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자와 기록자
예수의 말을 예수의 쌍둥이가 기록하다
❝화자와 기록자, 그리고 독자, 이 삼자의 해석학적 일체감은 도마복음서를 포함한 나그함마디 문서 전체를 일관하는 정조(情調)였다. 화자, 기록자, 독자가 모두 예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초기 예수운동의 당연시되었던 모티프였다.❞
이 서장은 콥트어 판본뿐만 아니라 옥시린쿠스사본(POxy) 654번에도 동일한 내용과 형식의 문장이 실려있다. 따라서 114개의 로기온자료를 관(冠)하는 것으로 정확한 의도를 가지고 편집된 총론(總論)임이 분명하다. 후대의 첨가가 아닌 것이다. 이 서장은 도마복음서 전체의 성격을 규탐케 만드는 창(窓)인 것이다.
우리는 지난 주까지 ‘살아있는 예수’가 과연 어떠한 함의를 지니는 지를 살펴 보았다. 죽은 예수가 아닌 살아있는 예수, 죽음에 대한 특별한 의미부여나 종말론적 전제가 없이 살아움직이는 현존(現存, Da-Sein)의 예수! 이 예수가 한 일은 무엇이었나?
서장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매우 단순한 사실이다: “살아있는 예수는 말하였다(the living Jesus spoke).” 다시 말해서 그는 ‘말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말한 것이 아니라, 집필했다고 한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예수가 대 사상가였고 문장가였기에 아람어나 희랍어로 직접 글을 썼고, 그 쓴 글이 우리에게 전하여 내려온다고 한다면 기독교는 아주 단순한 문제가 되어버린다. 고민거리를 안겨줄 하등의 소지가 다 사라져버린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43)나 필로(Judaeus Philo, c.BC 10~AD 50)나 플루타르크(Plutarch, c.AD 46~119)와 같은 동시대인들의 저작을 생각할 때, 예수도 충분히 자신의 저작을 후대에 남기는 사상가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신학의 제문제는 예수저작물에 대한 서지학적 연구로 좁혀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쓰지 않았다. 말하였다.
살아있는 예수가 ‘말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살아있는 예수가 말한다는 것은, 골방에서 혼자 명상하거나 독백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살아있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에 둘러싸여서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예수의 메시지는 일차적으로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그 순간 말은 허공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말은 순간 무화(無化)된다. 그러나 경청한 사람들에게 예수의 말이 이해되었다면 그 말은 그들의 마음속에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오늘날 같이 보존력이 탁월한 디지털 녹음기가 있어서 예수의 말을 녹음해둘 수 있었다면 신학적 논쟁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였다는 것은 그 말을 후세에 남기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는 단지 그 말을 듣는 당대의 사람들을 깨우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을 뿐이다. 예수는 자기의 말이 후세에 남을지 안 남을지를 걱정한 쪼잔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 이 화려한 코린트 양식의 돌기둥이 가이사랴 빌립보 제우스신전의 전면 네 기둥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예수의 말이 너무도 좋았다. 따라서 타인에게도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또 후세의 사람들에게 영원히 전하고 싶다. 이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예수 본인일 수가 없다. 반드시 타인이 개재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세에서 말을 전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문자에 의한 기록(recording by letters)이었다. 따라서 서장에 ‘말하였다’와 ‘기록하였다’가 짝을 이루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말과 기록의 주체는 다르다. 말의 주체는 살아있는 예수였다. 그렇다면 기록의 주체는 누구였을까? 서장은 그 기록의 주체를 ‘디두모 유다 도마(Didymos Judas Thomas)’라고 선언한다. 디두모 유다 도마에 관해서는 이미 제37편에서 논하였다(『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 1, 333~7), 디두모나 도마나 다 ‘쌍둥이’라는 뜻이고, 쌍둥이의 이름은 유다인데, 유다는 예수의 형제이다. 따라서 도마복음서를 집필한 도마는 ‘예수의 쌍둥이’라는 것이다. 과연 예수에게 쌍둥이형제가 있었나 없었나 하는 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예수에게 7남매 이상의 가족이 있었다는 것은 마가(6:3)가 밝혀놓고 있는 사실이고 그 이상의 정확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은 어차피 추론에 속하기 때문이다. 시리아전통은 예수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의 쌍둥이 존재여부에 대한 논란은 전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쌍둥이라는 심볼리즘(symbolism)이다. 그 쌍둥이가 예수의 쌍둥이는 타인의 쌍둥이든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쌍둥이라는 심볼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예수의 분신적 존재를 예수 말씀의 기록자로서 설정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말하였다. 과연 뭘 말했을까? 개똥이나 쇠똥이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시정 항간의 잡설이었을까? 예수가 말한 것은 ‘은밀한’ 것이다. 우리의 깨우침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며 천국의 비밀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예수의 말씀은 고도의 상징성과 비유를 동원하기 마련이다. 결코 쉬운, 평범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말한다는 것과 기록한다는 것 사이에는 항상 해석학적 갭이 있다. 도올이 강의를 해도 그 현장에서 도올의 강의를 들으면서 기록하는 학생들의 노트를 검색해보면 모두가 다르다. 어휘의 선택이 다를 뿐 아니라 어떤 때는 논리적 구조도 다르고, 전달되는 의미가 전혀 상반될 때도 있다. 귀로 듣는 행위와 손으로 기록하는 행위는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간발의 시간 속에는 어마어마한 해석학적 과정(hermeneutical process)이 개재된다. 고막이 떨리는 순간, 청신경은 그 신호를 뇌로 전달하여 그것을 의미체계로 재구성시킨다. 그 재구성된 것을 다시 문자의 형상과 결합시켜 손의 근육이 움직이게 되기까지, 한 없이 복잡하고 정교한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이때 뇌 속의 재구성작업에 가장 중요한 것은 화자(speaker)의 언어가 의도하는 의미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자(recorder) 자신의 개념적 인식체계이다. 이것은 기록자에게 이미 내재하고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 과정을 엠파티(emphathy) 또는 심파티(sympathy), 혹은 개념과 감정을 총괄하는 교감(intercourse)이라고 부른다면, 이 교감을 담지하는 주체는 예수의 분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의 말을 기록하는 자는 예수와 동일한 수준의 지식과 감정과 선의와 경지를 보유하고 있지 않으면 곤란하다. 나의 강의를 노둔한 초등학생이 듣고 적었다면, 과연 그 기록을 가지고 나 도올이 세상에 선포하는 복음(福音)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제 독자들에게 서장이 말하는 쌍둥이의 의미는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초기 기독교문헌의 구성방식에 있어서는 누가 어떠한 의도에서 어떠한 심볼리즘을 동원하든지간에 그것은 그 문헌의 창출자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였다. 오늘과 같이 정통ㆍ이단을 운운하는 교리적 속박이 전혀 없는, 백화노방(百花怒放)의 시대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말을 예수의 분신과도 같은 예수의 쌍둥이, 예수를 너무도 잘 알고 이해하는 쌍둥이가 기록했다고 하는 사실은 곧 그 기록을 읽는 우리 자신도 예수의 쌍둥이, 즉 예수의 분신, 보다 과감하게 말하면 예수와 동일한 경지의 인간, 아니, 예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화자와 기록자, 그리고 독자, 이삼자의 해석학적 일체감은 도마복음서를 포함한 나그함마디 문서 전체를 일관하는 정조(情調)였다. 화자, 기록자, 독자가 모두 예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초기 예수운동의 당연시되었던 모티프였다.
▲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수행승으로 꼽히는 사람은 테베의 세인트 폴(St. Paul of Thebes)이다. 폴에 관해서는 유명한 라틴 벌게이트 성서번역자 제롬(St. Jerome, 347~420)이 전기를 남겼다. 폴은 원래 알렉산드리아 부호의 아들이었는데 AD 250년 데시우스황제의 박해를 피하여 16살 때부터 사막에서 고독한 수행을 시작하였다. 나중에 그의 매형이 재산을 차지하려고 하자 세속을 멀리하고파 홍해 부근의 아라비아 사막 깊숙한 곳으로 수행처를 옮긴다. 종려나무가 있고 샘물이 흐르는 곳에 한 동굴을 발견한다. 그는 이곳에서 안식처를 찾았고 그 후 90년 이상을 홀로 조용히 기도만 하다가 113세에 세상을 떴다. 바로 그 동굴 위로 풀 수도원(Monastery of St. Paul)이 건립되었다. 나는 이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너무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수도승들의 분위기가 한없이 순결했다. 개방적의었고 속인들에 대한 일체의 편견이 없었다. 다시 가보고 싶은 곳, 도마복음서 말씀의 분위기가 절로 느껴지는 아름다운 성소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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