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6세기의 강서시풍(江西詩風)과 당풍(唐風)
1) 송풍(강서시풍)의 전개 양상
소식의 송시풍이 고려~15세기까지 맹위를 떨치다
우리나라 한시는 고려 중기 소식(蘇軾)을 중심으로 한 송시(宋詩)가 수용된 이래, 16세기에 이르기까지 가장 주도적인 흐름을 장식하였다. 송시풍이라 하더라도 그 중심이 특히 소식(蘇軾)에 있었는데, 조선이 건국되고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든 15세기 무렵에는 소식 일색에서 벗어나 다양한 송시를 접하게 된다.
15세기 중반 문단의 중심에 있던 안평대군은 『팔가시선(八家詩選)』을 엮으면서 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위응물(韋應物)ㆍ유종원(柳宗元)ㆍ구양수(歐陽脩)ㆍ왕안석(王安石)ㆍ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의 시를 선발하였고, 또 황정견의 시집인 『산곡정수(山谷精髓)』를 엮었으며, 매요신(梅堯臣)의 시집인 『완릉선생시집(宛陵先生詩集)』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5세기 후반 무렵 황정견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16세기 전반기까지 거듭하여 황정견의 문집이 인간(印刊)되고 광해군 시기인 17세기 초반까지 그 열기가 지속되었다. 황정견과 함께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대표하는 진사도(陳師道)의 시집도, 성종 무렵부터 간행되기 시작하여 중종과 명종 연간에 거듭 간행된 바 있다.
문단을 휩쓴 강서시풍
이러한 황정견, 진사도 시에 대한 관심은 15세기 후반에 이미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반 성현(成俔)은 조선의 시단을 진단한 「문변(文變)」【『허백당집』 권13】에서, ‘당시 사람들이 이백(李白)의 시는 지나치게 호탕하고 두보(杜甫)의 시는 지나치게 웅장하며, 육유(陸游)의 시는 지나치게 호방하므로 오직 본받을 것은 황정견과 진사도라고 여겼다[謫仙太蕩, 少陵太審, 雪堂太雄, 劍南太豪, 所可法者涪翁也, 后山也.]’고 적고 있다. 고려 이래 소식의 시를 배우고자 하였으나 소식과 같은 천부적인 기상을 타고나지 않으면, 그 껍질을 모방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소식의 시풍을 넘어서고자 성당(盛唐)의 표상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그리고 두보(杜甫)를 계승한 육유를 배우고자 하였지만, 그 역시 쉽지 않았다. 두보(杜甫)나 이백(李白), 육유의 시가 배우기에는 너무 호탕하고 웅장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황정견과 진사도 등 강서시파는 천재적인 재능이 아니라 시법의 연마를 통하여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학습 가능한 좋은 시가 있다면 시단의 움직임이 그리 쏠릴 것은 자명하다. 그리하여 이 땅에 15세기 후반 무렵부터 강서시파(江西詩派)를 통하여 시를 배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던 것이다.
황정견, 진사도 등 강서시파의 영향력은, 16세기를 대표하는 시인이 그 영향권에 있는 인물로 대부분 채워지고 있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역대의 비평서를 볼 때 황정견, 진사도를 배운 사람들로는 박은(朴誾)ㆍ이행(李荇)ㆍ박상(朴詳)ㆍ정사룡(鄭士龍)ㆍ노수신(盧守愼)ㆍ황정욱(黃廷彧)ㆍ최립(崔岦) 등이 있으며, 김종직(金宗直), 조신(曺伸), 정희량(鄭希良), 신광한(申光漢) 등도 강서시를 일정하게 배운 것으로 평가된다. 16세기 전반의 시인 중 신광한(申光漢), 김정(金淨), 박순(朴淳) 등이 외롭게 당시풍을 추구하였을 뿐이요, 신광한 역시 강서시를 배운 흔적이 지적되고 있기도 하다. 16세기 후반부터 이른바 삼당시인이 등장하면서 당풍(唐風)이 문단의 주류를 형성하고 강서시파에 대한 부분적인 비판이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강서시(江西詩)를 배운 이들이 보여준 성과에 대해서 전면적인 부정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강서시의 특성
강서시를 배운 시인들의 시세계를 종합할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을 말할 수 있다. 첫째 작법의 연구를 통하여 낡고 익숙한 것을 거부하고, 다소간 난삽하지만 새로운 시어와 의경을 획득하고자 노력하였다. 속된 것을 가지고 우아하게 만든다는 “이속위아(以俗爲雅)”, 쇳덩이를 녹여 금을 만들 듯이 점화나 용사를 통하여 참신한 의경을 확보한다는 “점철성금(點鐵成金)” 등의 이론이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한 방안이다. 곧 “이고위신(以故爲新)”, 옛것을 가지고 새것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시정신이다. 새롭기 위하여 흐트러진 율격을 구사한 것이며, 산문적인 독특한 구법을 즐겨 쓴 것이다. 시어로 즐겨 차용하는 구어나 속어, 조사 등도 새로움을 위한 것이다.
둘째 강서시파의 영향을 받은 시인들은 학습에 의하여 시를 배우고, 또 논리에 의하여 시를 쓰기 때문에 시구의 단련을 중시하며, 그 때문이 의경의 구성에서 작위성이 강하다. 또 한 구의 핵심적인 글자인 글자를 갈고 다듬어 시안(詩眼)이 되도록 하는 것이 전형적인 작법이다. 특정한 글자를 단련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경의 전개가 조직적인 것도 강서시파의 율시 작법이다. 각 연이 층차가 분명하게 의경을 발전 혹은 반전시키면서 각 연(聯)에서 시어들이 서로 긴밀하게 호응을 이루도록 한다.
셋째 전고를 구사할 때도 논리적인 치밀한 구성을 보이는 것이 강서시풍의 특징이다. 노수신이 제작한 인종(仁宗)의 만사인 「단오제효릉(端午祭孝陵)」의 수련에서 ‘廟表全心德, 陵加百行源’라 한 것에서 이 점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구절은 『논어(論語)』 「학이(學而)」에 보이는 “효와 공손이란 인의 근본이로다[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와 주자(朱子)의 집주(集注)에 “인이란 사랑의 이치이자 마음의 덕이다[仁者愛之理, 心之德也].”라 한 것, 그리고 『예기(禮記)』에서 “효란 모든 행실의 근원이다[孝者, 百行之源也].”라 한 것을 이용하여 인종(仁宗)과 효릉(孝陵)이라는 시호와 능호에 연결하였다. 시어와 의경의 조직이 중요한 율시에 뛰어났던 정사룡(鄭士龍), 황정욱(黃廷彧) 등의 시에서 특히 이러한 작위적인 의경 조직이나 전고 활용의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를 지향한 시인들이 구사하는 고사가 익숙한 것임에 비하여, 강서시를 배운 시인들은 궁벽하고 난삽한 고사를 즐겨 구사하고 있는 것도 새로움을 위한 문학적 장치였다. 노수신(盧守愼)의 시에서 전고가 확인되지 않으면 그 뜻의 파악이 쉽지 않거니와, 전고를 잘 짜맞추었다는 점에서 새로움을 창출한 것이다. 또 점화(點化)에서도 전대의 시구를 새로운 문맥 속에 재조직하여 낯설게 하는 것이 특징이라는 점에서, 당시를 추구한 시인들이 당시와 흡사해 보이도록 하기 위하여 당시의 구절을 가져다 쓴 것과는 차이가 있다. 당풍을 지향한 시인들이 두보(杜甫)나 이백(李白) 등 특정 시인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반복하여 읽고 이를 통하여 시를 배운 것과 달리, 강서시풍(江西詩風)은 전대의 한시가 이룩한 성과를 분석하여 자신의 시작에 응용하였다는 점에서 학습의 시학이라 할 많다.
넷째 작품의 주제나 미감에서 강서시풍(江西詩風)은 그 이전의 송시풍과 변별성이 있다. 소식의 시는 주관적 감정을 외부로 거침없이 발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음에 비하여 황정견의 시는 주관적 감정을 단련을 통하여 내부로 수렴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박은(朴誾)의 「복령사(福靈寺)」 ‘春陰欲雨鳥相語, 老樹無情風自哀.’와 「재화택지(再和擇之)」 ‘天應於我賦窮相, 菊亦與人無好顔.’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인생의 비애와 우울한 서정이 그 단적인 예기도 하다. 물론 이와 같은 주제 표출 방식은 각기 개성에 의하여 약간씩 다르게 형상화되어 박은(朴誾)의 시에서는 ‘종일(縱逸)’의 미학으로, 박상(朴詳)의 시에서는 ‘강개(慷慨)’의 미학으로, 황정욱(黃廷彧)은 ‘횡일(橫逸)’의 미학으로 나타난다.
인용
1. 서론
2. 16세기의 강서시풍(江西詩風)과 당풍(唐風)
2) 송시에서 당시로의 전환, 그리고 강서시파의 영향력
3. 16세기말~17세기 복고풍과 그 반발
1) 삼당시인의 한계
2) 만당풍을 극복하기 위해 두보와 한유의 시를 배우다
4) 명 복고파의 유행: 시경체 한시나 고악부체의 유행
5) 17세기 다양한 시풍을 추구하라(feat. 장유와 이식)
6)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의고주의 비판(feat. 김창협)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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