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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화에 나타난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 4.2 김창협, 존송파(尊宋派)의 기본 위에 성당풍(盛唐風)을 갖추라 말하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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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화에 나타난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 4.2 김창협, 존송파(尊宋派)의 기본 위에 성당풍(盛唐風)을 갖추라 말하다

건방진방랑자 2022. 10. 23.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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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창협, 존송파(尊宋派)의 기본 위에 성당풍(盛唐風)을 갖추라 말하다

 

 

김창협(金昌協)농암잡지(農巖雜誌)외편 16에서 황정견과 진사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나라 시에서 황정견(黃庭堅)이나 진사도(陳師道)의 시는 한때 최고의 으뜸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황정견(黃庭堅)의 시는 마음대로 비틀어대어 자연스럽지 못하고 진사도의 시는 앙상하며 매우 엄혹하니 이미 온화하고 두터운 뜻을 잃어버렸으며, 또한 초탈하고 구속을 받지 않는 운치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진실로 당나라 시로부터도 멀고 두보로부터도 잘 배우지 못했으니, 색과 향기가 흐리지 않는다고 이몽양이 비판한 것은 참으로 정확한 주장이다.

진여의(陳與義)는 비록 기가 조금 막힌 바가 있지만 두보의 음절을 얻었고, 육유(陸游)는 비록 격조(格調)가 조금 낮지만 시인의 풍치를 다하였다. 황정견(黃庭堅)이나 진사도(陳師道)를 배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진여의(陳與義)나 육유(陸游)를 취하는 것이 나은데 이들이 그나마 시도(詩道)에 가깝다.

宋詩如山谷後山, 最爲一時所宗尙, 然黃之橫拗生硬, 陳之瘦頸嚴苦, 旣乖溫厚之旨, 又乏逸宕之致; 於唐固遠, 而於杜亦不善學, 空同所譏不色香流動者, 誠確論也.

簡齋雖氣稍詘, 而得少陵之音節; 放翁雖格稍卑, 而極詩人之風致. 與其學山谷后山, 無寧取簡齋放翁, 以其去詩道猶近爾.

 

 

농암은 우선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를 한 때 최고의 시인으로 여겨졌음을 인정한 후, 황정견의 횡요생경(橫拗生硬)진사도의 수경엄고(瘦頸嚴苦)한 단점을 비평하고 당시와 멀어져 있기 때문에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의 시보다는 차라리 진여의(陳與義)와 육유(陸游)의 시를 배우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唐詩)의 여운(餘韻)이 있는 사람의 시()를 학습(學習)하라는 것으로 진여의(陳與義)와 육유(陸游)는 두보(杜甫)의 음절(音節)과 시인(詩人)의 풍치(風致)가 있어서 시도(詩道)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 주목할 점은, 농암이 당시(唐詩)를 최고로 여기고 두보를 표준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농암이 당시와 송시를 겸존하였다고 하지만 이는 당시(唐詩) 전체가 아닌 성당시(盛唐詩)를 최고로 인정한 바탕 위에서 송시(宋詩)의 장점(長點)을 평가한 것으로 봐야 한다. 성당시(盛唐詩)가 아닌 초당(初唐)ㆍ중당(中唐)ㆍ만당시(晩唐詩)는 송시(宋詩)보다 못한 점도 있다는 것인데 이 점은 권응인(權應仁)송계만록(松溪漫錄)에서 만당시(晩唐詩)가 소식(蘇軾)의 시()만 못함을 말할 때 이미 지적하였다. 또한 농암은 송시의 전체적인 변화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소식이나 황정견 이전에 있었던 구양수나 왕안석 같은 사람들은 비록 당나라 시만큼 순수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율시나 절구 등의 시체는 당나라 시의 격조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양수는 너무 유창하였고 왕안석은 너무 정밀하고 적절하였으며 또한 의론이나 옛이야기와 같은 누가 있었을 따름이다. 소식이 나오면서 비로소 한차례 변화가 있었으며, 황정견이나 진사도가 나오면서 또 한 차례 큰 변화가 있었다.

黃以前, 如歐陽荊公諸人, 雖不純乎唐, 而其律絶諸體, 猶未大變唐調.

但歐公太流暢, 荊公太精切, 又有議論故實之累耳. 自東坡出而始一變, 至山谷后山出, 則又一大變矣.

 

 

농암(農巖)은 송시(宋詩)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에 이르러 한 번씩 변했다고 하였다. 이는 소식(蘇軾)에 이르러 한 번 크게 변하여 고실(故實)과 의론(議論) 즉 산문화(散文化), 의론화(議論化), 용사(用事)의 중용(重用)이라는 송시(宋詩)의 특징이 갖춰졌고,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변하여 점철성금(點鐵成金)탈태환골(奪胎換骨)을 기치로 하는 강서시파(江西詩派)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일찍이 엄우(嚴羽)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소동파(蘇東坡)와 황산곡(黃山谷)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시를 써서 당의 시풍이 변하였다[東坡山谷, 始自出己意以爲詩, 唐人之風變矣].”라고 하고, 이어서 시풍(詩風)에 대해서는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문자(文字)로 시를 쓰고, 재학(才學)으로 시를 쓰고, 의론(議論)으로 학문을 삼았다[以文字爲詩, 以才學爲詩, 以議論爲學.].”라고 하였는데, 농암(農巖)이 송시(宋詩)에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 것은 바로 엄우(嚴羽)가 말한 시의 산문화, 의론화, 용사의 추구 등을 지적한 것으로 엄우(嚴羽)와 견해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창랑시화(滄浪詩話)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고 송시(宋詩)는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에서 완성되었으며 이들을 송시(宋詩)의 대표자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용

목차

한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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