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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화에 나타난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 3.1.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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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화에 나타난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 3.1.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

건방진방랑자 2022. 10. 23.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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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존당파(尊唐派)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한 총론에서 각 시를 추존(追尊)하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나 한정된 몇 사람만이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하여 총론(總論)을 전개함으로써 각각의 추존(追尊)의 근거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다. 이에 따라 존당파가 추존했던 당시(唐詩)를 대표하는 이백두보, 존송파가 추존했던 송시(宋詩)를 대표하는 소식, 황정견에 대한 양파(兩派)의 평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존당파와 존송파의 이론적 근거를 좀 더 파악하여 각 파의 당ㆍ송시에 대한 평론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尊唐派

尊宋派

이백, 두보

소식, 황정견

 

 

다시 말하면 각파(各派)에 따라서 같은 시인이라도 다르게 평론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구체적인 평가와 관점 및 시론은 무엇인지를 규명할 것이다. 존당파에서는 이백과 두보에 대한 역대의 우열 논란과 그 계보, 이백과 두보 시의 장점 등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먼저 이백과 두보의 우열 논란을 살펴보도록 한다.

 

 

 

존당파, 이백보다 두보를 더 인정하다

 

조선중기의 학자 남용익(南龍翼, 1628~1692)호곡시화(壺谷詩評)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백과 두보의 우열은 자고로 정해지지 않았다. 원진은 처음부터 두보를 존경했지만 한유는 두 사람을 다 존경하였다. 송 이후로는 두보를 존경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오도손(敖陶孫)의 시평(詩評)에서는 두보(杜甫)는 주공(周公)이 제례(制禮)한 것과 똑같아 감히 함부로 논의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맞는 말이다.

…… 주자(朱子)는 시성(詩聖)으로 이태백(李太白)을 불렀으니, 그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또한 알만하다. ()나라에 이르러 왕세정(王世貞)은 다시 두 사람을 높이 보는 평을 하였으나 두보를 약간 더 높이 보았다.

杜優劣, 自古微定. 元微之始尊杜, 而韓昌黎兩尊之. 自宋以後, 無不尊杜. 敖陶孫詩評以杜爲周公制禮, 不敢定議; 此言是矣.

……紫陽以聖歸之於李, 則微意亦可知. 而至明弇州有兩尊之評, 而少有右杜意.

 

 

중국 역대로 이백두보에 대하여 우열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선호도를 정리하여 원진과 오도손, 송 이후 사람은 두보를 더 존중하고, 한유는 이백과 두보를 둘 다 존중하였다는 것이다. 왕세정은 후칠자의 한 사람으로 시필성당(詩必盛唐)’을 주장한 종당(宗唐)의 한 사람으로 두 사람을 존중하였지만 두보를 더욱 존중하였고 주자는 이백을 시성으로 불러 그를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보편적으로 이백보다 두보를 더 존중했다고 볼 수 있다.

 

 

 

존당파, 이백보다 두보가 더 원숙하다고 보다

 

남용익에 이어 조선후기의 학자인 김만중(金萬重, 1637~1692)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더욱 분명하게 두보를 선호한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백과 두보는 이름이 똑같이 났으나, 당나라 이래로 문인들이 판단한 것은 두보에 기운 사람이 70~80%나 차지한다. 백거이, 원진, 왕안석 및 강서시파들은 두보를 존중했고, 구양수, 주희, 양신은 이백을 높였으며 한유와 소동파는 이들을 다 같이 존중했다.

명대의 홍치ㆍ가정 연간의 여러분들도 둘 다 존경했지만, 그들의 본뜻을 살펴보면 대부분 두보에 편향되어 있다. 시도(詩道)가 두보에 이르러 크게 완성되어 고금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여 대가(大家)로 삼는 데는 이론(異論)이 없으니 이백은 정녕 함께 논할 수 없다.

그러나 사물이 극히 성하게 되면 곧 쇠미한 경향이 나타난다. 소옹은 꽃을 볼 때 피지 아니했을 때를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백이 꽃이 처음 핀 것과 같다면 두보는 완전히 핀 것 같다. 두보의 기주(夔州) 이후의 시는 시들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杜齊名, 而唐以來文人之左右袒者, 杜居七八. 白樂天元微之王介甫及江西一派幷尊杜. 歐陽永叔朱晦蓭楊用修右李, 韓退之蘇子瞻幷尊者也.

若明弘嘉諸公, 固亦幷尊, 而觀其旨意, 率皆偏向少陵耳. 詩道至少陵而大成, 古今推而爲大家無異論, 李固不得與也.

然物到盛, 便有衰意. 邵子曰:‘看花須看未開時.’ 李如花之始開, 杜如盡開, 夔後則不無離披意.

 

 

이는 남용익의 시론을 부연ㆍ설명한 느낌이다. 김만중에 의하면 크게는 당나라 이래로 문인들의 70~80%두보를 존중하였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백거이ㆍ원진ㆍ왕안석 및 강서시파는 두보를 존중하고, 구양수ㆍ주희ㆍ양신은 이백를 존중하고 한유소동파는 둘 다 존중하였고 명대의 홍치와 가정 연간의 문인들은 둘 다 존중한 것 같지만 두보를 더욱 존중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인의 관점에서 중국 사람들의 이백과 두보에 대한 선호도를 적은 것이지만 김만중도 은연중에 이러한 입장에 동조한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중국의 풍조는 한국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인용

목차

한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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