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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13장 - 2. 동양의 교육론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13장 - 2. 동양의 교육론

건방진방랑자 2021. 9. 17.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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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동양의 교육론

 

 

詩云: ‘伐柯伐柯, 其則不遠.’ 執柯以伐柯, 睨而視之, 猶以爲遠. 故君子以人治人, 改而止.
시경(詩經)에서 말하기를: ‘아 도끼자루를 만들지 도끼자루를 만들지, 그런데 그 법칙이 먼 데 있는 게 아니구나!’라고 했다. 도끼자루를 잡고 (도끼질하여) 도끼자루를 깍고 있으니, 그냥 한번 흘깃 보면 그 모양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군자가 사람으로써 사람을 다스릴 때 고치기만 하면 그만두어라.
 
, 豳風伐柯之篇. , 斧柄. , 法也. , 邪視也.
()빈풍벌가의 편이다. ()는 도끼자루다. ()은 법칙이다. ()는 흘려본다는 것이다.
 
言人執柯伐木以爲柯者, 彼柯長短之法, 在此柯耳. 然猶有彼此之別, 故伐者視之猶以爲遠也.
사람이 도끼자루를 잡고 나무를 베어 도끼자루를 만드는데 저 도끼자루 길이의 법칙이 이 도끼자루에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저것 이것엔 분별이 있다고 생각해서 벌목하는 사람이 그것을 보고도 오히려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若以人治人, 則所以爲人之道, 各在當人之身, 初無彼此之別.
사람으로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은 사람됨의 도가 각각 마땅히 사람의 몸에 있어 처음엔 저것과 이것의 분별이 없다.
 
故君子之治人也, 卽以其人之道, 還治其人之身. 其人能改, 卽止不治.
그렇기 때문에 군자가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곧 그 사람의 도로써 하여 다시 그 사람의 몸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고쳐졌다면 곧바로 그쳐 다스리지 않는다.
 
蓋責之以其所能知能行, 非欲其遠人以爲道也.
대개 그가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책임 지움이요, 사람에게 먼 것으로 도를 실천하도록 하는 건 아니다.
 
張子所謂, ‘以衆人望人則易從,’ 是也.
장자가 말한 보통 사람을 보듯 사람을 바라보면 따르기 쉽게 된다.’라는 게 이것이다.

 

 

 

시경의 해석학적 문제

 

이것은 시경(詩經)의 구절은 빈풍(豳風)편에 나오는 벌가(伐柯)’ ()인데, 해석을 하기 전에 먼저 시경(詩經)이 갖고 있는 해석학적 문제에 대해서 말을 하겠습니다. 시경(詩經)은 원래 고대인들의 천진난만한 인간의 세계를 담고 있는 것인데, 그게 상당히 왜곡되어 버렸어요. 시경(詩經)사무사(思無邪)’라고 하는데, 그게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도덕적인 명제로만 해석되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 논어(論語) 강의를 하면서 몇 편 보았지만, 공자시대만 해도 이미 왜곡이 상당히 심했어요. , 공자가 이해한 시경(詩經), 중용(中庸)에 주를 달면서 주자가 해석해 놓은 시경(詩經)이 다릅니다. 물론 시대를 반영하고 개인의 의지를 반영하는 차이겠지만, 원래는 무엇을 의미했었느냐 하는 것은 밝혀내야죠.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아요. 특히 이 벌가(伐柯)’ ()은 더 그렇습니다. 내 책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304p)에 원효가 이 벌가(伐柯)’ ()을 인용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주자의 해석과는 아주 달라요. 몰가부(沒柯斧)라고 그랬죠. “도끼 자루가 없는 도끼를 누가 나에게 주겠느냐. 나는 그 도끼로 하늘의 기둥을 깎겠다.”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주자가 해석한 대로 하겠어요. 그리고 다음에 최영애 교수를 모셔다가 시경(詩經)을 들을 때 더 자세히 하도록 합시다.

 

()’라는 것은 ()’변이 들어가 있어서, 도끼자루 입니다. 도끼에 구멍이 있죠? 거기에 자루를 끼워서 지금 다른 하나의 새로운 도끼자루를 깎고 있는 겁니다. 상상이 됩니까? 그런데 도끼자루를 만드는 도구가 뭡니까? 도끼죠! 그러면, 도끼자루를 만드는 데 소용되는 도끼자루의 법칙, 사이즈라든가 굵기라든가, 이런 것은 자기가 도구로 쓰고 있는 도끼의 자루를 보면 알거 아니겠습니까? 다시 봅시다. 그러니까 주자는 이 벌가(伐柯)’ ()()가 가까운 데 있는 것을 모르고 밖에서 구한다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을 했는데, 정말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도끼자루를 만드는 것으로 앞 절의 내용을 상징화시키는 그런 비유를 과연 했을까도 싶고, 오히려 도끼의 구멍에 박아 넣을 도끼자루를 깎아 낸다는 것이 성()과 관련되어서, 여자를 정복한다든가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카노오 요시미쯔加納喜光詩經 上pp.512-513 참조.하는 생각도 들지만, 중용(中庸)에 나타나 있는 벌가(伐柯)’ ()에 대한 해석은 주자의 해석 밖에는 없어서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방임적 교육과는 다른 동양의 교육론

 

고군자 이인치인 개이지(故君子 以人治人 改而止)’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이지(改而止)’입니다. 주자 주를 보세요. ‘그 사람이 잘못을 고치면 즉시 그치고 다스리려 하지 말라. 그것은 그가 능히 알 수 있고 능히 행할 수 있는 바로써 책하는 것이며, 사람을 멀리 하여 도()를 행하고자 함이 아니다.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중인(衆人)으로써 사람을 바라보면 사람들이 따르기 쉽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其人能改 卽止不治 蓋責之以其所能知能行 非欲其遠人以爲道也 張子所謂以衆人望人則易從 是也].’

 

개이지(改而止)’ 사람을 다스릴 때에는 그 사람이 잘못을 고치면 그 다스리는 것을 스톱(Stop)해라, 더 이상 꼬치꼬치 지적해 가면서 다스리려고 하지 마라!

 

삐아제(J. Piaget)니 니일(A.S. Neil)섬머힐(Summerhill)이니 몬테소리(M. Montessori)니 그런 것들이 방임주의적 교육인데, 난 그런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섬머힐 같은 데서는 애들이 피아노 위에 올라가서 놀아도 그냥 두죠. 자기가 피아노 위에서 뛰어 놀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할 때까지 내버려둔단 말이요. 이건 완전히 개판입니다. 돈 많은 새끼들의 지랄이라고. 주자 주에 나와 있는 고친다[]’는 것의 의미는 자유방임이 아니라, 그들이 능히 알 수 있고, 능히 행할 수 있는 바를 가지고서 왜 그 능한 바에 못 미치느냐고책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본성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해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교육의 목적이란 그 사람을 도()에서 멀게 하려는 게 아니고, 그 본성에 가지고 있는 능지능행으로 돌아가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게 교육하는 목적이라고! 그것으로 방향을 틀면 그 순간에 ‘stop’하는 것을 개이지(改而止)’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동양의 교육이라고 하면 서당에 앉아서 하늘 천, 따 지 ~’하면서 한문 외우는 것을 먼저 쉽게 연상하게 되어서 그런지, 교육론 자체를 주입식이나 군대식으로 보는데 그건 너무도 어이없는 넌센스죠, 넌센스! 이런 식의 사고 자체에 오류가 있는 게, 동양과 서양을 비교할 때 서로 다른 기준을 들이 댄다는 것입니다. 서양을 말할 때는 몬테소리나 섬머힐의 타락적 측면에 주목하기보다는 슬쩍 지나쳐 버리고 그것의 좋은 측면만을 가지고 구라를 피는 반면에, 동양을 말할 때는 유교의 타락적 측면만을 가지고 씹어대기 바쁜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동양 교육론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양지양능 사상이 뚜렷이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양명학에서는 이런 기준이 아주 명료하게 서 있어서, 몬테소리고 섬머힐이고 양지양능설(良知良能說)과 비교하게 되면 이야기할 건덕지가 없는 것입니다. 양지양능설(良知良能說)에 다 있는 것이니까. 동양에는 생각보다 그런 래디칼(radical)한 사상이 많습니다. 하다못해 양명 좌파인 이탁오(李卓吾) 같은 사람은 인류의 진리는 동심(童心) 하나 밖에 없다는 사상을 펼쳤거든요. ‘모든 것은 동심으로 돌아가라. 동심의 발현을 방해하는 모든 행위는 사기이고 허위이다.’ 이 말은 이탁오의 유명한 스테이트먼트(Statement)로서, 진시황을 높이는 등 모든 역사적 판단을 뒤엎어 버렸는데, 결국은 그 사화에서 견디지 못하고 감옥에 갇혀 죽습니다. 그것도 그냥 죽지 않고 칼로서 자기 모가지를 팍 자르고 죽었어요. 멋있게 산 인생이죠. 그래서 나는 이탁오를 좋아합니다. 이탁오가 당대의 지식사회의 위선에 항거했던 그 정신을 사랑합니다.

 

주자주에 장자(張橫渠)가 말하기를, (사람을 바라볼 때 얼마나 거룩한 존재인가 하고 고고한 잣대를 들이대어 볼 게 아니라) “평범한 중인(衆人)으로 사람을 바라보라.” 양심선언할 적에 내가 보통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그랬는데, 교육의 목적이라는 게 특별한 사람 만드는 게 아니고 중인으로서 쉽게 따르게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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