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윤 양거원을 보내며 쓰다
송양거원소윤서(送楊巨源少尹序)
한유(韓愈)
벼슬을 잘 관두는 사람의 표본이 된 양거원을 기리며
옛날에 벼슬을 잘 그만 둔 사례를 보여준 이소(二疏)
昔疏廣ㆍ受二子, 以年老, 一朝辭位而去. 于時公卿, 設供帳祖道都門外, 車數百兩, 道路觀者, 多歎息泣下, 共言其賢. 漢史旣傳其事, 而後世工畵者, 又圖其迹, 至今照人耳目, 赫赫若前日事.
현재 벼슬을 잘 그만둔 사례를 보여준 양거원(楊巨源)
國子司業楊君巨源, 方以能詩, 訓後進, 一旦, 以年滿七十, 亦白丞相, 去歸其鄕. 世常說‘古今人不相及,’ 今楊與二疏, 其意豈異也? 予忝在公卿後, 遇疾不能出. 不知楊侯去時, 城門外送者幾人, 車幾兩, 馬幾駟, 道傍觀者亦有歎息知其爲賢與否, 而太史氏又能張大其事爲傳, 繼二疏蹤跡否. 不落莫否. 見今世, 無工畵者, 而畵與不畵, 固不論也. 然吾聞楊侯之去, 丞相有愛而惜之者, 白以爲其都少尹, 不絶其祿. 又爲歌詩以勸之, 京師之長於詩者, 亦屬二和之. 又不知當時二疏之去, 有是事否. 古今人同不同未可知也.
양거원, 벼슬을 관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다
中世士大夫, 以官爲家, 罷則無所於歸. 楊侯始冠, 擧於其鄕, 歌「鹿鳴」而來也. 今之歸, 指其樹曰: “某樹吾先人之所種也, 某水某丘吾童子時所釣遊也,” 鄕人莫不加敬, 誡子孫, “以楊侯不去其鄕爲法,” 古之所謂: ‘鄕先生沒而可祭於社’者, 其在斯人歟. 其在斯人歟.
해석
옛날에 벼슬을 잘 그만 둔 사례를 보여준 이소(二疏)
昔疏廣ㆍ受二子, 以年老,
옛적에 소광(疏廣)과 소수(疏受) 두 사람이 늙었다고 하여
一朝辭位而去.
하루아침에 벼슬을 사양하고 떠났다고 한다.
于時公卿, 設供帳祖道都門外,
이때에 공경(公卿)이 공장(供帳)을 도성의 문 바깥에 설치하여 노제(路祭)를 지내니,
車數百兩, 道路觀者,
수레가 100량이고 도로에서 보는 사람이
多歎息泣下, 共言其賢.
대부분 탄식하고 눈물을 흘려 함께 그들의 어짊을 이야기했다.
漢史旣傳其事, 而後世工畵者, 又圖其迹,
한나라 사관(史官)은 그 일을 기록했고 후세의 화공들은 또한 그 상황을 그려
至今照人耳目, 赫赫若前日事.
지금 사람들의 이목에 보여주니, 환하여 마치 엊그제 일 같기만 하다.
현재 벼슬을 잘 그만둔 사례를 보여준 양거원(楊巨源)
國子司業楊君巨源, 方以能詩, 訓後進,
국자사업(國子司業)인 양거원이 시에 능하여 후배를 가르치다가
一旦, 以年滿七十,
하루아침에 나이가 70살을 채웠다며,
亦白丞相, 去歸其鄕.
또한 승상에게 아뢰고 고향으로 떠났다.
世常說‘古今人不相及,’
세상엔 항상 ‘옛사람과 지금 사람이 서로 미치지 못한다.’고 하지만
今楊與二疏, 其意豈異也?
지금의 양거원과 소광ㆍ소수는 그 뜻이 어찌 다르겠는가?
予忝在公卿後, 遇疾不能出.
나는 외람되이 공경(公卿)의 뒤에 있고 병까지 들어 나가보지 못했다.
不知楊侯去時, 城門外送者幾人,
알지 못하겠구나, 양거원이 떠날 적에 밖에서 전송한 자가 몇이었는지?
車幾兩, 馬幾駟,
수레가 몇 량이었는지? 말이 몇 필이었는지?
道傍觀者亦有歎息知其爲賢與否,
길가에서 보던 사람이 또한 탄식하며 그의 어질거나 그렇지 않음을 알았는지?
而太史氏又能張大其事爲傳,
사관(史官)이 또한 그 일을 확대하여 전을 지어
繼二疏蹤跡否.
두 소씨의 종적을 계승했는지?
不落莫否.
그 상황이 적막했는지?
見今世, 無工畵者,
그러나 지금 세상을 보니 화공이 없어 그렸는지,
而畵與不畵, 固不論也.
그리지 않았는지는 진실로 논할 게 아니다.
然吾聞楊侯之去, 丞相有愛而惜之者,
그러나 나는 들어보니, 양후가 떠날 적에 승상이 아까워하고 애석하게 여겨
白以爲其都少尹, 不絶其祿.
임금께 아뢰어 도읍의 소윤이 되게 함으로 녹을 끊진 않도록 했단다.
又爲歌詩以勸之,
또한 노래와 시를 지어 권면하니,
京師之長於詩者, 亦屬二和之.
경사(京師)에서 시에 뛰어난 사람이 역시 이어 화답하였다고 한다.
又不知當時二疏之去, 有是事否.
또한 당시 소광ㆍ소수 두 사람이 떠날 적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古今人同不同未可知也.
그러니 옛사람과 지금 사람이 같은지, 다른 지도 알 수가 없다.
양거원, 벼슬을 관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다
中世士大夫, 以官爲家,
중세엔 사대부는 관청으로 집을 삼아,
罷則無所於歸.
그만두면 돌아갈 곳이 없었다.
楊侯始冠, 擧於其鄕,
그러나 양후가 처음에 벼슬할 적에 자신의 고향에 천거되어
歌「鹿鳴」而來也.
과거 급제자에게 베푼 잔치에서 연주되던 노래인 「녹명」을 노래하며 왔다.
今之歸, 指其樹曰:
지금 되돌아감에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某樹吾先人之所種也,
“저 나무는 우리 선조가 심은 것이고,
某水某丘吾童子時所釣遊也,”
저 물과 저 언덕은 내가 어릴 때 낚시질하던 곳이다.”
鄕人莫不加敬, 誡子孫,
이에 고향사람들이 공경해마지 않으며 자손을 경계했다.
“以楊侯不去其鄕爲法,”
“양후가 고향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법도를 삼아라.”
古之所謂: ‘鄕先生沒而可祭於社’者,
옛사람이 “고향의 선생이 돌아가시면 사(社)에서 제사지낼 만하다”라고 했던 말이,
其在斯人歟. 其在斯人歟.
이 사람에게 있구나, 이 사람에게 있구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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