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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어 사전 - 현존재(Dasein) 본문

어휘놀이터/개념어사전

개념어 사전 - 현존재(Dasein)

건방진방랑자 2021. 12. 18.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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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재

Dasein

 

 

나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이 잠시 정지되어 있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은 누구나 한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SF 영화에서 흔히 보는 장면이지만 생각만 해도 신난다. 이를 테면 은행에서 돈을 마음껏 가져올 수도 있고, 평소에 미워하던 사람의 머리통을 한 대 갈겨줄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 상상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이외에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어야 하는데, 은행에서 돈을 가져오거나 미워하는 사람의 머리통을 때리려면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세계의 일부(돈이나 머리통)를 반드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이고 어디까지가 세계일까? 움직일 수 있으면 이고 고정되어 있으면 세계일까? 그럼 내 장 속의 대장균, 내 핏줄 속의 백혈구는 나일까, 세계일까? 투명인간이 되는 약을 발명했다고 하자. 투명인간의 신체 중에 투명한 부분은 어디까지여야 할까? 투명인간이 뱉은 침이나 흘린 피, 잘라낸 머리카락은 투명해야 할까, 그렇지 않아야 할까?

 

 

얼핏 쉬워 보이는 문제가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나와 세계가 칼로 두부 자르듯이 매끈하게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인간을 세계--존재(In-derwelt-sein)라고 부른다그냥 세계내존재라고 하지 않고 굳이 하이픈을 붙인 이유는 주체와 세계가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는 세계와 별개로 존재하는 개체가 아니라 늘 세계 속에 처해 있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고 오직 나만 움직일 수 있다든가, 모든 것이 눈에 보이고 오직 나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를 라고 한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스승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을 좇아 19세기를 풍미했던 실증주의를 거부한다. 실증주의는 주관과 객관의 분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이 전제에서 모든 논의를 전개했다(따라서 실증주의에서는 앞에서 말한 상상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현상학적 존재론에 따르면, 주관과 객관은 구분할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조어(造語) 기능이 뛰어난 독일어의 특성을 살려 하이데거는 세계--존재, 즉 인간존재를 현존재(現存在)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현존재란 다자인(Dasein)을 번역한 용어인데, 다자인은 ‘da(거기 혹은 그때)’‘Sein(존재)’을 결합해 만든 말이다. 영어로는 There-Being이라고 번역한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굳이 현존재라는 까다로운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는 뭘까? 그의 의도는 실증주의적이고 생물학주의적인 실체로서의 인간 개념(흔히 말하는 자아’)을 거부하려는 데 있다. 인간은 사물처럼 응고되고 결정화(結晶化)된 존재가 아니다. 사물과 달리 인간은 의식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을 의식하는 존재이지 무엇에 의해 의식되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방식은 사물의 그것과 다르며 또 달라야 한다.

 

그럼 인간, 즉 현존재의 존재방식은 뭘까? 현존재는 존재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은 세계 속에 존재하면서도 세계를 대상화시켜 바라볼 수 있는 특수한 존재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한 인간은 객체이며, 세계를 마주 대하고 있는 한 인간은 주체다. 즉 인간은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면서도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살아가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왜 사는가를 묻는다. 세계의 일부이면서 세계의 주인이기도 한 존재방식, 이를 가리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이중적 존재방식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인간의 존재방식을 사물의 존재방식과 동일한 것으로 가정하는 실증주의적 인간관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세계--존재나 현존재와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 쓴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하이데거는 인식론에 치우친 기존의 형이상학으로는 존재론을 다룰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는 데 익숙한 형이상학의 언어는 개별 존재자를 말할 수는 있어도 존재 일반을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기술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를 시에서 찾았다. 그에게 현존재는 일종의 철학적 시어(詩語)인 셈이다.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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