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이식의 평론(評論)
왕세정의 견해를 이어받아 두보를 더 높게 평가한 이식
조선 중기의 학자 이식(李植, 1584~1647)은 「학시준적(學詩準的)」에서 이백과 두보의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백(李白)의 고시(古詩)는 표일(飄逸)해서 모방하기가 어렵다. 두보 시의 변체는 성정(性情)과 사의(詞意)에 있어 고금을 통틀어 최고이다. 그의 기행이나 「삼리(三離)」, 「삼별(三別)」 등 작품은 아낄만한 점이 분명히 있으니 숙독하고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되며 이를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
「팔애(八哀)」와 같은 장편은 학식이 풍부하고 재주가 뛰어나지 않으면 배울 수 없으며 또 시의 정통도 아니니 우선은 그냥 놔두어도 된다.
李白古詩飄逸難學. 杜詩變體, 性情詞意, 古今爲最. 記行及「離」ㆍ「別」等作, 分明可愛者, 不可不熟讀摹襲, 以爲準的.
其大篇如「八哀」等作, 非學富才博不可學, 亦非詩之正宗, 姑舍之.
표일(飄逸)은 시 풍격의 특성을 지적한 말로 사공동(司空圖)가 시품(詩品)에서 표일(飄逸)을 하나의 풍격으로 배치하였다. ‘표일(飄逸)’은 체기(體氣)가 경양(輕揚)하고 형영(形影)이 표홀(飄忽)하고 신정(神情)이 한일(閑逸)하다는 뜻으로 시 전체의 풍격이 날듯 가볍고 편안하고 한가롭다는 것이다.
사의(詞意)는 문사(文詞)의 함의(含意)라는 뜻이다. 두보는 성정의 표현과 함축적 표현에 있어서 고금을 통틀어 최고라고 하면서 그의 작품 중에서 「삼리(三離)」ㆍ「삼별(三別)」을 준칙으로 삼아 모방하여 그의 시를 배워야한다고 하였다. 그의 작품 「삼리(三離)」ㆍ「삼별(三別)」ㆍ「팔애(八哀)」 등은 숙독하거나 학식이 풍부하지 않으면 배워 모방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식의 이러한 견해는 명대 후기의 문인인 왕세정(王世貞)의 견해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왕세정은 이백과 두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언고시와 칠언가행에서 이백은 기(氣)를 위주로 하고 자연스러움을 으뜸으로 한 뒤에 준일(俊逸), 고창(高暢)함을 귀하게 여겼다. 두보는 의(意)를 위주로 하고 독특하게 나아감을 으뜸으로 삼으며 기일(奇逸), 침웅(沈雄)함을 귀하게 여겼다.
맛이 사람을 날아갈듯 신선 같게 하는 것은 이백이고 사람을 비분강개하게 하고 격렬하게 만들어 흐느끼게 하는 것은 두보이다.
弇州評李杜曰: ‘五言古七言歌行, 太白以氣爲主, 以自然爲宗, 以俊逸高暢爲貴; 子美以意爲主, 以獨造爲宗, 以奇逸沈雄爲貴.
味之使人飄揚欲仙者, 太白也; 使人慷慨激烈歔欷欲絶者, 子美也.……’
기(氣)는 시인의 정신 기질이 작품에 관통되어 형성된 함축, 생기, 기세를 가리키고 준일(俊逸), 고창(高暢)은 그의 풍격을 지적한 말이다. 의(意)는 시의(詩意)로 두보의 시는 함축적으로 뜻을 표현하는데 독자적 경지를 열었다는 것이다. 기일(奇逸), 침웅(沈雄)은 그의 풍격을 지적한 말이다. 이상(以上)의 말은 이식이 왕세정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왕세정(1526-1590)은 명대의 당시를 추종한 사람으로 이식이 태어나기 7년 전에 죽었다. 그리고 이식의 「학시준적(學詩準的)」은 인조 25년 1647년에 완성되었는데 이는 바로 왕세정이 죽은 해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인용한 내용을 볼 때, 이식은 왕세정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식의 이백과 두보에 대한 평론은 왕세정의 평론을 간결화시키고 두보를 더욱 높이 평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정리
남용익은 종당파로 앞에서 고찰한 대로 이백과 두보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호곡시평(壺谷詩評)』에서 소식과 황정견에 대하여 “소동파는 홍대하면서 풍족하고 황산곡은 기이하지만 편협하다.…(송대)에서 대가라고 한다면 소식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다[蘇東坡大而飫, 黃山谷奇而狹.……然大家則無出坡翁之右]【위의 책, 제3권의 「壺谷詩評」, 343쪽】.”라고 하여 소동파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는데 이는 당대와 송대를 통틀어 소식을 대가라고 한 것이 아니라 송대에서는 소식을 대가라고 할 만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식에 대해 높이 평가하기는 하지만 당시가 더 훌륭하다는 전제 하에 소식을 높이 평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