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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섬과 춘천 여행 - 14.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가 아닌 느슨히 풀린 활시위가 되길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남이섬과 춘천 여행 - 14.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가 아닌 느슨히 풀린 활시위가 되길

건방진방랑자 2019. 10. 21.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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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20분 정도만 있기로 했기에, 시간이 많은 것도 적은 것도 아니었다. 태기와 성민이는 심드렁해졌는지, 더 이상 둘러보지 않고 그냥 내려가더라. 이에 반해 준영이는 길을 따라 쭉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도 그 뒤를 따라 함께 올라갔다.

 

 

  준영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곳. 오르니 그래도 좋긴 하다.

 

 

 

청춘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준영이는 작년 2학기부터 함께 하며 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을 함께 한 영화팀의 일원이기도 했지만, 등교시간이 차츰 늦어지면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그 후로 올핸 학교생활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더 거리감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땐 함께 오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제일 꼭대기에 올라가니, 카페가 있더라. 거기엔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파라솔이 쳐져 이어서 준영이와 함께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가혹한 청춘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누구나 청춘은 아름답다고 하고, 무엇이든 꿈꿀 수 있던 시기라고만 한다. 하지만 청춘이 그렇게 아름답게 치장되는 건, 청춘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시기를 다 겪고 지나쳐버린 중년이 그런 말을 한다. 이에 대한 도올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누가 청춘을 아름답다 말했던가? 청춘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노인들의 청춘에 대한 회상만이 아름다운 것이다. 청춘에 대한 추억이 아름다운 것이다. 추억은 항상 아름다운 로맨스만을 추상해내는 능력이 있다. 거기에 부수된 불안과 공포와 고통은 떨쳐낸다. 청춘의 압도적인 사실은 좌절이다. 절망에는 내일이 없으며, 남아있는 재난의 기억조차 없다.

-김용옥, 사랑하지 말자, 통나무, 2012, pp18

 

 

[습지생태보고서]라는 드라마에 나온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냄비받침으로 삼는 장면. 청춘이기에 아픔을 강요하고 더욱 옥죄는 건 아닌가.

 

 

이 말은 곧, 청춘이 아름답다는 말은 현실에서 느껴지는 말이라기보다 과거는 미화된다는 말처럼 한껏 의식 속에서 미화된 청춘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말이다. 준영이가 지금 느끼는 여러 감정들과 그리고 삶에 대한 불안들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청춘들이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에 힘들고 불안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모든 감정들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줬고, 그런 감정들을 저주하거나 억압하려 하기보다 맘껏 느끼며 나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 말과 함께 너무도 완벽한 상으로 자신을 치장해선 안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누구나 그렇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겐 좋은 사람으로,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그러니 평소의 자기와는 달리 한껏 유쾌한 듯, 책임감 있는 듯, 뭐든 잘할 수 있는 듯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무척이나 에너지를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이다. 평소의 내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에너지가 소모되어 더 이상 그렇게 행동할 수 없을 땐, 사람들에게 실망을 시켜주게 되고 나 또한 그로 인해 자신에 대한 미움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준영이에겐 완벽해 보일 필욘 없어라는 말을 해준 것이다.

 

 

고산지대에서만 자란다는 '흰두메양귀비'꽃이다.

   

 

너는 나다라고 외치다

 

그러자 준영이도 자신이 여러 겹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더라. 포장은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건 어찌 보면 나의 약한 부분을 감출 수 있는 방어막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에반게리온이란 애니메이션에선 ‘AT필드라는 방어막으로 겹겹이 감싸인 포장을 표현한다. 그건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어막이기에 나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나 자신과 소통하려는 수많은 생각이나 말들을 쳐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 AT필드가 깨진다는 것은 적의 공격을 당한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타자와 소통하며 점차 다른 개체로 변해가는 계기이기도 하다. 준영이는 자신이 여러 겹으로 포장되어 있다라고 말하며, 이런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AT필드는 방어막이다. 그렇기에 남을 완전히 차단하는 막이기도 하다. 유용한 선은 어디까지일까?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 준영이가 전혀 남 같이, 또는 특이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너는 나다라는 말을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나 또한 AT필드를 겹겹이 치고 날 방어하며 살아왔던, 그리고 살아가는 존재이니 말이다. 어려서부터 사람들과 말을 잘하지 않게 됐던 것은, 나를 노출하여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듣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두껍게 방어막을 치며 나 자신을 고집하게 됐던 것이다. 지금은 그 때에 비하면 그런 공포에서, 그런 불안에서 많이 놓여난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삶에 대한 긴장도는 높은 편이다. 난 준영이를 보면서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떠오르며 위태롭다는 생각을 들곤 한다. 어쩌면 준영이의 모습을 보며 나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준영이든 나든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점차 풀 수 있기를, 그리고 느슨해진 활시위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팽패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그걸 보면서 잔뜩 긴장된 내와, 준영이가 보인 것, 그건 우연일까?

 

 

420분이 되니, 아이들에게 전화가 오더라. 모두 출입문 쪽에 모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준영이와 나는 천천히 걸어서 산책로를 내려갔다. 펜션으로 돌아가는 길은 1.6밖에 되지 않는다. 30분도 채 걸리지 않기에,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걷기에 충분한 길이다. 오늘 저녁엔 요리를 직접 만들어야 하고, 아이들이 교사들을 위해 준비한 깜짝 파티까지 기다리고 있다. 단재학교의 아름다운 역사로 기억될 저녁 시간을 위해 우린 열심히 펜션으로 걸어갔다.

 

 

이제 다시 펜션으로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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