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시선의 고문’에 시달려야 하고 스스로의 내면을 단단히 감싸지 않으면 안 되었다. -64쪽
꼭 학교를 다니고 졸업을 해야만 하겠냐? 나중에 내키면 그 때 가서 혼자 공부하면 안 될까? 하여튼 나는 꼴리는 대루 할 거야. 달마다 학력고사에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고 일등에서 꼴찌까지 석차를 매기구 말야. 너 시험지에 쓴 내용이 기억나니? 거의가 개떡 같은 속임수들이다.
…… 그건 그 때 가서 몸으로 때우든지, 우리가 저지른 실수의 흔적들을 치우든지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 나는 각오를 하구 있어. 저 봐, 길거리에서 애들이 막 총에 맞아 죽구 그러는데, 어쨌든 우린 살아갈 거잖아. 하여튼 앞날은 잘 모르지만 제 뜻대루 할 수 있잖냐구. 너 어른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게 고작 뭔지 생각해 봐라. 우리 어머니는 내가 의사가 되어주기를 바라구 있어. 네 아버지는 아마도 검판사나 무슨 변호사라도 되기를 바라지 않을까? 자기들이 겪은 인생이 어렵고 무서웠으니까. 고작 신사처럼 살아갔으면 하는 거야. 이런 초라한 소망은 어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아. 늘 쫄리구 두렵구 그러니까 별의별 수단을 다해서 더 출세할라구 평생 몸부림이지. 나는 그런 줄에서 빠질거야.(75p)
세상만사가 다 우연인데요. 가치를 부여하면 필연이 되겠지요. -112쪽
언젠가 잘 가던 놀이터에서 말뚝 구멍을 들여다보게 되었는데요. 그 안에 누가 넣었는지 구슬이 들어 있더라구요. 손가락을 넣어도 밑에까지 닿지 않아요. 주머니칼이라두 있으면 좋았겠는데. 하여튼 손가락을 넣어 간신히 끝에 닿긴 했죠. 손가락 사이가 터지고 째지고 그랬어요. 조금씩 끌어올리려다보면 자꾸만 미끄러지고, 하여튼 한 시간쯤 걸려서 그 구슬을 빼냈어요. 손 안에 쥐고 보니까 김이 새더군. 그래서 그냥 구멍 안에 다시 넣어 버렸어요. -113쪽
셋은 굴 위의 바위에 올라가 멀리서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인호가 말했다. “거참 이상해. 여기 있으면 저기가 그립구 …… 저기로 가면 지겨워서 여기에 틀어박히구 싶어.” -135쪽
세월이 무슨 재물 같은 거냐? 뒷 전에 쌓아두고 허비하는 게 아니라구.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지평선에 꽃밭을 가꾸는 거다. -163쪽
“근데 왜 잘 그렸다든가 못 그렸다든가 하는 말을 안 해주는 거죠?”
그랬더니 장씨 아찌는 그 큰 입을 벌리고 빈정거리듯이 실실 웃으며 오히려 나에게 물었어요.
“어떤 게 잘 그린 건데? 나는 그걸 아직도 모르겠단 말야.”
“실기 시험에 붙어야 하잖아요? 시험관이 어떤 그림을 합격시킬지 …… 뭐 그런 거.”
“그런 거 배우러 왔으면 나는 자신 없는데 …… 내가 보기엔 셋다 좋아. 서로 다르니까. 서투른 것도 다 자기 솜씨 나름이잖아.” -203쪽
나는 권투를 좋아해요. 사각 링에 딱 갇히면 각자 무지하게 외로울 거야. 온 세상에 바로 코 앞의 적 뿐이니까. -205쪽
눈에 보이는 것만을 숭배하는 자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만 빠져 있는 자는 그보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파멸하는 것과 파멸하지 않을 영원한 것. 이 두 길을 더불어 갈 때 그는 파멸하는 것으로써 죽음을 건너고 파멸하지 않을 영원한 것으로써 불멸을 얻으리라. -252쪽
누구나 삶의 고통은 몸 안의 어느 깊숙한 곳에 간직한다.
“얼마나 돌아다닐 건데?” “몰라, 신나면 쭈욱 그런 대루 살 거야” “집은, 학교는, 엄마는 ……”하다가 내가 먼저 웃고 말았다. “무슨 집 떠나는 싯달타 같구나!” “대단한 건 아니구 그저 이렇게 사는 걸 한번 바꿔보려고 해.” -250쪽
그에게는 산다는 게 두렵거나 고생스러운 것도 아니고 저 하늘에 날아가는 멧새처럼 자유롭다. 이른 봄에는 바닷가 간척공사장을 찾아가 일하다가, 오월에 보리가 팰 무렵이면 시골마을로 들어가 보리 베기를 도우며 밥 얻어먹고, 여름에는 해수욕장이나 산간에 가서 일거리를 찾고, 늦여름부터 동해안에 가서 어선을 탄다. 속초에서부터 오징어떼를 따라 남하하다가 울산 근처까지 내려오면 가을이 깊어져 있다. 이제는 다시 농촌으로 들어가 가을 추수를 거든다. 황금들판에서 들밥에 막걸리 마시고 논두렁에 누워 곤한 낮잠 한숨 때리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단다. 그리고 겨울에는 다시 도시로 돌아온다. 쪽방을 한 칸 얻고 거리 모퉁이나 버스 종점이나 동네 시장 어귀에 자리를 잡아 드럼통과 손수레 세내어 군고구마 장수로 나선다. 아니면 돈 좀 더 보태어 포장마차를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이번처럼 괜찮은 도시 공사판을 만나면 함바에서 겨울을 난다. 살아 있음이란, 그 자체로 생생한 기쁨이다. 대위는 늘 말했다. “사람은 씨팔...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거야.” -257쪽
뭘 하러 흐리멍텅하게 살겠냐? 죽지 못해 일하고 입에 간신히 풀칠이나 하며 살 바엔. 고생두 신나게 해야 사는 보람이 있잖아. -259쪽
“어라. 저놈 나왔네.” 대위가 중얼거리자 나는 두리번거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저물어버린 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개밥바라기 보이지?” 비어 있는 서쪽 하늘에 지고 있는 초승달 옆에 밝은 별 하나가 떠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잘 나갈 때는 샛별, 저렇게 우리처럼 쏠리고 몰릴 때면 개밥바라기.” -270쪽
나는 거의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는 도시내기였다. 부모들 역시 근대적 교육을 받은 도회지 중산층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영등포에서 자라면서 어머니가 은근히 노동자의 아이들과의 구별성을 심어주려고 애썼던 것은 그런 이들의 생활을 먼발치에서만 보고 가졌던 편견이었을 것이고, 보다 정확하게는 스스로 몰락했다거나 뿌리를 뽑혔다거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어제 스무 살이 넘어서야 책을 벗어나 고되게 일하는 삶의 활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회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벽지에서 우리네 산하의 아름다움과 함께 자신을 다시 발견해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불과 몇 달 동안에 수많은 낯선 사람들을 내 가슴 깊숙이 끌어안았다. -274쪽
헤어지며 다음을 약속해도 다시 만났을 때는 각자가 이미 그 때의 자기가 아니다. 이제 출발하고 작별하는 자는 누구나 지금까지 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갈 것이다. -282쪽
육십년대에 나와 함께 남도를 떠돌던 삼십대의 부랑노동자가 그 별의 이름을 내게 말해주었다. 금성이 새벽에 동쪽에 나타날 적에는 ‘샛별’이라고 부르지만 저녁에 나타날 때에는 ‘개밥바라기’라 부른다고 한다. 즉 식구들이 저녁밥을 다 먹고 개가 밥을 줬으면 하고 바랄 즈음에 서쪽 하늘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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