 스님이 걸레짓을 하고 다녀도 그것은 세간에서 비윤리적 행위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초윤리’와 ‘비윤리’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초윤리는 윤리를 통해 달성되는 것이다. ‘비윤리’는 상식적인 악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 초윤리성을 강조하는 것은 윤리의 파괴가 아니라, 윤리의 고착성과 협애성에 대한 경고다. 초윤리적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윤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도의 수련을 요구하는 것이요, 또 때 묻지 않은 우리의 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여래설비선법(如來說非善法)’이 명본(明本)에는 ‘여래설즉비선법(如來說卽非善法)’으로 되어 있다. 세조본은 대체로 명본을 따르고 있다. 『대정』은 해인사본을 따르고 있다. 앞뒤 문맥상 ‘즉(卽)’이 없는 표현이 더 간결하고 직절(直截)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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