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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헌문 제십사 - 10. 자산과 자서와 관중에 대한 평가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헌문 제십사 - 10. 자산과 자서와 관중에 대한 평가

건방진방랑자 2022. 12. 12.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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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자산과 자서와 관중에 대한 평가

 

 

14-10. 혹자가 자산(子産)을 여쭈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4-10. 或問子産. 子曰: “惠人也.”
 
또 자서(西)를 여쭈었다. 이에 공자께서는 씁쓸한 듯 말씀하시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은
問子西. : “彼哉! 彼哉!”
 
관중(管仲)을 여쭈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인물이다. 관중은 백씨(伯氏)가 잘못을 저질러 그의 영지 병읍(騈邑) 삼백 호를 빼앗아 버렸는데도, 백씨는 거친 밥을 먹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그를 원망하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管仲. : “人也. 奪伯氏騈邑三百, 飯疏食, 沒齒無怨言.”

 

매우 적절한 공자의 정치평론이라 할 것이다. 살아있는 공자의 숨결이 느껴지는 장이다. 자산(子産)은 공자가 가슴속 깊이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자산(子産)의 이름은 공손교(公孫僑). 그러니까 명이 교()이고 자가 자산이다. 정나라는 지금 하남성 정주(鄭州)를 수도로 하는 작은 제후국이었는데 자산은 이 나라의 집정(執政)으로서 후세에 큰 모범을 남겼다. 그는 박학하였고 투철한 합리주의자였으며, 탁월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로서, 정나라의 국정을 주재(主宰)하면서 국내적으로는 귀족간의 분쟁을 조정하고, 국제적으로는 진()나라와 초()나라의 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약한 정나라를 현명한 판단에 의하여 전화(戰禍)에 휘말리지 않도록 구하였다. 또한 세제와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성문법(成文法)을 제정하여 제정일치적인 정나라의 정치를 합리적인 법치주의적 통치의 수준으로 제고시킴으로써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거대한 반향을 일으켰다. 법가적인 요소와 유가적인 요소를 다 구현한 공자 당대 의대 정치가였다. 정자산이 병이 나서 죽기 전에 그의 후계자인 대숙(大叔)에게 하는 말 중에 매우 감동적인 말이 있다. 덕이 있는 자라야 관대한 정치로써 국민을 굴복시킬 수 있다[唯有德者, 能以寬服民]라고 충고하면서, 불은 맹렬하여 쉽게 국민들이 볼 수 있고 무서워하기 때문에 불에 타죽는 사람은 오히려 적 은데, 물은 나약하고 힘없는 것처럼 보여서 국민들이 쉽게 넘나보고 친근하게 생각하여 오히려 물에 빠져죽는 사람이 많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가 말하는 관대함이란 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대함으로써 백성들을 감동시키고 굴복시키기는 정말 어렵다고 말한다. 여기 관복()의 사상은 죤 록크(John Locke, 1632~1704)의 관용(Tolerance)의 사상을 연상케 하는데, 실제로 공자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소공(昭公) 20, 공자 30세 때 세상을 떴다. 이에 대하여 좌전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자산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중니(仲尼)는 그의 죽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옛부터 내려오던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及子産卒, 仲尼聞之, 出涕曰: “古之遺愛也.”

 

 

이에 영향을 받았을 고주는 ()’()’라고 말한다[孔安國曰: “, 愛也.”]. 여기 혜인(惠人)’이라고 공자가 말한 것을 직역하면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라고 번역했다.

 

다음 자서(子西)에 관해서 고주의 마음이 두 사람의 가능성을 다 소개하고 있다. 하나는 정나라의 간공(簡公)의 집정이며 정자산의 사촌이었던 공손하(公孫夏)라는 인물일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초()나라의 영윤(令尹: 초나라에서는 수상을 영윤이라고 표현한다) 자서(西)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주석이 마융의 제2설을 지지한다. 초나라는 호북성 강릉현(江陵縣)을 수도로 하는 남 방의 대국. 자서의 실명은 공자신(公子申). 초나라 소왕(昭王)의 동생이다. 소왕 은 신흥세력인 오()나라의 합려(闔閭)에게 국도(國都)를 점령당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지만 영윤 자서는 형 소왕을 잘 보필하여 난국을 타개한다. 형 소왕 이 죽음에 임박하여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려고 하지만 자서(子西)는 사양하고 형의 아들 혜왕(惠王)을 세우고 자신은 영윤으로서 끝까지 남아 초나라를 굳건하게 지켰다. 우리나라 세조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은 명재상이었다세조가 자서를 배웠으면 우리나라 국운이 달라졌을 것이다.

 

소왕이 죽은 것은 애공 6, 공자 나이 63세 때였는데, 그는 죽기 직전에 공자 를 초빙하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 그러나 소왕의 의지는 영윤 자서(子西)에 의하여 좌절되고 만다. 공자는 당시 진ㆍ채의 난을 극복하고 난 후, 제자들의 충성심이 확고하게 다져져 있었던 집단의 수장이었다. 이러한 집단을 초 나라에 모셔오는 것은 초나라의 화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자서(西)의 판단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지막 그의 꿈을 좌절시킨 인물이었다. 공자는 자서에게 배신감을 느꼈겠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서야말로 오늘의 공자가 있게 만든 위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자서가 없었더라면 귀로 후의 공자는 없다. 공자 생애의 가장 찬란한 부분이 사라지고 나면 공자의 생애는 노른자 없는 달걀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공자는 자서를 생각하면 씁쓸하다.

 

마지막의 관중(管仲, ?~BC 645)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 공자보다 두 세기 나 앞서서 제환공(齊桓公)의 패업을 이룩한 인물이다. 3-22에서 공자는 관중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본 편에서는 공자의 관중에 대한 평론이 세 번이나 나오는데 다 긍정적이다(14-10, 14-17, 14-18).

 

관중을 평하는 말에 인야(人也)’그 사람은이라는 단순한 주격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약간 객관화시켜 거리를 두는 어조가 있고, 또 그 인간을 강하게 평가하는 맥락이기 때문에 그 인물로 말하자면 정도의 느낌이 드는 말로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그것을 독립구로 해석했다.

 

 

 

 

인용

목차

전문 / 본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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