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관중의 제후들을 규합하였기에 인(仁)의 공로가 있다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 “未仁乎.”
糾, 居黝反. 召, 音邵.
○ 按『春秋傳』, 齊襄公無道, 鮑叔牙奉公子小白奔莒. 及無知弑襄公, 管夷吾ㆍ召忽奉公子糾奔魯. 魯人納之, 未克, 而小白入, 是爲桓公. 使魯殺子糾而請管ㆍ召, 召忽死之, 管仲請囚. 鮑叔牙言於桓公以爲相. 子路疑管仲忘君事讐, 忍心害理, 不得爲仁也.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
九, 『春秋傳』作“糾”, 督也, 古字通用. 不以兵車, 言不假威力也. 如其仁, 言誰如其仁者, 又再言以深許之. 蓋管仲雖未得爲仁人, 而其利澤及人, 則有仁之功矣.
해석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 “未仁乎.”
자로가 “제환공이 공자 규를 죽이자 소홀은 자결했고 관중은 죽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고, 다시 “관중은 인하지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糾, 居黝反. 召, 音邵.
○ 按『春秋傳』, 齊襄公無道,
『춘추좌씨전』을 살펴보면 제양공이 무도하자
鮑叔牙奉公子小白奔莒.
포숙아는 공자 소백을 받들어 거나라로 망명했고,
及無知弑襄公,
무지가 양공을 시해함에 이르러,
管夷吾ㆍ召忽奉公子糾奔魯.
관이오와 소홀이 공자 규를 받들어 노나라로 망명했다.
魯人納之, 未克,
노나라 사람이 규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하질 못했고
而小白入, 是爲桓公.
소백이 노나라에 들어가서 환공이 되었다.
使魯殺子糾而請管ㆍ召,
노나라로 하여금 자규를 죽이고 관이오와 소홀을 보내주길 청하자
召忽死之, 管仲請囚.
소홀은 죽고 관중은 갇히길 청하였다.
鮑叔牙言於桓公以爲相.
포숙아는 환공에게 말하여 관중이 재상이 되도록 했다.
子路疑管仲忘君事讐, 忍心害理,
자로는 관중이 임금을 잊고 원수를 섬겨 마음을 참고 이치를 해하여
不得爲仁也.
인을 할 수 없다고 의심했다.
○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하면 관이오(管夷吾)와 포숙아(鮑叔牙)의 우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관이오는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도와 그를 패자(覇者)로 만든 관중(管仲)이다. 환공은 공자(公子)인 규(糾)를 살해했으나 규의 신하였던 관중(管仲)은 순사(殉死)하지 않고 환공을 섬겼다. 이 일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논어’의 ‘헌문(憲問)’에서 자로(子路)는 그 점을 공자에게 질문했다.
춘추시대 제나라는 양공(襄公) 때 정치가 혼란했다. 포숙아(鮑叔牙)는 공자(公子)인 소백(小白)을 모시고 거(莒) 나라로 망명했다. 소백은 양공의 이복동생, 포숙아는 그의 부(傅)였다. 이 무렵 공손무지(公孫無知)가 양공을 살해하자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은 공자(公子)인 규(糾)를 모시고 노(魯) 나라로 망명했다. 규는 소홀의 이복동생 혹은 이복형이라고 한다. 소백과 규는 각각 제나라로 먼저 들어가려고 싸웠는데, 소백이 이겨 제나라 군주가 되었다. 이 사람이 환공이다.
환공은 노나라 장공(莊公)에게 압력을 가해 규를 죽이게 했다. 소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위의 ‘소홀사지(召忽死之)’는 ‘그를 따라 죽었다’이다. 하지만 관중은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포숙아의 추천으로 환공의 신하가 되어 재상에까지 올랐다. 기원전 685년의 일이다. 자로는 이 일을 거론하고 ‘왈불인호(曰不仁乎)’라고 했다. ‘어질지 못하다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는 뜻이다.
니체는 과거를 이야기하는 방식에 기념비적 역사, 골동품적 역사, 비판적 역사의 셋이 있다고 했다. 공자의 문하에서는 과거 사실에서 현재적 의미를 생산해내는 비판적 역사를 공부했다. 우리가 고전과 역사를 공부하는 방식도 그러해야 하리라.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
공자께서 “환공이 제후를 규합하였지만 군사와 전차와 같은 무력(武力)으로 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다. 인과 같음이여, 인과 같음이여.”라고 말씀하셨다.
九, 『春秋傳』作“糾”,
구(九)는 『춘추전』에선 ‘규(糾)’라 했으니,
督也, 古字通用.
감독한다는 것으로 옛 글자는 통용된다.
不以兵車, 言不假威力也.
‘불이병거(不以兵車)’은 위력을 빌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如其仁, 言誰如其仁者,
여기인(如其仁)은 누가 그 인과 같겠는가라는 말이니,
又再言以深許之.
또한 두 번 말하여 깊이 그를 허여한 것이다.
蓋管仲雖未得爲仁人,
대개 관중이 비록 인한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而其利澤及人, 則有仁之功矣.
이로움과 혜택이 남에게 미쳤으니, 인의 공로가 있는 것이다.
○ 관중(管仲)은 자기가 모시던 공자 규(糾)가 살해될 때 순사(殉死)하지 않고 환공(桓公)을 섬겼다. 이를 두고 자로(子路)가 ‘어질지 못하다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자는 위와 같이 대답했다.
구합(九合)을 주자는 규합(糾合)으로 보았다. 규(糾)는 독책(督責)의 독(督)과 통하며, 주나라 천자를 존경해야 할 책임을 따진다는 뜻이다. 옛 주석은 구(九)를 아홉의 횟수로 보았다. 그런데 ‘사기’에 보면 환공이 ‘과인(寡人)은 병거(兵車)로 모인 것이 세 번, 승거(乘車)로 모인 것이 여섯 번이었다’고 했으나 ‘관자(管子)’에서는 ‘병거(兵車)로 모인 것이 여섯 번, 승거(乘車)로 모인 것이 세 번이었다’고 했다. 병거로 모임은 무력의 시위, 승거로 모임은 평화의 회합을 가리킨다. ‘춘추곡량전’에서는 노나라 장공(莊公) 27년에 제후들이 의상(衣裳)으로 모인 것이 열한 번, 병거(兵車)로 모인 것이 네 번이라 했다. 문헌마다 다르므로 구(九)를 횟수로 보기는 어렵다.
관중지력(管仲之力)의 력(力)은 공적(功績)이란 뜻이다. 국가 사이의 평화스러운 회합을 의상지회(衣裳之會)라고 하는데, 관중의 공적은 무력 시위가 아니라 의상지회를 이루어낸 데 있다. 여기인(如其仁)은 ‘누가 그 어짊만 하겠는가’라고 하여, 관중의 어짊을 칭송한 말이다. 단, 군주를 위해 순사(殉死)한 소홀(召忽)의 절의와 관중의 공적을 비교해서, ‘소홀이 어찌 관중의 어짊에 미칠 것인가’라고 풀이하거나 ‘관중이 소홀의 어짊과 같도다’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공자는 관중이 인자(仁者)는 아니지만 백성에게 이택(利澤)을 끼쳤기에 인(仁)의 공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남에게 이택을 끼치지 못하면서 절의의 이념만 고수하는 행위는 그리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할 듯하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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