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6세기말~17세기 복고풍과 그 반발
1) 삼당시인의 한계
개성이 사라지다
소단(騷壇)의 풍상을 당시로 옮겨 놓은 공을 인정받은 삼당시인이지만, 그 한계 또한 지적되었다. 삼당시인은 만당을 배웠다는 것으로 주로 비판되었다. 부분적으로 최경창(崔慶昌)이 초당이나 중당, 혹은 성당의 풍격이 있다고 한 바 있지만【余嘗聞諸先輩, ‘我東之詩, 唯崔孤竹終始學唐, 不落宋格,’ 信哉! 『소화시평(小華詩評)』 상권 107번】, 전체적으로는 만당의 기습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비평가들에 의하여 만당의 증거로 들고 있는 것은 기력의 부족이며, 특히 맹교(孟郊)와 가도(賈島)에 비교되었다【『학산초담(鶴山樵談)』 2b】. 그들의 시에 빈번히 나타나는 곤궁과 비애의 주제가 이러한 비판을 낳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하면서, 삼당시인과 그와 비슷한 길을 갔던 일군의 시인들이 가진 한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지나친 모의(模擬)로 인하여 개성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삼당시인들이 당시의 시구를 즐겨 습용하였거니와, 이후 당시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경향도 역시 그러하였다. 특히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명 복고파가 소개되면서 의고적 성향은 더욱 기승을 더하였다. 특히 의고적 성향이 강하였던 인물들은 시의 경우 당나라 이전의 것만 읽고 그 이후 것은 아예 읽지 않았다. 송시가 눈에 거치지 않도록 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두경(鄭斗卿)이 김득신(金得臣)의 시를 읽고 송시의 기운이 있음을 단번에 알아보았던 것은, 스스로 당 이후의 시는 읽지 않았는데 김득신의 시에서 낯선 시어가 있기 때문이라 근거를 대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현호쇄담(玄湖瑣談)』 14번】.
당시를 존숭하였던 허균(許筠)이지만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이달(李達)의 시를 두고 10편 이상 넘어가면 지겹다고 하였으며, 김창협(金昌協)은 「잡지(雜識)」에서 선조 이후의 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하여 개성이 부족하게 되었음을 적절하게 지적한 바 있다. 사실 노수신(盧守愼), 황정욱(黃廷彧), 최립(崔岦)의 시는 절로 개성이 읽히지만, 삼당시인이나 비슷한 시기 당시를 배운 시인들의 작품은 그 개성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절구의 선택으로 위약해지다
둘째 선택한 절구라는 양식 자체의 속성으로 인하여 시가 위약해졌다는 한계가 있다.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시가 위약(萎弱)하다는 비판은 그들의 시가 음악성을 추구한 결과이기도 하다. 부드러운 율조에서 강건한 힘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의 기세를 주장하는 것은 송시의 전통이다. 만당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나온 송시가 취한 것은, 산문적인 구법과 흐트러진 율격 등을 통하여 억색함을 취하였기에, 이를 다시 극복하고자 한 당풍에서 절로 부드러운 가락이 중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하곤(李夏坤)은 홍세태의 문집에 서문을 쓰면서, ‘노수신(盧守愼)과 황정욱(黃廷彧)이 스케일이 크지만 우아함과 비리함을 겸하고 체재가 순정하지 못하여 잡(雜)스러운 그 폐단이 있었는데, 최경창(崔慶昌)과 백광훈(白光勳)이 청신(淸新)과 수경(秀警)함으로 이를 고치려 하였으나, 정신이 차고 골격이 엷으며 기상이 촉급하여 협소함이 그 폐단이 되었다[蘇齋ㆍ芝川, 才具宏蓄, 氣力昌大. 然雅俗兼陳, 體裁未純, 故其弊也雜; 孤竹ㆍ玉峰, 以淸新秀警矯之. 然神寒骨薄, 氣象急促, 故其弊也隘.]’고 하였다. 곧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의 시가 스케일이 작고 기세가 약함을 지적한 말이라 하겠다.
이와 함께 당시를 추구한 이들이 특히 절구를 애호하였기 때문에 힘을 바탕으로 하는 장편고조에 명편을 내기도 어려웠다. 삼당시인을 중심으로 선발한 『악부신성』에서 전대의 악부시가 고체 중심인 데 비해, 여기서는 거의 70%가 칠언절구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실제 16~17세기 대부분의 악부풍의 한시는 절구형식으로 되어 있다.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임제(林悌)가 그러하고, 이수광(李睟光)이 그러하였다. 웬만한 시인의 시집은 상당수가 악부시로 채워져 있고, 시선집에도 이 시기 한시 중 상당수가 악부시이지만, 그러나 따로이 고시에 진력한 몇몇 시인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칠언절구로 채워져 있다. 이와 함께 악부시의 내용에서도 남성적인 출정가 계열보다는 여성적인 화자의 입을 빌어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대부분의 당시를 추종하는 시인의 시가 유약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어 있다.
울림에만 신경 쓴 나머지 내용이 공허해지다
셋째 음향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거꾸로 시 자체의 내용이 공허해져버린 문제점이 있다. 김득신(金得臣)은 『증귀곡시서(贈龜谷詩序)』, ‘삼당시인이 오로지 향(響)에만 힘쓰고 리(理)는 몰랐다[崔ㆍ白ㆍ李專以響爲務, 不知其理]’고 하면서, 당시 사람들이 ‘황정욱의 시가 리(理)는 있지만 향(響)이 없어 싫어하지만, 그러나 리(理)가 있고 향(響)이 없는 것이, 향(響)만 있고 리(理)가 없는 것보다 훨씬 낫다[芝川之詩, 有理無響, 世或絀之. 然有理無響, 大勝於有響無理].’고 하였다. 여기서 리(理)는 논리(論理)나 주제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곧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삼당시인을 위시한 당시를 배운 시인의 작품은 내용에 현실성이 부족하다. 그들이 즐겨 지은 의고적인 악부시 자체가 조선인의 정감이나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악부시가 아니더라도 실생활상을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명편은 찾기 어렵다. 태평성세에 음풍농월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민족사의 비극에 모의적인 당풍의 창작방법은 뚜렷한 대응을 보여주지 못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만당풍을 극복하기 위해 두보와 한유의 시를 배우다
시의 기세를 올리기 위해 두보를 존숭하다
삼당시인이 일시를 풍미할 때 동시에 그들의 시가 갖고 있는 위와 같은 약점에 대한 인식도 보편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권필(權韠)은 삼당시인의 한계가 약한 기세에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고, 정두경(鄭斗卿)은, 기가 쇠약하여 떨치지 못한 한계를 극복하였다고 평가된다【최석정, 「동명집서(東溟集序)」, 『동명집』】. 특히 명 복고파(復古派)가 수용된 이후에는 김득신(金得臣)이 「평호소지석시설(評湖蘇芝石詩說)」에서 “근래 학사대부의 무리가 모두 명나라의 시를 본받아서 권필의 시를 가지고 원기가 시들었다고들 생각한다.”고 증언한 것처럼, 권필의 시조차 기세가 약하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그만큼 17세기 시단의 제일 큰 이슈는 시의 기세를 높이는 일이었다.
시의 기세를 높이기 위한 노력 중 하나는 두보(杜甫)와 한유(韓愈) 시를 더욱 존숭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강서시풍(江西詩風)를 극복하고 다른 한편으로 만당풍을 극복하고자 한 권필(1569-1612)과 이안눌(1571-1637)은 특히 두시(杜詩)를 모범으로 하였다. 권필은 두보의 여운을 얻어 울연(蔚然)하게 중엽의 정종이 되었다고 평가된 바 있으며, 이안눌은 더욱 두시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안눌이 두보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관심은 젊은 시절 겪은 임진왜란 등 여러 번의 전쟁 체험에서 비롯한 듯하다. 자연스럽게 전쟁 체험으로 시사(詩史)의 가장 큰 전범이 되었던 두보(杜甫)의 시가 그에게 모범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이안눌은 두보의 시를 만삼천번 읽었고 이에 그 시가 청건(淸健)하고 침울하여 두보(杜甫)의 법을 깊이 터득하였다고 평가된 바 있다. 실제 그의 시는 두시(杜詩)에서 점화(點化)한 것이 많거니와,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통군정(統軍亭)」은 두시와 흡사한 기풍을 보여주고 있다.
한유의 시를 주목하다
두보(杜甫)의 시와 함께 한유(韓愈)의 시에 대한 관심이 이 시기 더욱 높아졌다. 이식(李植)은 「학시준적(學詩準的)」에서 “요즘 시를 배우는 자들은 한유의 시를 기초로 하고 두보의 시를 모범으로 하는데, 이는 오산 차천로와 동악 이안눌이 가르친 바다. 석주 권필도 나중에는 당률을 배웠으나 처음에는 한유를 읽었다. 고죽 최경창도 말년에 재주가 마르고 기운이 시들자 또한 한유의 시를 읽었다[近代學詩者, 或以韓詩爲基, 杜詩爲範, 此五山ㆍ東岳所敎也. 石洲雖終學唐律, 初亦讀韓. 崔孤竹末年, 才涸氣萎, 亦讀韓詩].”고 하였다. 이안눌(李安訥)의 시를 두고 차운로(車雲輅)는 그의 시가 한유(韓愈)에서 나와서 두보로 들어갔음을 밝힌 바 있다【이식, 「東岳集跋」.『동악집』】. 차천로(車天輅)도 『노자』와 『장자(莊子)』, 『사기(史記)』를 자주 읽고 두보(杜甫)와 이백(李白), 한유(韓愈)의 시를 숙독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한유(韓愈)의 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당시풍이 풍미한 후의 약한 기세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심수경(沈守慶)이 『견한잡록(遣閑雜錄)』에서 명 의고파가 득세하기 전에는 한유(韓愈)의 시와 고시를 배우는 방편으로 소식(蘇軾)의 시와 함께 많이 읽혔다고 한 것도 이러한 풍조를 지적한 말이다. 『좌전(左傳)』과 『사기(史記)』를 모범으로 하여 문장을 제작하였던 조찬한(趙纘韓, 1572-1631)의 율시 역시 두보(杜甫)와 한유(韓愈)를 배운 것임을 그의 문집 서문을 쓴 이식(李植)이 명시한 바 있다. 『서포만필』(646면)에 젊은 시절 이명한의 재주가 너무 뛰어나 그 날리는 단처를 꺾기 위하여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를 천 번 읽도록 이정구가 권하였는데, 이를 본받아 사람들이 「남산시」를 많이 읽는 것을 좋은 시를 짓는 비결로 여겼다고 한 기록도 보인다.
3) 기세를 높이기 위해 복고풍을 차용하다
지명과 인명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복고파의 방법
명 복고파의 시를 수용한 것도, 시의 기세를 높게 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였다. 명 복고파들은 두보의 웅장한 시를 흉내내어 기세를 강하게 하려 하였는데, 그때 가장 손쉬운 방안이 인명과 지명을 시어로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것이었다. 성당의 시인들이 지명의 구사를 즐겨하여 시의 기상을 높였는데, 명 의고파들이 성당의 시를 배울 때 이를 첩경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른바 “여지지지(輿地之志)”, 혹은 “점귀지부(點鬼之簿)”가 이러한 시풍의 단적인 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명대의 복고파(復古派)를 배운 시인들은 고유명사를 적극 구사하고 있다. 17세기 한시에는 지명과 인명을 구사하는 것이 큰 유행이 되었다. 17세기 시에는 한 작품 안에 구사된 지명과 인명의 수가 매우 많다. 율시의 경우 대를 하는 함련과 경련에서 용사(用事)를 하면서 지명이나 인명을 구사하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작법이지만, 특히 절구에서 고유명사가 세 번 이상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찬한과 이식(李植) 등에 의하여 점귀부체(點鬼簿體)가 나온 것도 이러한 풍상을 반영한 것이다. 또 이안눌(李安訥)은 자신의 시작에서 인명과 지명을 특히 많이 구사하였거니와, 스스로도 이를 여지지체(輿地志體)라 하였다. 이러한 작품은 물론 희작에 가깝지만, 이안눌(李安訥)의 시는 이러한 여지지체(輿地志體)에 준할 만큼 조선의 지명을 자주 구사한다. 이와 같이 인명과 지명을 적극 구사하여 강한 기세를 추구한 것이 시단의 한 유행이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정두경(鄭斗卿)은 시의 시세를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사기(史記)』와 같은 역사서에 나오는 지명을 크게 활용하였다. 「마천령(磨天嶺)」(『동명집』 권1) “마천령으로 말을 몰아가니, 층층 봉우리가 구름 속에 들어가네. 앞 숲에 큰 못이 있나니, 북해라 한다지[驅馬磨天嶺, 層峯上入雲. 前林有大澤, 盖乃北海云].” 자체가 『사기(史記)』의 문자를 구사하여 호탕의 미학에 이를 수 있었음은 이미 밝혀져 있다. 마천령(磨天嶺) 이외 대택(大澤), 북해(北海) 등과 같이 역사서에 바탕을 준 중국의 지명을 구사한 것이 이 시의 풍격을 호방하게 만들고 있다.
가행(歌行)으로 복고적 시풍을 재현하다
17세기 시단의 또 다른 특징은 고시에 대한 높은 관심을 들 수 있다. 이미 고시에 대한 관심은 권필과 이안눌에서 확인된 바 있다. 김득신(金得臣)은 「평호소지석시설(評湖蘇芝石詩說)」에서 ‘정사룡과 노수신, 황정욱 등 해동강서시파가 공통으로 부족한 곳이 가행(歌行)이었는데 권필은 율시뿐만 아니라 가행까지 뛰어나다’ 하였다. 권필(權韠)은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 장적, 왕건의 가행을 배웠으며(「학시준적(學詩準的)」 17a), 그의 시 중에 명편으로 후대 인구에 회자된 것이 대체로 그러한 작품이다. 권필(權韠)은 삼당시인의 단처였던 약한 기세, 개성적이지 못한 의경, 공소한 주제 의식을 가행체로 극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권필(權韠)의 가행체는 특유의 풍자적인 기법을 띤 것이 많다. 당대 권귀(權貴)를 풍자하여 죽음에까지 이르렀거니와, 그의 시는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 풍자라는 기법으로 당대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여, 현실을 외면한 삼당시인의 병폐를 극복하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그의 가행체는 강건한 기세를 자랑하고 있으며, 유약해지기 쉬운 악부시에서도 여성적인 정감을 억제하고 남성적인 호방함을 그 미학적 근거로 하였다. 이안눌(李安訥) 역시,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함락을 두고 읊은 「사월십오일(四月十五日)」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우국(憂國)과 애민(愛民)의 도시(杜詩)를 배우고, 자신이 직접 겪은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고시를 제작한 바 있다.
4) 명 복고파의 유행: 시경체 한시나 고악부체의 유행
한위(漢魏)의 시를 본뜨다
이러한 고시의 관심은 명 복고파의 시가 수입되면서 더욱 강도를 더하였다. 명 복고파(復古派)는 시경체(詩經體)의 한시나 고악부체를 크게 선호하였는데 명 복고파를 배운 우리나라의 시인들 역시 고시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의현은 전대 김종직(金宗直), 이행(李荇), 박은(朴誾), 박상(朴祥), 노수신(盧守愼), 정사룡(鄭士龍), 황정욱(黃廷彧) 등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고시선체(古詩選體)에서 그들이 남긴 것이 없는데 이는 한위(漢魏)의 시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고, 신흠(申欽)과 정두경(鄭斗卿)이 비로소 한위(漢魏)의 시를 받들어, 본뜬 작품을 내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명(明) 복고파의 시를 배운 시인들로는 신흠(1523-1597), 윤근수(1537-1616)가 선구를 이룬 것으로 평가되며【『서포만필(西浦漫筆)』 619면】, 허체(1563-1640), 이정구(1564-1635), 신익성(1588-1644), 이민구(1589-1670), 이명한(1595-1645), 정두경(1597-1673) 등도 복고파 계열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의 문집에는 고시에 대한 비중이 매우 높다. 신흠(申欽)은 성현(成俔), 정두경(鄭斗卿)과 함께 고대의 시를 재현하는 데 주력한 인물이거니와, 고악부에 뛰어나 한위(漢魏)와 수당(隋唐)에 이르기까지 본뜨지 아니함이 없어 혹사함이 있었으며 때로는 명나라 대가에게 발걸음을 옮겨 웅장함을 다투었다고 한다【장유(張維), 「현간선생집서(玄軒先生集序)」, 『계곡집』 권6】. 윤근수 역시 그 문집에 서문을 쓴 웅화(熊化)가 선진위한(先秦魏漢)에서 명대(明代)까지 두루 연구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1580년 이몽양(李夢陽)의 시집 『공동시(崆峒詩)』를 활자본으로 간행한 바도 있다【윤근수, 「崆峒詩跋」, 『월정집』 권4】. 허체(1563-1640)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 의고풍의 한시로 이름이 높았다. 정두경이 오언고시에 약한 데 비하여 허체는 특히 오언고시에 뛰어나, 청초고아(淸峭古雅)한 시세계를 자랑하였다고 한다(『西浦漫筆』 623면). 이정구, 신익성, 이민구, 이명한 등도 복고파를 수용한 흔적이 있으며, 그들의 시집에 복고풍의 고시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고시의 대표주자: 정두경
정두경(鄭斗卿)은 이러한 계열 중 가장 수준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정두경(鄭斗卿)은 진한성당지파(秦漢盛唐之派), 곧 명 의고파의 벽을 세운 인물로 달마가 불교를 서역에서 중국으로 전한 것과 같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명 복고파(復古派)와 같이 『시경(詩經)』을 종주로 하였고 고시악부는 한위가 가장 뛰어나고 율시는 정해진 체제에 구속되므로 고체의 고일함만 못하다고 주장하였다(「東溟詩說」, 『동명집』). 정두경이 가장 힘을 쏟은 곳도 고시였고, 또 고시가 그의 장처로 평가받았다.
특히 그의 가행은 조선 최고로 평가되었다. 정두경(鄭斗卿)은 드날리고 사나운 기세는 뛰어나지만 간절함과 여유로움이 부족한 것이 한계이기 때문에 그 장처가 절로 가행에 어울렸으며 오언고시에는 적합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정두경(鄭斗卿)의 가행은 성당의 풍기가 있어 임숙영의 변려체와 함께 중국의 명작과 나란히 둘 만하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종남총지(終南叢志)』 372면】. 가행에 능한 권필(權韠)조차도 초학자들처럼 위응물, 유종원, 장적, 왕건의 것을 배웠을 뿐, 칠언가행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두보와 이백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음에 비하여 정두경의 가행은 성당의 이백과 두보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니 그 성과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고시에 대한 문단의 높은 관심은 고시선집(古詩選集)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특히 임방은 고시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큰 노력을 하였다. 임방은 1640년 『당음오언고시(唐音五言古詩)』라는 책을 엮고【임방, 「수서당음오언고시발(首書唐音五言古詩跋)」, 『수촌집』 권9】, 1662년 다시 『당시오언(唐詩五言)』을 엮었다. 그의 부친 임의백(任義伯)이 『당시품휘』에 실린 오언고시가 번다하다고 여겨 김수항에게 점선(點選)을 부탁하고 임방의 아우에게 필사를 맡겨 책을 완성한 바 있는데, 그 후 조카의 청에 의하여 다시 정선하여 이 책을 만들게 되었다 한다【임방, 「제당시오언후(題唐詩五言後)」, 『수촌집』 권9】. 이를 이어 임방은 1691년 『가행육선(歌行六選)』을 엮었다. 당시 명시를 배운 이들은 오언고시는 한위(漢魏)의 것을, 칠언가행은 성당(盛唐)을 모범으로 하였으며, 우리나라는 과거에서 근체시만 위주로 하기에 『당음』을 보는 데 그쳤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임방은 부친 임의백(任義伯)의 명을 받아 『당음』과 『당시품휘』를 합하고 다른 책을 참고하여 성당뿐만 아니라 초당과 중당, 만당의 가행을 두루 택하여 2권의 책자를 만든 바 있는데, 자료를 널리 구하지도 못한데다 뽑은 것 역시 정선(精選)되지도 못한 것에 불만을 느껴 다시 경물을 잘 묘사하고 말을 만든 것이 청신한 것을 뽑고 그 품격에 따라 여섯 부류로 나누어 이 책을 만들게 된 것이라 한다【임방, 「가행육선서(歌行六選序)」, 『수촌집』 권8】.
5) 17세기 다양한 시풍을 추구하라
장유, 17세기 초부터 다양한 시풍의 수용 주장
17세기 한시사는 복고풍의 시대다. 비평에서도 17세기 후반까지 당시풍을 존숭하는 일련의 시화가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 비평서들은 대부분 실제 비평을 중심으로 한 것이며, 작품의 우수성은 당시에 얼마나 핍진(逼眞)한가가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시사의 중심적인 흐름 이면에 18세기 새로운 시학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17세기 초반부터 싹트고 있었다.
명나라 복고파가 수용되기 시작하는 17세기 초반 장유(1587~1638), 이식(1584~1647) 등은 복고풍을 비판하고 다양한 시풍을 개성에 맞게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장유는 당시 문단의 폐해가 명시를 배우는 데서 발생하였다면서, 명나라 시문이 애초에 나쁜 것은 아니지만 배우는 자들이 그 말단만 배우고 그 근본을 무시하여 그림자와 소리만을 추구하며 껍질을 벗기고 고기를 잘라 한 가지로 되어, 볼 만하지 않다고 하였다. 곧 명시를 배운 자들이 시의 음향과 기상만 따지고 옛 시를 모방하는 데 급급하였다는 것이다. 『계곡만필』에서 ‘시언지(詩言志)가 곧 진정(眞情)과 실경(實境)을 말한 다음에야 볼 만하고 그렇지 않아 억지로 빈 말을 만들면 공교롭다 하더라도 칭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거니와, 또 스스로 정한 다섯 가지 경계에서 두 가지가 표절하지 말자는 것과 모의(模擬)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모의가 아닌 진(眞)에 바탕한 문학을 하기 위해서도 전범이 필요하다. 장유는 그 전범을 『문선(文選)』의 오언시(五言詩)에서 찾았다. 장유는 16세 무렵 김상용으로부터 한유(韓愈)의 글을 배웠고 또 『초사(楚辭)』와 『문선(文選)』을 읽어 시작(詩作)의 틀을 마련하였다(『谿谷漫筆』 권1 62a). 이식도 『당음』과 함께 『문선』을 숙독하였다고 한다. 인위적인 율시보다 고시가 진(眞)을 드러내기 적절하였기에 고시를 선택한 것이고, 이를 위하여 『문선』을 읽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귀결처는 어느 특정한 유파에 매이지 않고 여러 시대 시의 장처를 취하여 자신의 개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장유는 젊은 시절 『문선』과 한유의 시를 읽고 오언고시만을 썼고 1613년 이후에야 두보(杜甫)와 이백(李白), 그리고 『당음(唐音)』을 읽었으며, 가행을 배우고자 하였으나 생삽(生澁)하였는데 2-3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 방편을 알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거니와(『谿谷漫筆』 권1 63a), 그는 고시와 당시, 송시, 명시 등 다양한 시를 참작하였다. 오언고시와 가행 등에 자신이 생긴 다음에는 당과 송, 명나라 여러 작품들을 참조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谿谷漫筆』 권1 63a).
이명한은 장유가 유독 「이소(離騷)」와 『문선』의 시체를 좋아하였는데, 이윽고 그의 시가 성당의 풍격에 이르렀고, 정격, 변격, 우아한 격, 해학적인 격도 두루 하여 크게 하려면 크게 하고 작게 하려면 작게 하여 마음먹은 대로 되었다고 하였다. 장유(張維)의 시가 한 곳에 매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장유는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오언고시에 일가를 이루었다.
이식의 다양한 시풍 추구 주장
이식(李植)이 추구한 바도 장유와 유사하였다. 잘 알려진 대로 이식은 두시를 배우고 조선의 현실에 체화하려 한 이안눌(李安訥)의 노력을 이어, 두시를 배우는 데 가장 큰 힘을 쏟았다. 스스로 『두시택풍당비해』라는 방대한 주석서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한 이식도 젊은 두시를 배우는 어려움을 「학시준적(學詩準的)」에서 토로한 바 있다. 이식은 어린 시절 먼저 두시를 읽었고, 다음에 황정견과 진사도, 그리고 『영규율수(瀛奎律髓)』 등의 시를 읽었으며, 다시 『문선』과 『당음(唐音)』을 읽었지만 잘 배울 수가 없었는데 그렇다고 두시를 버리고 당시를 배울 수가 없어, 마흔이 넘어서야 호응린(胡應麟)의 『시수(詩藪)』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시를 배우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이식은, 결론적으로 시를 배울 때 어느 한 쪽만 전문으로 할 필요가 없으며, 먼저 고대의 시와 당시를 배우고 두시로 돌아가게 되면 될 것이라 하였다. 이식은 물론 당시를 배우기 위하여 두시를 반드시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 시인이나 시풍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송시를 배척하지만 진사도와 진여의의 율시가 두보의 율시에 가까우므로 참작하여야 한다고 하고, 또 이몽양이 두시를 잘 배웠다는 점에서 참조할 만하다고 하였다. 「학시준적(學詩準的)」은 시를 배우기 위한 지침을 적은 글로, 여기에는 시체별로 어느 한 인물이나 시기 시에 편중되지 않고, 그 장처에 따라 전범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6)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의고주의 비판
김창협의 의고주의 비판
장유(張維)와 이식(李植)에 이어 17세기 후반 무렵 본격적인 의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강서시(江西詩)나 의고주의에 대한 비판의 공통점은 眞에 있거니와 이러한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은 17세기 말엽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에 이르러 논리화된다.
김창협(1561-1708)은 진시(眞詩)를 주장하면서 자연(自然)과 천기(天機)를 거듭하여 강조하였다. 김창협(金昌協)은 이반룡이 당나라 이후의 시어를 쓰지 못하게 한 것을 비웃었다. 그는 이반룡이 옛것을 배운다면서 언어의 모방만 하여 당시를 배우고자 하면서도 당시의 시어만을 썼으니, 당 이후의 것으로 용사를 하면 그 말이 당시와 같지 않을까 금제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의고주의가 문제는 참됨을 잃은 데 있다고 보고, 시라는 것은 성정(性情)을 그려내므로 느끼고 부딪치는 모든 것이 시의 질료가 될 수 있다고 하고, 또 용사의 정교함과 추졸함, 언어의 우아함과 비속함을 굳이 따질 필요가 없으며, 옛 시와 지금의 시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잡지」 권34).
17세기엔 의고주의가 성행했다
김창협(金昌協)의 비판은 물론 명의고파를 겨냥한 것이지만, 17세기 만연한 조선의 의고파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득신(金得臣)이 자기의 작품을 정두경(鄭斗卿)에게 보이니 정두경이 김득신이 당시를 배운다면서 송시의 말을 썼다고 하였다. 이에 그 근거를 묻자 정두경은 자신이 평생 읽고 외운 것은 당나라 이전의 시인데 김득신 시의 글자 중에 보지 못한 것이 있다고 한 일화(『현호쇄담(玄湖瑣談)』 14번)에서 정두경이 보여준 태도는 바로 이반룡의 것과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김창협은 또 당시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어서 당시를 배워야 하지만, 그러나 반드시 당시와 같은 필요는 없다고 하고, 당시가 성정과 흥기에 주로 하고 고실과 의론을 일삼지 않는 것은 배울 만하다고 하였다. 이 같은 태도에서 정두경의 시가 사기와 고악부의 말을 사용하기를 좋아하여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지만 사실은 솜씨조차 둔한 도적일 뿐이라 폄하하였다(「잡지」 권34).
7) 17세기 말에 다시 등장한 송시
당시의 무개성에 다시 대두된 송시
이러한 주장은 앞서 본 대로, 이식(李植), 장유(張維) 등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거니와, 당시에 대한 일방적인 추종을 거부하는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는 점차 한나라와 당나라의 시를 부화하게 본뜨는 명시에 싫증을 느끼고 송시를 표창하는 분위기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비평에서도 이러한 주장이 점차 강해지고 시단의 풍상도 점차 송시를 배우는 이들이 많아졌다. 당시를 모범으로 생각했던 홍만종(洪萬鍾)조차 『시평보유』(하)에서 세상에 당시를 하는 사람들은 송시가 비루하여 배울 만하지 못하다고 하고 송시를 배우는 사람들은 당시가 위약하여 배울 필요가 없다고 배척하는 풍조를 비판한 바 있거니와, 실제 비평에서도 송시풍의 작가를 다른 작가와 비슷한 비중을 두어 논하였다.
김만중(金萬重)도 무작정 송시를 폄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스스로 『송시초(宋詩抄)』를 엮은 바도 있으며(「宋詩抄序」, 『서포집』 권9), 허체와 같은 오언고시의 대가조차 이미 그 이름이 잊혀 졌는데 그 이유가 고학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 탄식하기도 하였다(『서포만필(西浦漫筆)』 623면). 김창협(金昌協) 역시 「잡지(雜識)」에서 송시가 비록 고실과 의론을 주로 하기는 하지만 격조에 구애되지 않고 형식에 억눌리지 않아 기상이 호탕하여 오히려 성정의 참됨을 볼 수 있다고 하여 당시 편향을 경계하였다.
송시의 재출현엔 중기 이후 주자학자들의 등장과 관계된다
이와 함께 송풍이 다시 대두하게 되는 시풍의 변화 저변에는 퇴율(退栗) 단계를 지나, 우암(尤庵) 등 걸출한 주자학자들이 등장하면서, 주자의 문학관을 추수하려는 움직임이 연결되어 있다. 산림으로 물러나 수양의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서 심성을 수양하고, 그러한 뜻을 펴는 시를 짓는 것이 더욱 유행한다.
특히 노론을 중심으로 한 학자형 문인에 의하여 구곡의 경영이 널리 유행하게 되면서, 화려한 지방문화 시대를 열기도 하거니와, 이러한 공간에서 제작된 구곡가계(九曲歌系) 한시는 경물에 대한 흥취도 중시하지만, 자연 속에 내재한 이취(理趣)를 추구하려 한 것이 많다. 또 생활공간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노래하는 팔영(八詠), 혹은 십영(十詠)도 17세기에 더욱 많아진다. 이러한 시에서도 경물의 아름다움에 대한 흥취를 노래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심성(心性)과 도체(道體)를 자연물에 연결시킨 것이 많다. 예를 들어 하수일의 「독서대팔영해의(讀西臺八詠解義)」(『송정집』 권3)에서는 그의 숙부 하항(河沆)이 지은 팔경시를 들면서 하나하나의 경물을 심성에 연결시키는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는 절로 송풍을 띨 수밖에 없다.
17세기부터 창작된 연작시엔 송시적 특질이 담겨 있다
이러한 구곡가나 팔경시와 함께 17세기 후반부터 대장편 연작시가 창작되기 시작하는데, 이들 작품 역시 송시적(宋詩的)인 특질을 구현한 것이다. 장편의 연작시는 18세기 한시사의 큰 특징으로 계승되거니와, 이미 김수증이 110수의 칠언절구 연작이과 98수의 오언율시 연작을 제작한 바 있다. 물론 그 이전에 김시습(金時習)과 박상이 100수의 칠언절구 연작시를 제작한 바 있지만,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가속화되어 상당수 문인의 문집을 보면 수십수의 연작시가 쉽게 발견된다. 김수증의 이러한 연작시는 18세기 김창흡(金昌翕)이 18세기 초반 392수의 「갈역잡영」 제작으로 이어지며 이들의 후학에 의해서도 이러한 경향은 지속된다.
이러한 연작시는 흥감을 중시하는 당풍적인 요소보다 자신의 생활 감정과 의지를 적어낸다는 점에서 송풍에 가깝다. 그러나 소동파나 황정견 등 16세기까지 수백년 동안 주류를 형성했던 송풍과는 또다른 새로운 송풍으로, 염락(廉洛)의 풍기(風氣)가 있으면서도 자신의 의지와 정감을 개성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8) 17세기 후반 조선적 당풍의 대두
송풍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등장한 복고풍
주자의 존숭이 생활되면서 큰 유행이 되었던 구곡가 계열이나 그 밖의 연작시 중 상당수가 주자학의 내재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거니와, 이 같은 근체시 자체가 성정(性情)을 자연스럽게 유로(流露)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들어, 고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17세기 후반 시단의 한 경향이었다. 물론 만당을 극복하고자 한 복고풍의 시인들에 의하여 가행체나 악부 등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 또 다른 양상에서 『시경(詩經)』과 『문선(文選)』이 주자학적 문인들에 의하여 숭상된 것이다. 학자풍의 문인들은 17세기에 온유돈후(溫柔敦厚)의 시교를 다시 강조하게 되는데 이때 전범이 되는 시가 바로 『시경(詩經)』과 『문선(文選)』이었다. 이민서(李民敍)가 김만중과 함께 『고시선』을 엮은 것도 단순한 명시의 추종이 아니었다.
주자가 『시경(詩經)』에서 한위진(韓魏晋)에 이르기까지의 시를 모아 작시의 전범으로 제시하려 하였으나 책을 완성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뜻을 잇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古詩選跋」, 『서하집』 권12). 김창협(金昌協)의 문하에서 나온 이의현은 주자가 한결같이 ‘고선체(古選體)’를 법으로 하면서 수양에 힘쓰는 학자로서의 생활감정과 도학의 깊은 뜻을 담아내어 천고에 없던 바를 개척하였다고 한 바 있다(「雲陽漫錄」, 『도곡집』 권27). 명시를 배운 이들이 한위(漢魏)의 시를 모의하려 하였기에 주자나 이들이나 모두 고시를 추종한 점은 유사하지만, 그러나 성정론(性情論)의 원론에서 다시 고시를 재평가한 것이라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박세당 역시 「백곡집서(栢谷集序)」(『서계집』 권7)에서 당 이하의 시를 부정하는 태도를 보인 것도 이와 유사한 논리다. 김창흡(金昌翕) 역시 그 형 김창협(金昌協)과 유사한 시학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거니와, 특히 일련의 편지를 통하여 조성기와 시도에 대한 토론을 벌인 글에서는, 『시경(詩經)』과 『초사』, 한대의 고시, 그리고 위진의 완곽(阮郭), 도연명(陶淵明), 유종원(柳宗元)의 시를 배워야 한다는 주자의 설을 이으면서, 당시와 송시, 명시가 차례로 문제가 있음을 따지고 또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되던 이안눌(李安訥)과 차천로(車天輅)의 시에 대해서도 극렬하게 비판하면서 18세 새로운 시풍을 예고하였다.
조선적 당풍: 조선시
이러한 다양한 시풍이 전개되는 17세기 후반의 한시단에서 가장 주목되는 시풍은 조선적인 당풍이다. 17세기에는 여전히 복고적인 당풍이 주류를 형성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모의 차원이 아니라 조선의 현실과 조선인의 정감을 바탕으로 한 조선적인 당풍이 대두하고 있었다. 당풍에 대한 추종과 조선적인 현실이 어우러지면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 짧은 절구 형식을 차용하되, 조선의 현실 공간을 배경으로 조선인다운 정감을 드러낸 시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계열의 작가로 김득신(金得臣)을 들 수 있다. 김득신(金得臣)은 송시(宋詩)를 배워 고음(苦吟)의 시학을 주창하면서 자구의 조탁을 중시하였지만, 그 결과는 기벽하고 난삽한 송풍(宋風)이 아니라 당풍(唐風)의 청신(淸新)을 드러내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당풍이든 송풍이든 조선적인 색채가 강해지면, 곧 중국적인 냄새, 다른 한편 예스러운 맛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의고풍의 한시를 즐겨 제작하였던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에서 말류의 폐단이 고학을 전폐하여 공소하고 비루함이 소식을 존숭하던 시기나,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우던 시기, 혹은 삼당이 만당을 추구하던 시기보다 더욱 심하다고 하였다. 그는 당송의 유풍과 여향이 땅을 쓴 듯 없어져 시학의 액운이 더 심했던 적이 없었다고 개탄한 바 있다. 김만중의 탄식은, 곧 당시나 송시, 혹은 그보다 앞서 시경시나 고악부를 배우지 않는 세태를 지적한 것인데, 바로 조선적인 시풍이 17세기 후반에 강해짐을 역설적으로 말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4. 결론
이상에서 16세기 강서시풍(江西詩風)이 문단의 중심에 서 있다가, 후반부터 강서시풍이 당풍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피고, 17세기 초반 다시 당풍 중에서도 명 의고파의 영향으로 의고성이 강해졌다가 이에 대한 반발로 조선적인 당풍과 새로운 기풍의 송시가 등장하게 되는 한시사의 변화 양상을 고찰하였다.
이어 17세기 후반 의고풍을 반대하고 조선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시풍이 개진되어 18세기 새로운 시풍의 선성이 되고 있는 양상을 살폈다. 본고에서는 시풍의 변화 양상을 중심에 두고 논하였기에 특히 17세기의 시단의 활동적인 면모는 고찰하지 못하였다. 특히 인왕산 아래의 침류대, 청풍계, 백운동, 삼청동, 필운대 등지나 한강 일대에서 벌어진 시회의 멋진 풍류와 같은 문학 활동에 대한 연구는 훗날의 과제로 남긴다. 또 지방에서 생활의 공간에서 구곡을 경영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팔경이나 십경 등으로 칭명하면서, 아름다운 제영을 남긴 지방에서의 문화 활동도 자세히 다루지 못하고 후고를 넘긴다.
토론문 - 정민(한양대)
1.
16세기 후반 당시풍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해동강서시파의 공이 적지 않다고 했다. 해동강서시파 또한 두보에 대한 연구가 깊었던 점을 그 증거로 들었다.
그리고 박순, 백광훈, 이달 등과 해동강서시파 사이의 사승과 교류를 지적했다. 단순히 해동강서시파의 시인이 두보를 존숭한 사실과 16세기 후반 당시풍의 성향은 그 성격면에서 판연히 다르다. 우리의 관심은 그들이 강서시풍과는 전혀 다른, 두시풍과도 구분되는 낭만적 당시풍으로 선회했다는 점일 뿐인데, 단순히 강서시파와의 계기성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변별이 명확해지지 않는다. 공이 많았다는 말은 16세기 당시풍의 성립에 해동강서시파가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인가? 아니면 해동강서시파의 바탕을 딛고 그 극복과 계기선상에서 16세기 당시풍이 이루어졌다는 정도의 뜻인가? 후자라면 오해의 여지가 있고, 전자라면 문제가 있다.
2.
점귀부체나 여지지체의 시작(詩作)을, 강한 기세를 추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설명하였다. 오히려 이런 잡체 형식의 시체는 당시 널리 성행했던 잡체시의 형식 실험과 관련지어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잡체시에 몰두하는 것은 창작 역량의 제고에 따른 실험 정신의 확대, 혹은 과시 욕구가 맞물린 것으로 생각된다. 인명과 지명의 사용이 시의 기세를 어떻게 높일 수 있는지는 납득할만한 설명이 없고, 질문자의 생각에는 기세와 관련도 없을 것 같다. 그러기에 각주 36에서 홍만종은 이런 모방이 불필요하다고 따끔하게 지적한 것이다. 정두경도 『사기』의 구절을 인용한 결과 호방의 미학을 성취한 것이지, 시의 기세를 높이기 위해 지명을 인용한 것은 아니다. 순서가 거꾸로 된 설명 아닌가? 전반적으로 지명 부분의 논의는 껄끄러워 전체 논문의 논리에 부담을 주는 느낌이 있다.
3.
복고풍을 비판한 대표주자로 장유와 이식을 들었는데, 실제 복고풍의 시는 뒷날의 논의에서도 확인되듯 정두경 이후에야 비로소 비판의 도마에 오른다. 시기로 보아 장유와 이식은 정두경보다 선배이니, 선후에 도착이 생긴다. 즉 후배의 시가 비판의 대상이 되기 이전에 논한 논의를 복고풍에 대한 비판으로 끌어당겨 기술한 듯한 인상이 든다. 기술 순서상의 문제일 듯도 한데, 재고가 필요하다. 복고풍 비판의 대표주자는 장유와 이식이 아니라 농암 형제 쪽이라야 맞다.
4.
17세기 후반에 주목된다는 ‘조선적 당풍’의 실체가 모호하다. 각주 67에 나오는 임제의 「패강가」는 16세기 후반의 것이다. 실제 이 시기 작품 속에서 이른바 ‘조선적 당풍’ 계열에 속할 수 있는 작품의 구체적인 예와 작가의 적시가 있어야 한다. 또 이 부분에 와서 선명하던 논문의 구도가 흔들리는 느낌을 갖게 된다. 즉 16,7세기 한시 문학의 구도를 강서시풍, 만당풍, 복고풍의 흐름으로 잡아오다가 갑자기 삼연 계열의 송시풍과 정체가 모호한 ‘조선적 당풍’이 혼효하는 양상으로 기술되고 있는데, 이 송시풍과 조선적 당풍의 역학 관계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논리적 배려를 하지 않아 아쉽다. 사실 이 ‘조선적 당풍’의 개념 문제는 발표자가 지닌 독특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어, 경우에 따라 이 논문의 가장 정채로운 부분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이상 지적한 몇 가지 외에 전체 논문의 논의에 대해 질의자는 전적으로 의견을 같이 한다. 단편적인 정보들을 통해 한 시대 문학사를 세밀하게 분절해내고, 나아가 입체적 전망과 구도를 제시한 것은 이 논문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이다.
인용
1. 서론
2. 16세기의 강서시풍(江西詩風)과 당풍(唐風)
1) 송풍(강서시풍)의 전개 양상
2) 송시에서 당시로의 전환, 그리고 강서시파의 영향력
3) 삼당시인, 강서시풍 넘어서기
1) 삼당시인의 한계
2) 만당풍을 극복하기 위해 두보와 한유의 시를 배우다
3) 기세를 높이기 위해 복고풍을 차용하다
4) 명 복고파의 유행: 시경체 한시나 고악부체의 유행
5) 17세기 다양한 시풍을 추구하라(feat. 장유와 이식)
6)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의고주의 비판(feat. 김창협)
7) 17세기 말에 다시 등장한 송시
8) 17세기 후반 조선적 당풍의 대두
4. 결론
5. 토론문