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바람직해야 할 이 발달이 실은 아이들을 억압하고, 어른들도 부자유의 가치관에 묶어 둔다는 사실을 밝힌 것은 야마시타 츠네오山下恒男이다. 야마시타는 자신의 저서 『反발달론-억압의 인간학으로부터의 해방』에서 현대의 ‘발달development’이라는 개념이 아이가 우리 어른에 가까워지는 것을 선으로 규정하고, 혹여 아이가 어른이 기대하고 있는 길로부터 벗어나거나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일 때는 강제적으로 원래 어른이 의도했던 길로 되돌리려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어른은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은(바람직한) 발달로 이끌 수 있을 것인가라는 ‘기술론’에 경도되어 있다고 발달개념의 억압성 구도를 상세하게 파헤치고 있다. -pp 25
‘발달’ 개념은 생명의 평등을 말하는 데 사실은 겉으로 보기에만 아름다운 이야기일 뿐이다. 실제로는 그 개념은 ‘상하’, ‘경중’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차별긍정론’을 학문적‧과학적 스타일로 그것도 마치 차별과는 인연이 없는 것과 같은 객관적‧중립적 입장으로 위장하면서 지탱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pp 43
학교가 요구하는 배움의 성격은 ‘지금‧여기’의 개별체험으로부터 아이를 분리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신체적‧개별적‧구체적 세계를 가능한 한 빨리 벗어 던지지 않으면 지금의 학교공부를 따라갈 수 없다. 아이는 그 후에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것은 기호적‧추상적인 숫자와 문자의 세계이다. 내 몸으로 직접 느끼는 감각에서 메마른 사고로, 지면에서 공중으로 너무 빠른 속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들에게는 두 세계를 왕복하거나 자신의 몸이 납득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면서 천천히 세계를 넓혀 나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pp 52
사실 심리학자 타일러L. E. Taylor는 지능테스트를 논하면서 ‘모든 지능검사는 기호를 조작하는 능력을 측정하고 있다.’라고 진술하고 테스트 받은 지능이라고 하는 것은 ‘기호적 사고’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 ‘지능’의 모습과 시대와의 관계를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기호를 좆가하는 사고의 움직임은 문명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능력을 측정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다.”(『테스트와 측정』)
사물과의 친밀한 만남(관계), 사물과의 살아 숨쉬는 체험에 위해 만들어지는 생활을 배제하고서야 비로소 성립하는 현대 문명의 성질과 그 문명을 뒷받침하는 기호조작능력을 중심으로 하는 특수한 종류의 능력을 지능이라고 부르는 사실은 이렇게 해서 명백해졌다. 추상적인 사고력을 근본으로 하는 이러한 지능의 연마를 계속해온 사람들이 나중에 엘리트, 수재라 불리는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그 능력이 높은 곳에 오르면 오를수록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구체적인 사물과 자기 자신의 신체, 자신의 생활 자체를 잃고, 추상의 세계, 관념의 영역에 갇힐 수밖에 없게 된다. 엘리트와 수재의 비극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pp 85~86
지능테스트의 탄생과 보급이 공교육과 전쟁, 즉 학교와 군대와 연관된 국가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심리테스트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본질이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인간의 효율적인 선별방법이다. -pp 104
상담은 개인에게 발생하는 문제를 그 개인이 발을 딛고 있는 생활과 상황 등 전체적 시야에서 보고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의 마음과 감정 변화에 의한 해결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한 측면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활현실의 일부로서 중요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인 것처럼 생각하게끔 만들어 버리는 구도가 문제이다.
즉, 그것은 현상을 고정시킨 채로 내담자를 거기에 적응시켜 가는 현상긍정을 위한 기법이기 때문이다. -pp 125~126
등교거부 아이들이 똑같이 학교라는 장소가 가져오는 깊고 무거운 억압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등교를 거부하는 어떤 여자 아이가 ‘등교거부 아이에 대한 앙케이트’에서 학교는 어떤 곳인가?라고 물었을 때 ‘참는 곳’이라고 대답을 했는데 불쾌, 부자연스러움, 굴욕 등이 빚어내는 스트레스를 참다가 자그마한 부정적인 자극이 주어지게 되면 그때까지의 상태가 유지될 수 없는 경우로 돌변하게 된다.
부담의 가중 중에는 부모의 불화와 친구의 따돌림, 그리고 교사의 질타 등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원인이 아니라 ‘참는 곳’인 학교를 ‘갈 수 없는 곳’이라고 바꾸는 빌미가 된다. -pp 146
그래서 정부는 아이를 취학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대책으로서 ‘취학배지’를 만들어 취학한 표시로 아이의 가슴에 달아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민중들이 학교를 받아들이게끔 하기 위한 외부로부터의 관리이다. 그러나 지금 ‘취학배지’는 사람들의 내면에 있다. 따라서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은 죄악이고, 학교에서 성실한 것이 아이에게 있어서도 어른에게도 중요한 의무가 되었다. -pp 149
포스트만은 “아동기란 근대 인쇄기술의 발달과 함께 만들어져서 전신‧텔레비전이라고 하는 미디어의 출현에 의해서 소멸되어 가고 있는 사회적 관념이다.”라고 지적한다. 아동기란 15세기 중엽, 활자라는 미디어가 만들어지면서 성인기에 대응해서 출현한 것이고, 그 이전의 중세기에 아동기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pp 151~152
이시카와石川는 말한다.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본능적으로 전문가를 피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오히려 아무 일 없이 무럭무럭 잘 크고 있는 아이의 부모가 ‘괜찮아 괜찮아’라든지, ‘이웃 아이보다 훨씬 낫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전문가를 찾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발달지체와 문제가 있는 아이를 배척한다고 해야 할까?”
이것은 학회지 「임상심리학연구」 26권 1호에 실린 좌담회 ‘일상 속의 출산, 양육을 생각하기’ 속의 발언이다.
어느 아이라도 있는 그대로 괜찮다는 넉넉함과 여유로운 시선이 사라져 버리고 보다 바람직한 아이상과 그것을 키워내는 바람직한 부모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경쟁과 분단, 그리고 배제되지 않아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다른 배제를 낳는 구도가 확대되고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심리학은 개개의 전문가의 선의와 노력과는 별개 문제로써 구조적으로 앞의 도식을 지지하고 강화시키는 데 가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화가 브뤼헐P.Brueghel이 1560년에 그린 「아이의 놀이」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광장 일면에 생기있고 활발하게 놀고 장난치는 어른과 아이의 한 무리. 누가 아이이고 누가 어른인지 구별해 내는 것도 쉽지 않다. 어른 같은 아이도 아이 같은 어른도 장애를 가진 사람도 나이 먹은 사람도 모두 함께 있을 수 있는 느긋한 광경이다. 그런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에서 벗어나 우리는 너무 멀리 온 게 아닌가? -pp 164~165
이전에 아이는 어른들의 손에서 손으로 무릎에서 무릎으로 이 사람이 안아주고 저 사람이 안아주며, 웃음소리 속에서 별탈 없이 성장하였다. 그러나 엄마와 아이만이 있는, 부자연스러운 지금의 양상을 모성애, 부모의 자기교육, 부모교육훈련 등의 말이 덮어 버린다. 그리고 개인의 자조노력, 자신만 노력하면 훌륭한 아이 키우기가 가능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환상일 뿐이다. 그러나 많은 젊은 엄마들은 고독한 자조노력을 기다릴 여유도 없이 강제당하고 자신의 내면에만 계속 눈을 돌리게 된다. -pp 177
보지 못하는 학생인 S는 언젠가 나의 손을 잡고 “이렇게 해서 만져보면 키가 어느 정도이고 어떤 느낌이 사람인지 알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살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많은 메시지가 서로 전해지며 또 하나의 세계가 넓어지는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pp 192~193
부모의 굴레 속에 있는 아이들은 자립을 그만두고 언제나 건강하고 젊은 부모에 굴복하고 종속된다.
그러나 아이도 그냥은 자신의 인생을 맡기지 않는다. 아이도 결코 만만한 존재는 아니다. 그들도 또한 보상을 기대한다. ‘어쩔 수 없이, 어른의 욕망을 허락하고 자신을 지배하도록 허락한다. 그 대신 어른들은 나를 언제나 편안하고 기분 좋게 해주고 언제까지나 돌봐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현대의 젊은이들의 ‘응석’이라 불리는 것이다. 아이가 어른에 의존하는 것은, 어른이 아이를 지배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거래이다. -pp 227~228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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