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기억의 총합
인간이 기억의 총합이라면 그 기억을 가진 누군가를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기억하고 있는 그 누군가. 하지만 그녀는 정답이 될 수 없다. 그녀는 십 년 전의 나만을 알고 있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은 진실일 테지만 그것은 그녀의 진실뿐이었다. - 41쪽
망각의 인간이 남기는 기록
보통 사람에게 일상은 매일 망각의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알람에 맞추어 겨우 일어나 요기를 하고 일터로 나가는 분주한 하루의 시작부터 그 하루를 바삐 보내고 지친 몸으로 귀가해 식사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켜놓은 채 앉아 있다가 잠드는 나른한 하루의 끝까지, 그리고 하루의 순간순간을 함께하는 누군가의 눈빛을, 몸짓을, 이야기를 시간과 함께 잊어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고 글을 쓰며 기록한다. 하지만 기록은 기억을 완전히 대신하진 못한다. -65쪽
D의 독백, 고립이 아닌 연대
우리는 각자 혼자지만 아주 미세한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중간의 점이 사라져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선이 어떤 의지로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다. -67쪽
Y의 독백, 점 선 면
우리는 점으로 존재한다. 내가 정확히 아는 것은 다섯 점 정도. 처음에는 내 바로 위의 점으로 시작했다. 대부분은 자신의 윗점과 아랫점을 아는 것으로 스파이 생활을 끝낸다. 많이 알면 알수록 위험해진다. 많이 알고 실수하면 죽지만 적게 알고 실수하면 살아 있을 수는 있다. -87쪽
점을 장악하는 것, 그 점을 잇는 선을 파악하는 것, 그리고 면을 이해하는 것이 스파이의 재능이다. 그는 이제 나에게 면이 된 것이다.
존재까지 사라지다
언니는 사람들의 기억이 사라지고 양심이 사라지고 그러다가 사람들이 사라지기도 한다고 했다. -68쪽
돈 앞에 노예가 되는 인간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 69권에 이런 구절이 있다. 대체로 일반 백성은 상대방의 재산이 자기보다 열 배 많으면 몸을 낮추고 백 배 많으면 두려워하고 천 배 많으면 그 사람 일을 해주고 만 배 많으면 그 사람 노예가 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이다. (凡編戶之民 富相什則卑下之 伯則畏憚之 千則役 萬則僕 物之理也) -70쪽
조직 보스(B)의 마음(모든 부모의 마음)
가끔 이 일에 회의가 들 때면 아내와 아이를 생각한다. 내 아이가 아직 받지 않은 상처, 그러나 미래에 받을 수밖에 없는 상처, 그 상처를 최소화시켜주고 싶다. 가장 상처받지 않으며 살 수 있는 일 퍼센트에서 영원히 머물게 해주고 싶다. 그리고 구십구 퍼센트를 함께 생각하고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는 일 퍼센트가 되길 바란다.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다고 믿는 아내처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꿈을 꾸게 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꿈일 뿐이다. 나에게는 화나고 아내에게는 슬픈.... -78쪽
자신을 배반하는 사람들
이제 사람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유인 편을 존경을 넘어 숭배한다. 내 아이는 이해할 수 있다. 그애도 처음부터 유를 타고 났으니까.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태어날 때도 무이고 앞으로도 계속 무일 사람들이 타고난 유들을 찬양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백화점의 이 사람들처럼. -79쪽
감시사회
누구나 감시를 받는다. 프랜차이즈 매장, 커피숍, 백화점, 식당에는 음성탐지기,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그 자료는 모두 분석실로 보내진다. 백만 개의 눈, 천만 개의 귀가 시스템이 되어 사람들을 감시하고 분석하고 결과를 토해낸다. 휴대폰과 이메일, 목소리, 검색어를 통해 특정 단어를 걸러낸다. 그리고 CCTV를 통해 특정인물을 포착한다. 그 누구라도 그 단어를 쓰거나 그 인물과 접촉하면 리스트에 포함된다. 리스트에 포함되면 더 많은 눈이 그를 바라보게 되고 더 많은 눈이 그를 지속적으로 포착하게 되면 점검대상이 된다. 점검대상이 되면 보다 철저한 일정기간의 감시와 조사, 분석을 통해 위험인물 군으로 분류되거나 보류된다. -88쪽
속물성을 진실되다고 착각하다
평론가가 학교 선배를 만나 떠난 자리에 최근 좀 잘나가기 시작한 듯한 어떤 작가가 자리를 잡는다.
“제가 선배님을 참 좋아했었거든요. 그런데 선배님도 좀 달라져야하지 않아요? 평론을 의식하고 쓰세요. 아님, 독자라도 의식하던가. 언제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실 건가요? 이제 달라지셔야죠.”
이 작가는 속물적인 걸 솔직한 걸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저 솔직함 앞에는 자기방어가, 저 속물성 뒤에는 열등감이 있으리라. -102쪽
소위 전문가들이 스파이가 되어 하는 일
변호사, 회계사, 법학자, 경제학자...... 직업이 별명으로 붙은 비밀요원들이 있다. 그들은 특별요원으로 붙들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들의 일과 그들의 역할은 미묘하게 다르다. 그들의 작업은 너무나 전문적이어서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렵다. 교묘하게 법망을 이용한 합법이지만 불법보다 더 나쁜 일, 공적 자금으로 자신들이 관여한 사업에 투자하고 대규모 국가사업을 획책하고 그 사업의 부정적인 면을 긍정적인 면으로 포장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마법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X는 그런 마법사, 날렵한 킬러가 될 것이다. 킬러라는 것이 칼로 피를 보는 그런 살인청부업자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경제 킬러다. 회사를 현대화하고, 기록적인 시간에 수익을 내고, 종업원의 절반을 내쫓는 차가운 심장을 가진 구조조정 전문가.
그들은 말한다. 혁명적일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오늘날 세상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이윤 추구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고, 회사가 필요로 하는 목표를 달성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고용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구조조정을 하고 이윤을 창출하면서 당신들의 일부에게라도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이 기업 자체가 사라져서 아무도 더는 일할 수 없는 것이 나은지를 선택하라고 한다.
일부라도 살아남아 다시 전체를 살리느냐, 아니면 지금 전부 모두 죽느냐의 선택은 이미 선택이 아니다. 비인간적인 기술과 무자비한 시장이 결정하고 인간들은 어쩔 수 없이 따를 뿐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 일부의 생존마저 위태로워지고, 극소수가 전체의 이익을 독점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
그들이 킬러인 이유는 의뢰인의 이익만 보호하고 그 명령만 지키기 때문이다. 비록 전체, 혹은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특정 순간에 진실을 위장하는 것. 그것이 스파이의 기본이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지나간 자리에 더 많은 죽음이 존재한다. -129쪽
소설의 기능
나의 예전 보스는 말했다. 소설을 읽는 것은 무엇보다 재밌어. 그런데 그 재미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재미하고는 좀 달라. 너무 재밌어서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재미가 있어. 어떤 작가들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지금 여기의 문제를 고민하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하고 있어. 그런 작가들은 본능적으로 문학이 어떻게 세상에 기여할 것인가를 알아. 게다가 작가와 독자는 스파이들의 암호보다 더 복잡한 코드로 소통하지. 그들의 연대는 그들이 직접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는 알아내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어. -148쪽
보이지 않는 스파이
Y: “일단 보이는 요원과 보이지 않는 요원이 있어. 당신은 보이지 않는 스파이야.”
X: “무슨 말이지?”
Y: “보이지 않는 스파이는,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만약 그가 경찰이라면 그는 경찰로 일하는 동시에 우리 일을 하는 거야. 그 가운데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지. 우리 일을 위해 자신의 경찰 일을 배신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는 거지.”
X: “그러니까 본래 자신의 신념이, 아니, 그 일을 하는 신념이, 당신들 스파이의 목표와 일치한다는 거지. 그렇다면 그는 그냥 경찰인 거지 스파이는 아니잖아.”
Y: “아니지. 그가 애초에 경찰로 일하게 될 때 그리고 경찰로 계속 그렇게 일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손길이 미친 거야.”
(.....)
Y: “상상해볼 수는 있어. 기억을 잃기 전까지 당신은 스파이가 아니었다는 말이야. 그러면서도 스파이였겠지. 이 조직에 기여하고 복무하는. 당신이 뭔가를 바꾸려고 해서 그들이 당신의 기억을 지우고 당신의 정체성을 조정한 거야. 다른 길을 가게 하도록, 아니 그러니까 가던 길을 계속 가게 하도록” -153~154쪽
스파이든 사람이든 소모품이다
스파이는 소모품이다. 그녀가 말하는 어떤 등급까지는 분명..... 거의 모든 사람이 자본주의의 소모품인 것처럼. 먹이 사슬처럼 결국 최상위층에게 희생된다. 돈을 분석하는 사람이 된 이후 나는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해왔다. 그 사실을 그 흐름을 변화시킬 방법이 없어 보였다. 아주 낮은 가능성에 투자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156~157쪽
한 명이 전체를 노예로 부리다
보스: “프레지던트가 끝이라고 생각하나?”
B: “끝이 아니라 제일위죠”
보스: “아니야. 프레지던트는 끝이야. 그 가면은 한번 쓰면 영원히 벗을 수 없는 가면이니까. 그 위가 있어. 의자에 앉아서 그 모든 가면들을 움직이는 사람. 체어맨. 그리고 또 그 위가 있어. 모든 이의 등 뒤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 사람....”
B: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전지전능한 신.” -255쪽
나 하나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나 하나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멈출까. 나 하나 이런다고 세상은 변하지 않고 나 혼자만 죽게 될 뿐이다.... 억울하지만 더 억울해지기는 싫다.... 어떤 방법으로도 세상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심지어 목숨을 걸어도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면 세상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악의 악순환을 바꾸어야 한다. -263쪽
책의 효용(도서관 노인이 Y에게)
책은 위험하지. 책을 대신할 유희는 많지만 책보다 생각을 깊이 전달하는 것은 없지. 책은 만드는 데 돈이 덜 들고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를 떠돌면서 불어나니까. 한때 작가는 시대의 양심으로 일종의 혁명가였어. 그리고 혁명가는 거의 모두 작가야. 그들은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이야기를 남기지. 지배자들은 그래서 늘 책을 없애려고 해. 언제 죽을지 모를 세상에 책은 육체가 사라져도 살아남는, 영혼 같은 거거든. -277쪽
무가치하단 음모(헌 책방 노인의 말)
그래요, 작가님 밥벌이조차 되지 않을 겁니다. 아무도 읽지 않고 그래서 다시는 쓸 수 없고, 쓰지 않으니 읽을 수 없고, 그런 악순환을 누군가가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조적인 음모조차도 아닙니다. 음모에서 파생하는 부수적인 효과입니다. -281쪽
반스파이 은둔자
은둔자는 스파이에 대항하는 스파이 같은 사람들이다. 속물적인 사회의 기준 자체를 숙고하는 자들. 그래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무정부적인 일종의 진공상태에서 계속 살아가는 자들. 그런 자들이 모여 국가와 규칙 안에서 사는 것을 거부하고 대규모 집단적 인간 파업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상황이 진정으로 끔찍한 자들은 누구일까. -282쪽
자아란 일관된 내러티브다
언젠가 의사가 자아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 일관된 내러티브를 형성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받아들인 기억을 축적한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기억은 축적된 것이 아니라 지워진 후 다시 쓰여졌다. 내 자아는 지워진 것일까, 다시 쓰여진 것일까. 어찌 되었든 둘 다 나의 것이고, 그 팰림프세스트(다시 새김, 과거와 현재의 텍스트가 서로 중첩하고 교차하는 다의적 공간을 의미합니다)가 나의 미래의 자아이다. -288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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