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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 답홍덕보서答洪德保書(三) 본문

산문놀이터/조선

박지원 - 답홍덕보서答洪德保書(三)

건방진방랑자 2019. 5. 4.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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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洪德保書()

 

형암과 초정이 관직에 발탁된 걸 축하해

炯楚輩遷喬 可謂奇矣 盛世抱珍 自無遺捐 從此得霑微祿 足以不死 安可責人如枯蟬抱木 竅蚓飮泉而已哉

 

연행한 이후 안목이 더욱 높아진 그네들

第其東還以來 心目益高 百無可意 眉眼之間 時露鋒穎奇遊一段 已於乾淨錄中 耳染目擩 實如足踏 不須更事探討 非爲更無奇事 聊以抑之 故不語蘆溝以西事 諸君輩頗亦怪之 不無鬱陶之意 想不喩此意也

 

혜풍이 천자를 본 장관과 너스레

惠風之道見天子 眞是壯觀 黃屋左纛 千乘萬騎 燀爀如雷霆鬼神 而親駐馬按轡 手招東人 令平立仰視 其鼻脊隆起 直揷天庭 眼尾甚長 橫拂鬢間 鬍髯若林 楞骨如岳云 吾答曰 此始皇帝副本也 惠風曰 何以知之 曰吾已識之於三才圖會帝王像中矣 三人者皆大笑 對我不復自詑其奇觀

 

향조가 쓴 燕巖山居의 특징

炯也得香祖筆 燕巖山居四字以贈 故已刻揭山齋 而其眞本奉納 合附古杭帖中 以爲傳久之地 如何 其印首章 爲暑月亦霜氣 名字章及尾識 稱德園 未知其字與號也

 

검서관이 된 세 사람에게 전하는 말

三人見啣 巧湊一團 其平生遊居也同 志趣也同 故自中猜怨頗多 而近者尤甚云 無足恠者 雖無猜疾 自當戒謹 而况處卑而塗榮 職近而事艱 尤當息交誡飮 專精校閱 而浮華者日噪其側 欲避無門云 勢似然矣 已以一書 報知此意 而炯也自爾細心 能自防愼 楚也太銳自用 則安能知之

 

대용과의 편지에서 세 사람을 거론한 이유

吾今枯落鄕廬 山以外事 不惟不聞 亦所不問 無關他事 第其平生愛惜者存 與吾兄頗同 故臨書自然及之 未知其間有甞往復 而諸君日記已成 有所示否 -孔雀館文稿

 

 

해석

 

형암과 초정이 관직에 발탁된 걸 축하해

 

炯楚輩遷喬 可謂奇矣[각주:1]

형암(炯菴 이덕무 )ㆍ초정(楚亭 박제가 ) 등이 관직에 발탁된 것은 가히 특이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盛世抱珍 自無遺捐

태평성대에 진기한 재주를 지니고 있으니 자연히 버림받는 일이 없겠지요.

 

從此得霑微祿 足以不死

이제부터 하찮은 녹이나마 얻게 되어 굶어 죽지는 않을 터입니다.

 

安可責人如枯蟬抱木

어찌 사람에게 허물 벗은 매미가 나무에 달라붙어 있거나

 

竅蚓飮泉而已哉

구멍 속의 지렁이가 지하수만 마시듯이 살라고 요구할 수야 있겠습니까.

 

 

 

연행한 이후 안목이 더욱 높아진 그네들

 

第其東還以來 心目益高[각주:2]

다만 그들은 귀국한 이래로 안목이 더욱 높아져서

 

百無可意 眉眼之間 時露鋒穎

한 가지도 뜻에 맞는 것이 없으며, 표정에까지 간혹 재기(才氣)를 드러내곤 합니다.

 

奇遊一段 已於乾淨錄[각주:3]

중국인과의 특이한 교유에 대해서는 이미 간정록(乾淨錄)을 통해서

 

耳染目擩 實如足踏

귀에 젖고 눈이 익어 실로 제 자신이 답사한 것과 다름 없으니,

 

不須更事探討

다시 야단스럽게 탐문하고 토론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非爲更無奇事 聊以抑之

그 밖에 기이한 일이 없다고 보지는 않지만, 잠시 억눌러두고

 

故不語蘆溝以西事[각주:4]

일부러 노구교(蘆溝橋) 서쪽의 일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諸君輩頗亦怪之 不無鬱陶之意

그런데 그 친구들이 이를 자못 괴이히 여겨 답답한 생각이 없지 않은 모양이니,

 

想不喩此意也

아마 나의 이런 의중을 깨닫지 못한 듯합니다.

 

 

 

혜풍이 천자를 본 장관과 너스레

 

惠風之道見天子 眞是壯觀[각주:5]

혜풍(惠風 유득공 )이 길에서 천자를 본 것은 참으로 장관이었답디다.

 

黃屋左纛 千乘萬騎

왼쪽에 천자기(天子旗)를 세우고 누런 비단덮개를 씌운 수레에다 수천 대의 수레와 수만 명의 기병이

 

燀爀如雷霆鬼神

뒤따르는 광경은 마치 벼락이 치는 듯 귀신이 조화를 부리는 듯 으리번쩍하더랍니다.

 

而親駐馬按轡 手招東人

그런데 천자가 친히 말을 멈추고 고삐를 당긴 채, 손짓하여 우리 조선 사람을 불러

 

令平立仰視

대등하게 서서 우러러보도록 했다는군요.

 

其鼻脊隆起 直揷天庭

그의 콧날은 우뚝 솟아 두 눈썹 사이까지 쭉 뻗었고,

 

眼尾甚長 橫拂鬢間

눈꼬리는 몹시 길어 귀밑머리 부분까지 옆으로 뻗쳤으며,

 

鬍髯若林 楞骨如岳云

턱수염은 덤불 같고 광대뼈는 불끈 튀어나왔더랍니다.

 

吾答曰 此始皇帝副本也

그래서 내가 대꾸하기를, “이는 바로 진 시황(秦始皇)의 복사판일세.”했지요.

 

惠風曰 何以知之

혜풍이 묻기를, “어찌 그런 줄 아십니까?”하기에,

 

曰吾已識之於三才圖會帝王像中矣[각주:6]

내가 이미 삼재도회(三才圖會)의 제왕상(帝王像)을 보고 알았네.”했더니,

 

三人者皆大笑

형암ㆍ초정ㆍ혜풍 이 세 사람이 모두 크게 웃으며

 

對我不復自詑其奇觀

내 앞에서 다시는 남달리 중국의 장관을 본 것을 자랑하지 않더군요.

 

 

 

향조가 쓴 燕巖山居의 특징

 

炯也得香祖[각주:7] 燕巖山居四字以贈

형암이 향조(香祖)가 쓴 연암산거(燕巖山居)’ 넉 자를 얻어 와서 주기에,

 

故已刻揭山齋 而其眞本奉納

이미 새겨 산중의 서재에 걸고 그 진본은 형에게 드리니,

 

合附古杭帖[각주:8] 以爲傳久之地 如何

고항첩(古杭帖)에 함께 붙여 넣어서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其印首章 爲暑月亦霜氣

그 수인(首印 서화의 앞 부분에 찍는 도장 )무더운 여름철에도 서리 내린 듯 서늘하다.暑月亦霜氣고 하였고,

 

名字章及尾識 稱德園 未知其字與號也

낙관(落款) 및 말미에 덕원(德園)’이라 칭했는데 그것이 그의 자인지 호인지 모르겠습니다.

 

 

 

검서관이 된 세 사람에게 전하는 말

 

三人見啣 巧湊一團

이 세 사람의 현재 직함이 모두 검서로 공교롭게도 한데 뭉치게 된 데다가,

 

其平生遊居也同 志趣也同

그들이 평소 함께 지내며 교유하고 지취(志趣)도 같기 때문에,

 

故自中猜怨頗多 而近者尤甚云

저절로 시기와 원망을 당하는 일이 자못 많았는데 요새 와서는 더욱 심하다 합니다.

 

無足恠者

이는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 됩니다.

 

雖無猜疾 自當戒謹

비록 시기와 질투가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 경계하고 삼가야 할 텐데,

 

而况處卑而塗榮 職近而事艱

하물며 신분은 낮으면서 벼슬길은 영화롭고 직책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일은 어려우니,

 

尤當息交誡飮 專精校閱

더욱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술도 조심하면서 오로지 서적의 교열에만 전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而浮華者日噪其側

그런데 허황된 영화를 좇는 자들이 날로 그 곁에서 법석을 떨어

 

欲避無門云 勢似然矣

피하려 해도 피할 길이 없다 하니, 형세가 그럴 듯도 합니다.

 

已以一書 報知此意

이미 서한으로 이러한 나의 뜻을 알려주긴 하였는데,

 

而炯也自爾細心 能自防愼

형암은 물론 세심한지라 스스로 조심할 터이지만,

 

楚也太銳自用

초정은 너무도 재기(才氣)를 드러내고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니

 

則安能知之

어찌 능히 그 뜻을 알겠습니까.

 

 

 

대용과의 편지에서 세 사람을 거론한 이유

 

吾今枯落鄕廬 山以外事

나는 지금 시골 오두막집에 영락(零落)해 있으니,

 

不惟不聞 亦所不問

산 밖의 일은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묻지도 않습니다.

 

無關他事 第其平生愛惜者存

그들의 일에 상관할 바 없으나, 다만 평소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기는

 

與吾兄頗同 故臨書自然及之

형과 사뭇 같기 때문에 편지를 쓰면서 자연히 언급하게 된 것입니다.

 

未知其間有甞往復

그 사이에 서신 왕래가 있었으며,

 

而諸君日記已成 有所示否 -孔雀館文稿

그 친구들이 중국 다녀온 일기를 이미 완성하여 보여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答洪德保書: 1 / 2 / 3

 

 

 

  1. 1779년(정조 3) 6월 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가 유득공(柳得恭)ㆍ서이수(徐理修)와 함께 서얼 출신으로 처음 규장각의 외각(外閣)인 교서관(校書館)의 검서(檢書)로 임명된 사실을 말한다. 1781년 1월 규장각으로 소속을 옮겼다. [본문으로]
  2. 이덕무와 박제가는 1778년(정조 2) 음력 3월부터 7월까지 사은진주사(謝恩陳奏使)의 일원으로 북경을 다녀왔다. 귀국 이후 이덕무는 《입연기(入燕記)》를,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하였다. [본문으로]
  3. 간정동 회우록(乾淨衕會友錄)을 말한다. 홍대용이 중국에 갔을 때 북경의 간정동에서 중국의 문사들과 만나 필담을 나눈 것을 기록한 내용이다. 《연암집》 권1 회우록서(會友錄序) 참조. [본문으로]
  4. 북경에서 보고 들었던 일을 가리키는 듯하다. 노구교는 북경 광안문(廣安門) 밖 영정하(永定河)에 있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다리로서 노구효월(蘆溝曉月)이라 하여 북경 팔경(八景)의 하나로 일컬어졌다. 단 노구교는 지금의 북경시 서남쪽 풍대구(豐臺區)에 속해 있어 엄격히 따지면 노구교 서쪽은 북경 서쪽의 외곽지역을 가리키는 셈이 된다. 노구교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약간 착오가 있었던 듯하다. [본문으로]
  5. 유득공은 1778년 가을 문안사(問安使)의 일원으로 중국의 심양(瀋陽)을 다녀왔다. 건륭(乾隆) 황제는 그해 7월에 성경(盛京) 즉 심양에 순행(巡幸)하여 9월에 북경으로 돌아왔는데, 그 행차를 목격한 듯하다. [본문으로]
  6. 三才圖會: 명 나라 때 왕기(王圻)가 편찬한 책으로 모두 106권이다. 천문ㆍ지리ㆍ인물ㆍ시령(時令)ㆍ궁실 등 14문(門)으로 나누어 그림으로 설명하였다. [본문으로]
  7. 香祖: 반정균(潘庭筠 : 1742~?)의 자이다. 반정균은 절강성(浙江省) 전당(錢塘) 사람으로 호는 추루(秋𢈢)이다. 시(詩)ㆍ서(書)ㆍ화(畫)에 모두 능했으며, 과거 급제 후 벼슬은 어사(御使)까지 지냈다. 이덕무는 1778년(정조 2) 연행 당시 북경의 종인부(宗人府) 근처에 있던 반정균의 자택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본문으로]
  8. 古杭帖 : 홍대용은 연행에서 돌아온 직후인 1766년(영조 42) 음력 5월 15일 반정균ㆍ엄성(嚴誠)ㆍ육비(陸飛) 등 중국 항주(杭州) 출신 문사들의 편지를 모두 4개의 서첩(書帖)으로 장정하고 고항문헌(古杭文獻)이란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與潘秋𢈢庭筠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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