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자산과 자서와 관중에 대한 평가
或問子産. 子曰: “惠人也.”
子産之政, 不專於寬, 然其心則一以愛人爲主. 故孔子以爲惠人, 蓋擧其重而言也.
問子西. 曰: “彼哉! 彼哉!”
子西, 楚公子申, 能遜楚國, 立昭王, 而改紀其政, 亦賢大夫也. 然不能革其僭王之號, 昭王欲用孔子, 又沮止之. 其後卒召白公以致禍亂, 則其爲人可知矣. 彼哉者, 外之之辭.
問管仲. 曰: “人也. 奪伯氏騈邑三百, 飯疏食, 沒齒無怨言.”
人也, 猶言此人也. 伯氏, 齊大夫. 騈邑, 地名. 齒, 年也. 蓋桓公奪伯氏之邑以與管仲, 伯氏自知己罪, 而心服管仲之功, 故窮約以終身而無怨言. 荀卿所謂“與之書社三百, 而富人莫之敢拒” 者, 卽此事也.
○ 或問: “管仲ㆍ子産孰優?” 曰: “管仲之德, 不勝其才. 子産之才, 不勝其德. 然於聖人之學, 則槪乎其未有聞也.”
해석
或問子産. 子曰: “惠人也.”
어떤 이가 자산에 대해 여쭈니, 공자께서 “은혜로운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다.
子産之政, 不專於寬,
자산의 정치는 관대함으로 오롯이 하진 않았지만
然其心則一以愛人爲主.
그 마음은 한결같이 남을 아낌을 주로 삼았다.
故孔子以爲惠人,
그렇기 때문에 공자가 은혜로운 사람이라 여겼으니,
蓋擧其重而言也.
대저 그 중요한 것을 거론하며 말한 것이다.
問子西. 曰: “彼哉! 彼哉!”
자서에 대해 여쭈니, 그러자 공자께서 “저 사람! 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子西, 楚公子申,
자서는 초나라 공자 신으로,
能遜楚國, 立昭王,
초나라를 사양하고 소왕을 옹립하여
而改紀其政, 亦賢大夫也.
정치를 개혁하고 기강을 바로 잡았으니, 또한 어진 대부다.
然不能革其僭王之號,
그러나 임금을 참칭하는 칭호를 개혁하진 못했고,
昭王欲用孔子, 又沮止之.
소왕이 공자를 등용하려 하자 또한 막아 버렸다.
其後卒召白公以致禍亂,
그 후 마침내 백공을 불러 재앙과 혼란을 불러들였으니,
則其爲人可知矣.
사람됨을 알 만하다.
彼哉者, 外之之辭.
저 사람이라는 것은 그를 외면한 말이다.
問管仲. 曰: “人也. 奪伯氏騈邑三百, 飯疏食, 沒齒無怨言.”
관중에 대해 여쭈니, “이 사람은 백씨의 병읍 200백리를 탈취하여, 백씨가 거친 밥을 먹는데도 삶이 마치도록 관중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다.
人也, 猶言此人也.
‘인야(人也)’는 ‘차인(此人)’과 같다.
伯氏, 齊大夫.
백씨(伯氏)는 제나라 대부다.
騈邑, 地名. 齒, 年也.
병읍은 지명이다. 치(齒)는 나이다.
蓋桓公奪伯氏之邑以與管仲,
대저 환공이 백씨의 읍을 탈취하여 관중에게 줬는데,
伯氏自知己罪, 而心服管仲之功,
백씨는 스스로 자기의 죄임을 알아 관중의 공에 심복하였다.
故窮約以終身而無怨言.
그렇기 때문에 곤궁하게 죽어가도록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荀卿所謂“與之書社三百,
순경이 ‘서사【25가구를 묶어 사(社)를 세우고, 25가구의 이름을 쓴 등록부책을 말한다】 300개의 명부를 주더라도
而富人莫之敢拒” 者, 卽此事也.
부자들은 감히 막질 못했다.’라는 것이, 곧 이 일이다.
○ 或問: “管仲ㆍ子産孰優?”
어떤 이가 “관중과 자산 중 누가 나은가?”라고 물으니,
曰: “管仲之德, 不勝其才.
나는 “관중의 덕은 재주를 이기지 못했고,
子産之才, 不勝其德.
자산의 재주는 덕을 이기지 못했다.
然於聖人之學, 則槪乎其未有聞也.”
그러나 성인의 학문이라면 대개 듣지를 못했다.”라고 대답했다.
○ 어느 시대 어느 분야나 인물에 대한 평가가 있다. 정치가에 대한 평가는 자평(自評)보다 대중의 평가가 더 객관적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보면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앞 세대 정치가들에 대한 평가를 청했다. 먼저 정(鄭)나라 대부 자산(子産)에 대해 물었는데, 공자는 ‘혜인야(惠人也)’라고 답했다. 백성들에게 깊은 은혜를 끼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정나라 대부 자서(子西)에 대해 묻자, 공자는 ‘피재피재(彼哉彼哉)’라고 했다. ‘그 사람 말인가, 그 사람 말인가’라는 말로, 딱히 칭송할 게 없다고 빈척(擯斥)한 것이다. 이번에는 제(齊)나라 대부 관중(管仲)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례를 들어 관중의 공명정대(公明正大)함을 환기시켰다.
인야(人也)는 정현(鄭玄), 주자(주희), 조선 교정청본이 모두 ‘이 사람으로 말하면’으로 풀이했다. 인(人)을 인(仁)으로 보거나 위에 인(仁)이 빠졌다고 보기도 한다. 정약용도 어떤 한 글자가 빠졌다고 여겼다. 여기서는 교정청본을 따랐다. 백씨(伯氏)는 제나라 대부로, 병(騈) 마을을 영지로 지녔다. 삼백(三百)은 가호 수인 듯하다. 반소사(飯疏食)는 거친 밥을 먹는다는 말로, 궁핍하다는 뜻이다. 몰치(沒齒)는 수명 마칠 때까지로, 몰(沒)은 다할 진(盡), 치(齒)는 연치(年齒)다. 주자와 정약용은 백씨의 삼백호를 제나라 군주 환공(桓公)이 빼앗아 관중에게 주었다고 보았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가 죽은 뒤에나 공정할 수 있다고 하지만 현대에는 평가를 유보할 겨를이 없다. 지도층은 특히 대중들이 ‘피재피재(彼哉彼哉)’라고 빈척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하리라.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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